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6화 제안이 아니라 강탈이다
“벌써 시작하셨습니까?”
한진영이 대답하지 않았는데 또 다른 사람이 한진영과 가브리엘 파슨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제이든 파트너의 루크 패터슨 CEO입니다.”
곁에서 찾아온 이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말을 들은 한진영은 루크 패터슨을 향해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세이지의 한지영입니다.”
“누구인지 아네. 내가 누구인지도 자네 곁에 있는 친구가 알려준 것 같으니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도록 하겠네. 바로 이야기하지. 내가 원하는 것은 코인 그라운드의 지분이야.”
“뭘 원하신다고요?”
“시가에 10%를 더하도록 하지.”
한진영의 이야기는 듣지도 않는 것인지 자기 이야기만 하는 루크 패터슨이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자네가 보유하고 있는 철광석 광산 지분도 우리가 인수하고 싶네. 그리고 또 뭐가 있지? 그래. 테라. 테라도 넘기도록 하게. 테라는 많이 가지고 가지 못하니 1%만 우리가 가지고 가도록 하겠네.”
한진영은 가만히 루크 패터슨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좌측을 돌아봤다.
그곳에는 조금 전 루크 패터슨과 마찬가지로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한진영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짧은 인사를 건네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루크 패터슨과 가브리엘 파슨과 마찬가지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진영은 찾아온 사람들의 모든 이야기를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처음 한진영을 찾아온 가브리엘 파슨이 답답한 듯이 한진영을 향해 소리쳤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답을 해줘야 하지 않나?”
한진영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마치 빚 받으러 온 사람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가브리엘 파슨만이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한진영 주변에 모인 사람들 모두 같은 태도로 한진영을 몰아붙였다.
“니켈 광산 지분을 넘겨야 우리가 일할 수 있네. 언제 넘길 생각인가?”
“테라 지분 1%가 아닌 2%를 넘기도록 하게. 기준가는 시가 대비 90% 가격으로 우리가 넘겨받겠네.”
“채권을 비롯한 ETF 자산은 우리가 넘겨받도록 하겠네. 어디 어디 채권을 가지고 있는 건가? 혹시 국채 30년 물도 가지고 있나?”
한진영을 둘러싼 사람들의 언성이 점점 높아져만 갔다.
그들은 한진영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점점 더 격한 반응을 보였다.
“자자. 다들 이제 그만하시고…… 식사부터 하도록 하시죠.”
컨퍼런스의 호스트를 맡고 있는 앨런 스팬서가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다가와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오늘 첫날입니다. 첫날부터 과열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아직 논의해야 할 것도 많은데 벌써 이러면 일정을 모두 마칠 수 없습니다. 자자. 다들 자리로 돌아가시고…….”
앨런 스팬서가 사람들을 흩어놓았다.
이제 만찬을 포함한 첫날의 스케줄을 시작하려는 상황에서 한진영을 놓고 과열되는 분위기를 진정시키려 한 것이었다.
한진영을 찾았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건넸던 제안을 잘 생각해보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로 돌아갔다.
“제안이 맞는 겁니까?”
조지훈은 한진영을 둘러쌌던 사람들이 돌아가자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제가 듣기에는 강탈 같은데요?”
“강탈…… 맞아. 나도 그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한진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지훈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회장님. 어떻게 할까요? 여기 계속 있으면 더 안 좋은 상황이 펼쳐질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갈까?”
한진영이 조지훈에게 되물었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에 그러자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도착한 지 한나절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되짚어 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두고 보자. 저들이 도대체 왜 나한테 찾아와 맡겨놓은 물건 찾아가겠다는 듯이 그러는지 궁금하니 말이야. 그리고 뭐…… 적당한 가격을 제시하면 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야.”
“팔 생각이 있으시다고요?”
조지훈은 깜짝 놀란 듯이 물었다.
한진영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조지훈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적당한 가격을 준다면 당연히 팔아야지. 안 그렇습니까?”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조지훈 뒤로 찾아온 게리 챈슬러는 한진영의 말에 반가운 듯이 맞장구를 쳤다.
***
만찬이 시작되기 전 앨런 스팬서는 앞에 나가 컨퍼런스에 참석한 사람들을 향해 인사말을 이야기했다.
“이렇게 선밸리 컨퍼런스에 참가해주신 귀빈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희 앨런 앤 컴퍼니는…….”
짧게 인사를 마친 앨런 스팬서는 이어서 이번 컨퍼런스의 개최 의의를 설명하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려움에 빠진 경제를 다시 되살리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지 함께 모여 고민해보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으니 여러분께서는 컨퍼런스 기간 동안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존과 마찬가지로 거래 또한 자유롭게 이어가셔도 괜찮습니다. 이번 자리는 해결책만을 찾는 자리가 아니니까요. 그리고…….”
앨런 스팬서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한진영은 앨런 스팬서의 말을 들으며 게리 챈슬러를 돌아봤다.
이제는 아예 자기 곁에 자리를 잡아 버린 모습에 한진영은 물끄러미 게리 챈슬러를 바라본 것이었다.
“아직도 내 제안은 유효하네.”
게리 챈슬러는 한진영의 시선을 향해 넌지시 말했다.
한진영은 게리 챈슬러를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대답했다.
“제 생각도 아직은 변함없습니다.”
“기다릴 테니 언제라도 마음이 바뀌면 이야기하게나. 자네를 향한 문은 항상 열려있으니 말일세.”
게리 챈슬러의 말에 한진영은 얇게 미소 짓고는 다시 앨런 스팬서로 시선을 돌렸다.
앨런 스팬서는 마지막 말을 하고는 마이크 앞에서 물러났다.
사람들은 앨런 스팬서를 향해 힘차게 박수로 화답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온 음식을 먹으며 본격적으로 만찬을 즐겼다.
한진영도 나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점심에 이어 연달아 저녁까지 고기를 먹어서 그런지 더부룩한 속 때문에 한진영은 고기 몇 조각 먹지 않고 손을 놓았다.
“왜? 마음에 들지 않나?”
“아닙니다. 아직 배가 덜 고파서 그런지 이 정도만 먹어도 충분히 배가 부릅니다.”
아직 반이나 남아있는 한진영의 접시를 내려다본 게리 챈슬러는 손을 들어 대기하고 있던 종업원을 불렀다.
“준비한 것 가지고 오게.”
게리 챈슬러는 종업원에게 지시를 내리고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충분히 먹어두도록 해. 그래야 저 늙은이들을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게리 챈슬러는 말을 하고 반대쪽 테이블에 앉아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 노인들을 향해 턱짓했다.
한진영은 게리 챈슬러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채고 웃었다.
“확실히 저분들을 상대하려면 배가 든든하기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진영이 지금은 입맛이 없다고 말을 하려 할 때 조금 전 게리 챈슬러의 지시를 받고 자리를 떠났던 종업원이 돌아왔다.
그는 접시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치볶음밥을 들고 한진영 자리로 찾아온 것이었다.
한진영보다 한진영의 뒤에 서 있던 조지훈이 더욱 크게 놀랐다.
미국 선밸리 그것도 소수만을 모아 진행하는 컨퍼런스에서 한국에서나 볼법한 김치볶음밥을 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자네를 위해 특별히 준비했네. 한국 사람들은 입맛이 없을 때 이걸 먹는다며? 한국에서 먹던 것과 다른지 같은지 한번 맛보고 이야기해주게나.”
“이걸…… 저를 위해 준비하신 겁니까?”
한진영이 놀란 듯이 묻자 게리 챈슬러가 한진영을 빤히 바라보고 말했다.
“내가 자네를 위해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가만 알아주게.”
게리 챈슬러는 말을 마치고 이쪽을 슬금슬금 돌아보는 사람들을 훑어보고 말했다.
“그리고 저들에게서 자네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것도 기억하고…….”
“회장님…….”
한진영은 살짝 감동한 듯한 표정으로 게리 챈슬러를 바라봤다.
그리고 종업원이 건넨 수저를 들어 김치볶음밥을 크게 한입 먹었다.
“아~.”
짧은 감탄사를 내뱉은 한진영은 게리 챈슬러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정말 맛있습니다. 고향에서 먹던 맛 그대로입니다.”
“하하하. 다행이네. 한국에서 요리사를 직접 데리고 올 만했구먼.”
게리 챈슬러가 말을 하고 한쪽을 가리키자 그곳에는 요리사 복장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한진영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진영은 직접 한국에서 요리사까지 데리고 와서 음식을 내놓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게리 챈슬러가 한진영을 향해 공을 들이고 있다는 것이 말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컨퍼런스 기간 동안 편하게 먹고 싶은 걸 이야기하도록 하게나. 자네 음식은 저기 있는 저 요리사가 책임질 테니까 말이야.”
한진영은 게리 챈슬러를 향해 감동한 듯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한진영의 가슴속은 차갑기만 했다.
‘이 노인네가 쉽게 놓아주지 않겠어.’
공을 들이면 들일수록 더 큰 걸 받아내길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한진영이었다.
한진영은 맛있게 볶아진 김치볶음밥에 일반 조미료뿐만 아니라 빚까지 함께 볶아져 한진영 앞에 나왔음을 깨달았다.
한진영은 그래도 모르는 척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몰랐으면 당했겠지만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당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식사가 대충 마무리되자 술이 나와 분위기를 띄웠다.
모두 자리에서 앉아 먹던 것에서 이제는 술잔을 들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이야기하는 것으로 자리가 바뀌어 갔다.
“한 회장의 투자를 인상 깊게 보고 있었습니다.”
AMO 캐피털 마켓의 알렉산더 베일리 최고책임자가 한진영을 향해 제일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시장을 바라보는 안목부터 과감한 투자 결정과 포지션을 끌어가는 힘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과분한 칭찬입니다.”
“아닙니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세이지의 한 회장님은 경이롭다는 표현도 모자랄 정도로 엄청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계시는 것이 그것이 허황한 빈 껍질이 아니라는 증거이고요.”
한진영은 베일리 최고책임자의 말에 가만히 웃기만 했다.
알렉산더 베일리는 한동안 계속 한진영을 찬양하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한진영의 과감한 결정과 그걸 대중 앞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배포를 칭찬하며 한진영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그렇게 칭찬이 이어지고 난 뒤 본격적으로 베일리 최고책임자는 한진영의 곁에 찾아온 이유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세이지가 보유하고 있는 조로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관심이 너무 많아 인수하고 싶을 지경입니다.”
“인수요?”
한진영이 모르는 척 이야기하자 알렉산더 베일리는 바로 한진영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했다.
“300억 달러에 조로를 인수하고 싶습니다.”
“300억 달러…….”
알렉산더 베일리는 한진영의 표정을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300억 달러라면 조로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한 금액이라고 생각합니다.”
“300억 달러…….”
한진영이 계속 300억 달러라는 말만 되뇌자 알렉산더 베일리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한진영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이렇게 하시죠.”
잠시 말을 멈춘 알렉산더 베일리는 곁에 앉아있는 게리 챈슬러의 눈치를 살핀 뒤 한진영을 향해 제안을 내놓았다.
“300억 달러 현금 지급. 분할이나 지분 스왑 같은 지저분한 것을 통하지 않고 바로 현금을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알렉산더 베일리의 제안에 한진영은 가만히 웃기만 했다.
알렉산더 베일리는 가타부타 대답이 없는 한진영의 모습에 웃고 있던 표정을 점점 굳혔다.
“거 뭐라고 좀 이야기하십시오. 좋다는 겁니까? 싫다는 겁니까?”
알렉산더 베일리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한진영의 주변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엑슨모빌 이야기는 시작하지 않았나? 엑슨모빌 지분은 내 거야. 건드리지 마. 150억 달러에 내가 인수할 테니까 모두 건드릴 생각하지 마.”
카스티요 그룹의 제이든 카스티요가 마치 다른 사람이 자기 것을 채가기라도 할까 봐 빠르게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맡겨 놓은 것을 달라는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엑슨모빌. 엑슨모빌은 내 거야. 어서…… 어서 내놓게.”
잔뜩 주름진 카스티요 손이 한진영을 향해 내밀어지자 조지훈이 급히 카스티요와 한진영의 사이를 막았다.
카스티요의 수행원도 조지훈이 혹시 카스티요에게 손을 쓰기라도 할까 걱정되었는지 카스티요의 앞을 막아섰다.
조지훈과 카스티요의 수행원이 앞에 나서자 다른 곳의 수행원들도 자기가 모신 사람을 신경 쓰느라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만찬이 벌어지는 파티장 가운데 자리한 한진영 주위로 삽시간에 혼란이 퍼져나간 것이었다.
잠시 소란을 지켜보던 게리 챈슬러가 손짓하자 블랙문의 직원들이 소란을 진정시켰다.
게리 챈슬러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가볍게 이야기했다.
“이제 시작인데 다들 왜 이러십니까? 다들 진정하시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시죠. 미스터 한도 잠시 나가서 바람이나 쐬고 오는 게 어떻겠나?”
“바람이요?”
소란과 달리 차분하기만 한 한진영은 나갔다가 오라는 게리 챈슬러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는 편이 좋겠군요.”
꽤 순순히 바람을 쐬고 오겠다는 한진영의 모습에 게리 챈슬러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한진영을 향해 낮은 목소리를 건넸다.
“내 제안은 여전히 유효하네.”
한진영은 게리 챈슬러의 말에 슬쩍 그를 돌아보고는 만찬이 열리는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회장님.”
조지훈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들이 나온 곳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사람들이 도대체 왜들 저러는 것인지……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대충 알 거 같다.”
“네? 아시겠다고요?”
“그래.”
한진영은 리조트에서 나와 이제는 어둑해진 모습을 보이고 있는 초원을 바라보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깊게 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았으니 거기에 맞춰서 움직여 줘야지. 조 실장은 본사에 연락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큰 덩어리 물건 좀 확인해봐.”
“큰 덩어리 물건이요?”
한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배고프다고 덤벼드는 놈들에게는 먹잇감을 던져줘야지. 기왕이면 백신이나 진단 쪽 지분들 위주로 정리해 오도록 해. 그렇다고 살코기를 던져줄 수는 없으니까.”
조지훈은 한진영의 모습에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가 바뀌어 버렸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