533화 사리엘
레이 젠슨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레이 젠슨의 생각을 모르는 것인지 기왕 말 나온 김에 한다는 듯이 부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네. 제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게 무언가?”
“원유 생산 회사와 줄을 대 주십시오.”
“뭘 해달라고?”
시답지 않은 부탁을 이야기하면 화를 내려던 레이 젠슨은 뜻밖의 부탁에 다시 한진영에게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 줄을 대 달라고?”
“원유생산 업체 말입니다. 정제회사는 제가 나름대로 그동안 친분을 쌓아온 곳이 있어서 해결할 수 있는데 생산업체는 아는 곳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친분을 쌓고 거래를 트자니 시간이 부족한 것 같고요. 역시 지난번에 고문님께서 유조선을 확보해주셨듯이 원유생산 업체 또한 고문님의 인맥에 기대어 볼 생각입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한진영의 부탁과 함께 장이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가 6,902에 -5.9% 하락으로 장이 시작됐다.
시장은 또다시 저점을 붕괴시키기 위해 하염없이 바닥으로 꽂혀 들어갔다.
장이 열리고 순식간에 세이지가 보유하고 있던 매도 잔고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지난 하락 때보다 물량이 더 많이 나오는 것이 어쩌면 오늘 나머지 잔량을 모두 털어낼 수 있을지도 모를 정도로 매도 물량의 시장 출회는 거세기만 했다.
레이 젠슨은 결국 지난번에 만들어 놓은 저점인 6,800대마저 깨버린 지수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지금 레이 젠슨의 귀에는 한진영이 건넨 부탁만이 맴돌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 원유 생산 회사에 줄을 대 달라는 뜻은…… 자네가 원유를 확보하겠다는 뜻인가? 선물이 아니라 현물을 확보하겠다고?”
“네. 현물을 확보해볼 생각입니다.”
“확보한다고 하더라도 물건을 어떻게 받을 생각인가? 정제회사 이야기를 한 것을 보니 중간 유통에 발을 디디겠다는 이야기인가? 그건 이미 시장이 형성되어 있어서 새로 들어갈 수 없어. 그리고 들어가겠다고 마음먹어도 그 과정이 험난하기가…… 아니. 나는 도대체 자네 생각을 읽을 수가 없으니 그냥 속 시원하게 이야기해 주게. 노인네 숨넘어가지 않도록 말이야.”
한진영이 원유 생산업체에 줄을 대서 무얼 하려고 하는 것인지 레이 젠슨은 한 치도 예상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가 어지러워지기만 할 뿐이었다.
레이 젠슨은 머리에 오른팔을 올리고 뒤로 기댄 후 왼손을 까닥였다.
빨리 그냥 말하라는 레이 젠슨의 손짓에 한진영은 가만히 웃으며 이유를 이야기했다.
“원유를 좀 확보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대략…….”
한진영이 조지훈을 돌아봤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시선에 레이 젠슨을 향해 한진영을 대신하여 이야기했다.
“3,000만 배럴 정도를 저희가 보유할 수 있습니다.”
“3,000만 배럴?”
레이 젠슨은 눈을 감고 있던 손을 떼고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레이 젠슨의 시선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어떻게 보유할지 궁금하시겠죠? 지난번에 구해주신 배가 있지 않습니까? 우선 그 배에 기름을 채울 생각입니다.”
“배? 유조선?”
“네. 그 배가 텅텅 비어서 현재 텍사스만 앞에 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구해주신 원유 창고도 현재 비어있는 상태입니다. 그곳에도 기름을 채워 넣을 생각입니다.”
레이 젠슨은 한진영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한진영의 말을 듣고 지금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는 상황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감히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자기가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진짜로 그 상황이 펼쳐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보이는 레이 젠슨의 시선에서 고개를 돌렸다.
화면 속의 계좌는 시작된 지 몇 분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벌써 200억 달러 규모의 물량이 정리되었음을 알려줬다.
큰 이변이 없다면 오늘 안에 9,600대부터 끌고 내려온 매도 물량을 모두 정리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
“코스피는 장 중 한때 1,440선 아래로 하락하기도 했습니다. 선물 시장에서는 사이드카와 서킷브레이커가 연달아 걸리기도 했습니다. 업종별로는 항공과 화학이 15% 하락, 디스플레이 장비 및 기계업종이 14%대 하락을 보였고…….”
조지훈은 한진영 앞에서 대한민국 주식시장을 브리핑했다.
현재 세이지가 주력으로 움직이는 곳은 뉴욕시장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코스피 시장은 세이지가 중요하게 여기는 시장 중 하나였다.
한진영은 가만히 조지훈의 브리핑을 모두 들은 뒤 지시를 내렸다.
“코스피도 마찬가지야. 오늘부터 물량 담으라고 해. 주력으로 잡는 곳은 반도체를 비롯한 IT분야. 전통적인 산업 강자들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 첨단분야에 주력하여서 매매하라고 언질을 줘.”
“네. 알겠습니다.”
조지훈은 한진영이 코스피까지 매수 신호를 준 것에 하락이 이제 끝이 난 것이 아니냐는 생각하게 됐다.
“그것보다 시장에서는 우리보고 뭐라고 하지 않나?”
결국 시장은 한진영이 강조한 6,600대를 찍고 말았다.
-8%가 넘게 빠지며 시장은 다시 한번 공포로 뒤덮이고 말았던 것이었다.
다우존스30 산업평균지수가 3년 2개월 만에 2만 고지를 내줬다.
유럽 증시도 5%가 넘게 하락하며 장이 마감됐다.
미 연준이 파격적인 경기부양책을 써도 투자자들의 공포를 잠재우기는 역부족으로 보이는 하루였다.
고용 악화 징후도 잇따라 나타났다.
미국의 자동차 3사의 북미 공장 가동을 멈추기로 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독일의 자동차 기업도 미국의 자동차 공장과 마찬가지로 유럽과 남아프리카 공장 가동 중단을 결정했다.
월스트리트의 경제 예측회사는 코로나 사태로 미국 내 실업률이 6.3%까지 높아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코로나19의 위기가 이제 현실로 직접 닥쳐오는 상황에서 증시는 하락을 그저 지켜보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전저점이 무너지고 6,600대에 돌입했을 때 세이지의 포지션이 공개됐다.
세이지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포지션 공개였다.
그저 헤지펀드 계열의 회사들이 파산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소리에 반대 매매 물량이 어디서 얼마나 나오는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세이지의 매도 청산 움직임이 포착된 것이었다.
시장 참여자들은 세이지가 미칠듯한 매수를 보인다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매수가 공매도 청산이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진영은 포지션이 공개된 상황에 더는 숨길 것이 없다며 더욱 세차게 청산을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단, 하루 만에 2,000억 달러에 달하는 물량을 모두 정리한 세이지였다.
시장은 세이지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런 많은 매도 물량을 들고 온 것인지 궁금해했다.
그리고 세이지가 이런 큰 물량을 청산하는 것이 이제 저점에 다다르지 않았냐는 의견이 차츰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 덕분인지 시장은 세이지의 소식 이후 천천히 상승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상승에 탄력이 붙자 갑작스럽게 힘을 받아 장중 7,000선을 돌파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미친 퍼포먼스를 보여준 세이지를 따라 매수세가 붙으며 시장을 들어 올린 것이었다.
나스닥 지수는 7,182 -2.07% 자리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올라간 힘은 7,200을 뚫어내지 못한 채 힘없이 꼬꾸라지고 말았다.
세이지가 매도 청산을 하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매도 포지션을 정리하고 있는 것일 뿐 본격적인 매수 포지션은 아니지 않냐는 의견이 힘을 받았기 때문이다.
시장은 결국 시가보다는 높지만 여전히 7,000선을 뚫어내지 못한 6,989자리에서 장을 마감하게 됐다.
한진영은 이런 시장의 움직임에 세이지가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큰 영향을 미쳤다면 시장에서도 세이지를 부르는 이름 하나쯤은 생기지 않았을까 하여 조지훈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한진영의 질문에 조지훈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자네 표정을 보니까 좋지 않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나 보군. 괜찮아. 이야기해봐.”
“좋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단지, 회장님의 별명이…….”
“내 별명? 내 별명이 뭔데?”
한진영의 질문에 조지훈은 눈을 감은 채 시장에서 불리는 한진영의 별명을 입 밖으로 내놓았다.
“사리엘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사리엘? 그게 뭔데?”
한진영은 처음 듣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고는 조지훈에게 물었다.
조지훈은 천천히 눈을 뜨고 한진영에게 사리엘에 관해 설명했다.
“유대교에서 언급되는 죽음의 천사 이름이라고 합니다. ‘죄의 길로 유혹당하는 인간들의 영혼을 지키는 것’이 사리엘의 역할이라고 합니다.”
“천사면 좋은 거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그게…….”
조지훈은 씁쓸한 입맛을 다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7대 천사 중 하나의 후보로 거론되기는 하는데…… 각 문화권에서는 타락천사로 묘사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타락천사?”
“과거 민간에서는 대상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사안(邪眼)의 소유자로 불린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타락천사, 일종의 악마로 이야기하는 문화권도 있습니다.”
한진영은 조지훈의 설명을 들으며 짙게 미소 지었다.
오히려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이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미소를 보면서도 찜찜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독교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종파에서 언급되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천사지만 악마로 변한 케이스라고 말입니다. 별명이 널리 퍼지기 전에 우리 쪽에서 먼저 나서서 막아볼까요?”
“여긴 우리 홈그라운드가 아니야. 대한민국에 있을 때처럼 언론을 이용해서 우리 마음대로 여론을 조작하지 못해. 자칫 무리해서 움직이다가는 오히려 기존 기득권층의 눈 밖에 나서 피곤해질 수 있어. 그냥 놔둬.”
한진영은 애초에 할 생각을 하지도 말라는 말을 전하고는 궁금하다는 듯이 조지훈에게 사리엘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물었다.
“그런데 날 사리엘로 부르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그게 뭐야? 얼마 전까지 마스크맨이라고 부르더니 단번에 별명이 바뀌고 말았네.”
“오늘 저점을 찍고 오르는 모습 때문에 생긴 모습 같습니다.”
“저점을 찍고 오르는 모습 때문에? 왜?”
“7,000선 언더에서 매수 진입했던 투자자들이 우리를 보고 저점에서 손절하려던 것을 참았다고 합니다.”
한진영은 조지훈의 말에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손절하려고 했는데 우리의 매도 청산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손절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손실 볼 뻔한 걸 막아줬다. 유혹당한 인간들을 지켜주는 역할을 했으니 사리엘이라고 부른다. 뭐 이런 건가?”
“거기에 더해…… 순식간에 타락할 수도 있다고 하여…….”
“하하하. 그렇지. 언제나 타락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이 바닥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니 그것도 맞는 말이지.”
한진영은 별명을 잘 지었다고 생각하며 만족스러워했다.
“재미있네.”
“어떻게 할까요?”
“조 실장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은데 난 마음에 들어. 그러니 놔둬.”
“네. 알겠습니다.”
한진영이 마음에 든다고 말하자 조지훈은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좋네. 7대 천사로 언급되며 유혹을 막아주는 천사. 하지만 사안을 가지고 있어 공포의 존재이며 타락천사로 불리기도 하는 존재.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나를 아는 사람이 지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지었네. 아주 잘 만들었어.”
한진영은 기분이 좋은 듯이 웃었다.
***
매도세의 힘은 여전히 남아 시장을 짓눌렀다.
지금까지 이어져 온 추세의 힘과 시장의 흐름이 쉽게 상승기류에 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시장이 하락을 이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세이지가 선두에 서서 매수를 하며 시장의 하락을 용납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장은 매수와 매도의 계속된 힘겨루기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전날 신저점을 찍었던 증시는 이런 힘겨루기 속에서 힘겹게 상승하는 모습을 보였다.
S&P 500은 0.5%, 다우지수는 1% 가깝게 상승했다.
나스닥만이 2% 넘게 오르며 그래도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러나 이런 상승세도 다시 하루 만에 꺾이고 말았다.
전날 7,000선 회복을 이루었던 증시는 하루 만에 4% 가까이 하락하며 재차 7,000선을 내주고 만 것이었다.
뉴욕주가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비필수 사업 셧다운을 명령한 것이 하락의 이유였다.
뉴욕주지사는 기자회견에서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은행과 식료품점, 약국 등을 제외한 비필수 업종에 대해 100% 재택근무 명령을 내린다”고 발표했다.
주지사는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규모와 상관없이 어떠한 모임도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뉴욕의 이런 발표는 미국의 신규 확진자 수가 5,000명을 넘어서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뉴욕의 선택은 다른 주로까지 이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세계 최대 소비 시장이라는 미국이 문을 걸어 잠그고 몸을 숨기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현재 오일의 선물 매도 포지션을 제외한 모든 매도 포지션이 정리가 된 상태입니다. 공매도 물량 및 선물의 리스트는 앞에 놓인 서류 속에 담겨 있는 애용 대로입니다.”
홍대민은 한진영과 레이 젠슨 등이 자리한 곳에서 이번 매도 포지션을 정리하는 발표를 하는 중이었다.
그는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기쁜 일이 있는 것 같은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헷지 물량으로 인해 손해를 본 것과 지역별로 나누어진 것을 모두 포함한 수익은 1,947억 달러입니다. 여기에는 원유 선물 10만 계약 매도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레이 젠슨은 1,947억 달러의 수익을 올린 종목들을 훑어보며 헛웃음을 계속 내뱉었다.
“허허. 허허.”
홍대민은 발표하다 말고 레이 젠슨의 표정을 살폈다.
계속 리스트가 적혀있는 종이들을 넘기며 헛웃음을 내뱉는 것이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레이 젠슨은 발표가 멈춰진 채로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을 올려다보고 손을 흔들었다.
“미안하네. 이상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니까 나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게.”
레이 젠슨이 멋쩍은 웃음을 짓고 다시 리스트로 시선을 옮기자 한진영이 계속하라는 신호를 줬다.
홍대민은 한진영의 수신호에 다시 미소를 머금고 발표를 이어갔다.
“7,000선이 깨지며 나온 대량 매도세가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현재 시장에서는 최소 열 군데 이상의 헤지펀드가 정리됐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리 매물의 대부분을 우리가 받아내며 청산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열 군데…… 허허. 허허.”
레이 젠슨은 이번에도 헛웃음 내뱉었다.
말이 좋아 열 군데이지 숫자에 포함되지 않은 중소 헤지펀드의 숫자는 그보다 적어도 열 배는 많이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난 금융위기 때 헤지펀드들의 도미노 파산은 우스울 정도로 시장은 암흑기에 돌입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