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화 진정한 승리자
대한정유의 윤길영 회장과 방우열 부회장은 한진영과 인사를 나누고 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2차 전지 쪽이 꽤 선전한 덕분에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정유 쪽 타격이 심각합니다. 지난 분기와 이번 분기 적자가…….”
방우열 부회장은 잠시 윤길영 회장의 눈치를 살폈다.
이야기해도 괜찮으냐는 허락을 받기 위해서였다.
윤길영 회장은 방우열 부회장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왔는데 숨겨서 뭐하느냐는 듯한 모습의 윤길영 회장이었다.
방우열 부회장은 허락이 떨어지자 한진영을 바라보고 적자 폭을 이야기했다.
“지난 분기 1조 3천억, 이번 분기 2조의 적자가 예상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네를 좀 보자고 한 거네.”
마음이 조급해진 윤길영 회장은 한진영을 향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돈을 빌려달라거나 투자를 해달라고 하여 자네를 보자고 한 건 아니네. 지금의 이 위기를 어떻게 하면 타개할 수 있을지 물어보고 싶어 자네를 보자고 한 거네.”
진지한 표정의 윤길영 회장의 얼굴 뒤에는 초조함이 숨겨져 있었다.
상반기에만 적자가 3조가 넘는 상황이었다.
마이너스 40달러까지 찍어버린 유가의 상황에 공장을 돌리면 돌릴수록 적자를 보는 답답한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2차 전지 자회사가 유의미한 실적의 상승을 보여주기는 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미래를 위한 희망을 품게 하는 것일 뿐 현재를 나아지게 하지는 못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연간 적자 5조 원을 기록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한 대한정유였다.
윤길영 회장은 답답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회사의 존망이 걸려있는 상황이네.”
“확실히 상반기에만 누적적자 3조 5,000억이라면…… 회사의 미래를 걱정해야 할 정도이기는 합니다.”
한진영이 동의하는 말을 내놓자 윤길영 회장은 더욱 답답함을 담아 이야기했다.
“방법이 없네. 방법이 없어. 이미 정제마진은 마이너스인 상황이야. 공장을 돌리면 돌릴수록 손해를 보고 있는 거라는 말이네. 그렇다고 공장을 멈춰 세울 수도 없어.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는데 드는 돈과 시간 그리고 노력을 생각한다면…… 적자를 떠안은 채로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네.”
“지금 대부분의 회사가 그럴 겁니다.”
“그래. 어려운 건 우리만이 아닐 거야.”
한진영의 말에 윤길영도 동의했다.
대한정유만이 특별히 어려운 건 아니었다.
코로나19로 인한 침체가 현실이 되어 버렸기에 모든 곳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정유업계는 특별히 더 어려웠다.
바로 유가의 폭락 때문이었다.
“기름값이 떨어져 내릴 걸 왜 미리 이야기해주지 않았냐고 원망하지는 않겠네. 내가 그 정도로 염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니 말일세.”
한진영과의 인연을 생각한다면 한 번 정도는 미리 이야기해줄 수 있는 일 아니었냐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윤길영은 그런 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지난 일이 아니라 앞으로의 일이었다.
윤길영은 잠시 한진영을 똑바로 바라본 뒤 물었다.
“우리가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윤길영은 이야기를 돌리지 않고 바로 질문을 던졌다.
그만큼 어려웠고,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이다.
진지한 표정의 한진영의 얼굴이 윤길영 회장의 질문에 점점 밝게 변했다.
윤길영과 방우열은 한진영의 표정을 확인하고 조금은 마음속에 기대를 품을 수가 있게 됐다.
“방법이 있는 건가?”
“방법이라면…… 네. 있습니다.”
“그래? 그게 무언가?”
다급하게 질문을 던졌던 윤길영 회장은 급히 무언가를 떠올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맨입으로 알려달라고 하는 건 아니네.”
윤길영 회장은 방우열 부회장을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방우열 부회장은 옆에 놓인 서류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윤길영 회장은 그런 방우열 부회장의 모습을 바라보고 말했다.
“자네를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네. 만나는 것도 자네가 골라서 따로 연락할 정도라는 이야기를 들었네. 그것도 시간을 10분 이상 할애하지 않는다고 하지?”
한진영은 윤길영 회장의 말에 가만히 웃기만 했다.
윤길영 회장은 가방에서 꺼낸 서류를 건네받고 한진영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런 자네가 나를 위해 특별히 시간을 내어준 것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네. 그리고 우리의 위기를 해결할 방법을 알려준다면 무엇이 좋을까 많은 고민을 했다네. 그래서 준비했네.”
윤길영은 말을 마치고 앞에 놓인 서류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리고 한진영을 향해 서류를 밀어내고는 서류에서 손을 뗐다.
“돈이야 나보다 자네가 더 많으니 사례비를 줄 수 있는 노릇은 아니고…… 그렇다고 미국에 돌아갈 자네가 딱히 필요한 것도 없어 보이고…… 자네에게 가장 부족한 게 무얼까 생각하다가 떠올렸다네.”
한진영이 윤길영 회장의 말을 들으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윤길영 회장은 서류를 확인하는 한진영을 바라보고 천천히 서류 안에 담긴 내용을 설명했다.
“자네가 원유를 확보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자네가 기존에 원유 중개상을 하던 사람이 아니기에 확보한 원유를 처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걸세. 그걸 우리가 처리해 주겠네.”
“원유를 사주시겠다는 겁니까?”
“쉽게 말하자면 그런 이야기지.”
윤길영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대부분의 정유 회사는 원유를 확보하는 라인이 따로 있다네. 그리고 대부분 장기계약을 걸어 원유를 공급받지. 그래서 새로운 중개상이 끼어든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더더군다나 자네같이 중개상을 하는 사람이 아닌 경우에는 더더욱 중간에 끼어들 수가 없지. 그건 자네도 알지 않나?”
“네. 알고 있습니다.”
“5,000만 배럴이라고?”
윤길영의 말에 한진영은 편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희가 들고 있는 물량은 시장에 익히 알려진 대로 5,000만 배럴이 맞습니다.”
“그래. 전 세계에서 자네만큼 많은 물량을 들고 있는 개인은 없지. 기업으로 넓혀도 한 손가락으로 꼽힐 만큼의 물량이야.”
윤길영은 한진영 앞에 손을 들어 올리고는 계속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물량을 어떻게 처리하겠나? 사는 거야 싸게 샀다지만 처리하는 건 다른 문제이네. 그걸 우리가 해주겠네. 한번에 5,000만 배럴을 사지는 못하지만 매달 200만 배럴씩 물량을 소화하여 2년 안에 자네 물량을 처리하도록 해줌세. 어떤가? 이 정도면 자네에게 도움이 되겠나?”
한진영은 윤길영 회장의 말을 들으며 물끄러미 서류를 바라봤다.
윤길영 회장은 가타부타 아무런 말이 없는 한진영을 조용히 기다렸다.
어쨌든 자기가 생각하기에 한진영에게 이보다 더 좋은 제안은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서류를 다 확인한 뒤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종업원을 불러들여 음식을 내올 것을 주문했다.
윤길영과 방우열은 가만히 한진영이 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어쨌든 지금 대한정유는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카드를 제시한 뒤 한진영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이 들어오는 음식을 가만히 바라본 뒤 모든 음식이 들어오자 젓가락을 집어 들고 윤길영에게 음식을 권했다.
“드시지요.”
그러나 윤길영은 한진영을 따라 젓가락을 들지 못했다.
눈앞에 많은 음식이 늘어져 있지만 지금 윤길영의 눈에는 음식들이 보이지 않은 것이었다.
한진영은 젓가락을 들어 올린 채로 윤길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윤 회장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회장님의 생각과 달리 저는 제 물건을 팔아먹지 못할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시가보다 10달러 낮게 판다고 한다면 거래처가 뚫려있지 않더라도 서로 사겠다고 나설 테니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시가보다 10달러 낮게?”
윤길영은 방우열을 돌아봤다.
방우열도 한진영의 말을 듣고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시가보다 10달러 낮게 시장에 물건을 내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제안인지 방우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길영은 심하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그래. 시가보다 10달러 낮게 내놓는다면…… 확실히 메리트가 있기는 하지. 자네 같은 경우에는 이미 배에 물건이 실려 있는 상태라 물건을 바로 받아 볼 수 있기도 하고 말이야.”
“저희가 기름을 얼마에 받아왔는지 아마 들어 아실 겁니다.”
윤길영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로.
물건을 실을 때 드는 비용까지 내지 않은 순수하게 무일푼으로 원유를 확보한 한진영이었다.
“그러니 저희는 유가가 10달러 이상으로만 올라간다면 이득입니다. 물론 배와 창고의 임대료가 있기는 하지만…… 그 비용이라는 것이 전체 보유분 중 배럴당 1달러도 안 되는 금액이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요.”
“그래서…… 내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방법을 알려주지 않을 생각인가?”
“아닙니다.”
걱정이 담긴 질문을 던진 윤길영을 향해 한진영은 젓가락을 든 채로 단번에 손을 저었다.
“만약 그런 마음으로 왔다면 제가 이곳에 나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회장님께서 내놓으신 제안이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대한정유가 지금의 위기를 타개할 방법을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크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맙네.”
두 사람 사이에 커다란 탁자가 놓여있었지만, 윤길영은 한진영을 향해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고 말았다.
마치 손이 닿기만 한다면 손을 잡고 싶다는 마음이 그대로 행동에서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만큼 한진영에 대한 고마움이 컸던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앞으로 한진영이 대한정유를 위한 방법이라고 내놓는 것은 대한정유보다 세이지에게 더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유가가 폭락하고 정제마진이 마이너스에 돌입하며 정유사들이 큰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이런 위기는 대한정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세계 모든 정유사가 분기 손실을 조 단위로 쏟아내고 있었다.
회사의 운명이 마치 태풍 앞의 촛불처럼 느껴질 정도로 정유 회사들의 위기는 심각한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위기 뒤에 기회가 온다는 말이 있듯이 정유사들의 지금 위기는 뒤에 찾아올 기회를 생각한다면 감내할만한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나 견딜 수 있지 당사자는 당장에라도 회사가 망할 것 같은 공포에 휩싸이는 게 당연했다.
한진영은 이런 정유사들의 위기를 이용하여 큰 이익을 손에 넣으려 했다.
그래서 엑슨모빌의 지분을 획득한 것이었고, 이번에도 같은 방법으로 대한정유의 지분을 획득하려 했다.
위기 뒤에 기회가 왔을 때 그 파도에 올라타기 위해서였다.
윤길영은 한진영을 바라보고 타개책을 물었다.
“그래 위기를 극복할 방법이 무엇인가?”
윤길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한진영은 여전히 젓가락을 든 채로 윤길영과 방우열을 향해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엑슨모빌과 마찬가지로 저희가 백기사가 되어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세이지가 도와주겠다고?”
“엑슨모빌과 같은 방식으로 도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자사주를 넘기라는 말인가?”
“할인율 없이 시가로 적용하여 블록딜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규모는…… 10%로…… 어떻습니까?”
한진영의 말에 윤길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곁에 있는 방우열을 돌아봤다.
자칫 말 한마디에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입을 열기보다 방우열의 의견을 먼저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방우열도 윤길영이 보낸 시선의 의미를 눈치 채고 윤길영을 대신하여 한진영에게 말했다.
“사실 회장님께서는 지분투자를 받기 위해 한 회장님을 뵙자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만이라도 듣고 싶어 자리한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까?”
한진영은 결국 모든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나서야 밥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는지 들고 있던 젓가락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윤길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이렇게 하면 된다. 저렇게 하면 된다. 같은 식의 이야기보다 직접 현금을 들고 상황이 나아지길 기다리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편이 마음이 더 편할 테니 말입니다.”
“그렇기야 하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한진영은 윤길영이 무얼 걱정하는지 안다는 듯이 말했다.
“10%의 지분 중 5%는 의결권이 없는 우선주로 받겠습니다.”
“우선주로 받겠다고? 그게 정말인가?”
윤길영은 한진영의 말에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분가치에서 의결권이 가지는 중요성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의결권을 포기한다는 이야기는 정말로 회사의 미래만을 생각한 채로 투자하겠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회장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제가 세이지를 세우고 투자를 진행한 뒤로 기존 경영진과 마찰을 빚었던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기존 경영진에 힘을 보태주는 결정을 내렸었지요.”
“알고 있네. 그래서 세이지에 투자를 받으려고 줄을 서는 것 아니겠나?”
한진영은 은근한 표정으로 윤길영을 바라봤다.
“그리고 저희가 투자했다는 이야기가 시장에 돌게 되면…… 상황이 훨씬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때 가서 채권을 발행하시면…….”
“아~.”
윤길영은 한진영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리고 방우열을 돌아봤을 때 방우열 또한 같은 생각을 하는 것만 같았다.
세이지가 투자하고, 그 투자 소식을 시장에 알려 단숨에 채권을 발행한다.
세이지가 투자한 곳인 만큼 성장성은 담보되었으며, 세이지의 대규모 자금을 수혈한 만큼 안정성 또한 다른 곳보다 탁월했다.
이런 곳이 채권을 발행한다면 최고 등급을 받아 낮은 이율로 시장에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세이지가 투자하는 약 1조 5,000억의 자금과 시장에서 약 2조 원의 자금을 확보한다면 어렵기만 했던 지금의 상황을 무난하게 넘길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됐다.
윤길영과 방우열은 눈빛으로 동시에 한진영의 제안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한 회장에게 방법을 묻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먼.”
윤길영은 가볍게 웃으며 아직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서류를 바라보고 말했다.
“한 회장에게 방법만 물어보려 했던 건데 이렇게 도움을 받게 됐으니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구먼. 내가 생각해온 것이라고는 겨우 이런 서류 쪼가리 하나인데 말일세.”
한진영은 윤길영 회장을 따라 서류를 바라봤다.
“제가 대한정유를 좋게 생각하여 투자하는 겁니다. 보답이라면 대한정유가 빨리 이 위기를 타개하고 정상화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큰 행복일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높아진 지분가치로 때문에 큰 수익을 올리게 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정~ 보답을 하고 싶으시다면…….”
한진영은 서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말했다.
“저희와 원유 공급계약을 맺으시면 됩니다.”
“자네와? 어떻게 말인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물량을 털어내는 데 문제가 없다고 말했던 한진영이었다.
그런 한진영이 공급계약을 맺자고 하자 윤길영은 궁금하다는 얼굴로 서류와 한진영을 번갈아 바라봤다.
“기존 공급라인을 통해 원유를 받으시며 중간에 저희를 끼워 넣지 말고 저희와 정식 공급계약을 맺으시면 됩니다.”
“하지만 지금 공급처와 계약을 깰 수는 없네.”
“기존 공급처를 밀어내고 저희가 들어가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 공급처와 계약이 끝났을 때 새롭게 저희의 물량을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그리고 저희 물량이 끝이 나면 다시 기존 공급처에서 물량을 받으시면 되고요.”
한진영의 제안에 윤길영은 흥미를 느꼈다.
한진영의 방식대로라면 대한 정유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자네를 이용해서 기존 공급처와의 계약에 주도권을 가질 수도 있겠어. 안 그런가? 방 부회장?”
“네. 말씀대로입니다. 계약 갱신 때마다 시간이 없어 주도권을 잃고 끌려다녀야 했는데 세이지에서 물량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가질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순서대로 들어간다. 이건 저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한 회장님. 그렇게 되면 꽤 오랜 시간 기다리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기존 공급처와의 계약이 마무리되려면 10개월에서 1년은 기다리셔야 할 텐데 말입니다.”
윤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이 부분 때문에 한진영에게 순서대로 들어오라는 제안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괜찮습니다. 원유가 썩는 물건도 아니고…… 배 좀 더 띄워놓고 있으면 되지요.”
“정말…… 괜찮겠나?”
“괜찮습니다. 어차피 제 돈이 들어가지 않은 물건입니다. 가격할인 없이 확실하게 물건을 넘길 곳만 있다면 1년쯤 바다에 띄워놓은 채로 기다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좋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세. 방 부회장. 돌아가서 계약서 새로 작성하도록 하게.”
윤길영 회장이 모든 일이 깔끔하게 마무리된 것에 시원함을 느끼고 방우열에게 계약서를 넘겼다.
그리고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젓가락을 들어 한진영에게 음식을 권했다.
“미안하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음식값은 내가 내겠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하하하. 그래 그렇게 성의를 받아주니 내 마음이 다 좋네. 자자. 어서 들게나. 음식이 식겠어.”
윤길영 회장은 말을 마치고 음식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오늘 큰 수확을 얻었다고 생각해서인지 크게 입을 열어 음식을 집어넣었다.
한진영은 그 모습을 보고 자그맣게 웃었다.
오늘 제대로 큰 수확을 올린 것은 바로 자기였기 때문이다.
윤길영 회장이 기다릴 수 있겠느냐는 1년 뒤가 바로 유가가 100달러가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공짜로 엑슨모빌에서 얻은 원유를 100달러가 넘는 가격에 대한정유에 넘긴다.
한진영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고 가만히 젓가락을 놀려 음식을 입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