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4화 자존심을 지울 만큼의 돈을 준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조지훈이 한진영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무 큰 당근을 제시한 것 아닌가요?”
조지훈의 질문에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한진영은 고개를 돌려 조지훈을 바라봤다.
조지훈은 한진영이 자기에게 시선을 보내자 생각했던 것을 계속 이야기했다.
“세이지 인베스트먼트야 명분이 있다지만 자산운용은 그렇지 않습니까?”
“명분? 무슨 명분?”
한진영의 질문에 조지훈은 정말 몰라서 묻느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상장 말입니다.”
“아~ 그 명분?”
조지훈의 대답을 들은 한진영이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말했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태도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회장님. 상장이 작은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작은 일은 아니지.”
“그런 명분이 있어야 인센티브가 나가는 것 아닙니까?”
조지훈은 너무나 이상하다는 말투로 계속 이야기했다.
“한두 푼도 아니고 순이익의 5%라니요? 회장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지난 상반기 정도의 수익만 올려도 나가는 돈이 수십억 달러입니다. 자산운용의 전체 직원이 3,000명 안팎에 임원급들까지 생각한다면 한 사람당 받는 돈이 못해도 수십만 달러에 달하는 일입니다. 그런 인센티브를 상장하지도 않았는데도 주겠다는 것은……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한진영은 열불을 통해내며 이야기한 조지훈을 가만히 바라보고 웃었다.
“자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겠다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열을 내는 거야?”
“회사 돈이면 제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확실히 자네는 주인의식이 가득해.”
한진영은 잘했다는 뜻으로 조지훈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리고 다시 물끄러미 조지훈을 바라보고 말했다.
“내가 주인의식이 어디에서 나온다고 했지?”
“돈…… 회장님. 제가 돈을 많이 받는 것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닙니다.”
“그래. 돈을 많이 받는 것만으로는 이러지 않겠지. 하지만 이유는 될 수 있어.”
한진영이 빤히 바라보자 조지훈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한진영의 말대로 그것만으로 이유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복합적인 여러 이유 중의 하나는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아무런 말이 없어진 조지훈을 한동안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십만 달러 정도로 그들에게서 주인의식을 얻어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남는 장사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수십억 달러가 쓰이는 일인데요?”
“조 실장. 조금 더 생각을 넓게 가지도록 해.”
한진영은 양손을 뻗어 넓게 벌리고 말했다.
“쓰인 돈이 수십억 달러지만 벌어들이는 돈이 수백억 달러가 늘어나게 된다면 어떻겠어? 이래도 손해처럼 느껴져?”
“수백억 달러를 더 벌 수 있다고요?”
“그래. 최소 수백억 달러…… 운이 조금 더 따른다면 그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을 거야.”
한진영은 조지훈의 말에 빙긋이 웃고는 창밖을 바라봤다.
“이미 답안지를 들고 시장에 대응하려는 우리야. 그렇다면 답안지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어 줄 필요가 있지 않겠어?”
수백억 달러를 더 벌 수 있다는 말부터 시작해서 답안지를 들고 있다는 말까지 한진영의 말 하나하나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한진영은 놀라서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조지훈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지금 나스닥 지수가 얼마야?”
조지훈은 갑작스러운 나스닥 지수를 물어보는 한진영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나오기 전 확인했던 것을 떠올리고 대답했다.
“오늘 종가 기준 10,131을 기록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10,131…… 10,000선을 돌파한 뒤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상황이지.”
“네. 맞습니다. 10,000선 돌파 뒤에 하루 이틀 급락이 나오기도 했지만 바로 회복하며 10,000선에 대한 지지력을 높이고 있습니다.”
한진영은 조지훈을 향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겠다는 듯이 몸을 돌려 앉았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래. 자네 말대로 10,000선에 대한 지지력을 확인한 뒤 시장은 어떻게 될까?”
“혹시…… 상승하나요?”
우물쭈물 대답한 조지훈의 모습에 한진영은 재미있다는 듯이 조지훈의 가슴을 손등으로 두드렸다.
“며칠이나 됐다고 선밸리에서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는 거야? 그렇게 여자친구랑 노는 게 재미있어?”
“13,000까지…… 아~.”
“그래. 이미 답은 나와 있는 상황이야. 그리고 그 답안지를 들고 갈 곳 또한 알고 있어.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지만, 자산운용의 다른 직원들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텐가?”
한진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무언가 깨달은 표정을 짓고 있는 조지훈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물론 전략분석실의 분석을 이유로 들어 그들에게 우리가 갈 곳을 가르쳐 주기는 할 거야. 전략분석실의 분석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 놓은 상황이기 때문에 의심하는 마음도 줄어든 상태니까. 우리가 인도하는 방향을 따라 잘 따라올 거야. 하지만 내가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등을 보고 따라가는 데 신이 날까?”
“신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
한진영은 말 잘했다는 듯이 조지훈을 보고 웃었다.
“신나지 않지. 특히 자존심 강한 그들로서는 더더욱 남의 등을 보고 쫓아가는 일은 탐탁지 않은 일일 테고…….”
“그래서 동기부여를 위해 파격적인 인센티브 정책을 내놓으신 거군요.”
“그래. 남의 등을 뒤쫓아 가도 될만한 이유를 만들어 준거지. 자존심을 지우고도 남을 돈을 준다면 열심히 뒤를 쫓아 올 테니까.”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은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로 회장님의 마음을 흩트려놓은 것 같습니다. 회장님이 하시는 일에 의심해서는 안 됐었는데…….”
“됐어. 그렇게 자책할 필요 없어. 내가 무슨 사이비 교주라도 돼? 내 말에 의심도 품어서는 안 된다니…… 나는 자네에게 돈을 주고 일을 시키는 고용주일 뿐이야.”
한진영은 가볍게 별일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했다.
“오히려 자네가 그렇게 주의를 주는 게 나에게는 도움이 돼. 무조건 내 의견을 따르기보다 나에게 지금 하는 일이 잘하는 일인지 계속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편이 나를 위하는 일이야. 자네에게 이야기하면서 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으니까.”
별것 아닌 말이었지만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에 감동했다.
괜찮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오너 같은 경우에는 아주 사소한 거라도 의심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지훈은 자기 말에 귀 기울여주고 자세히 설명해주며 오히려 이런 의심이 자극되어 도움이 된다는 말을 하는 한진영을 향해 존경심이 일어났다.
따르릉.
한진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조지훈의 휴대폰이 울렸다.
조지훈은 한진영을 향해 죄송하다는 말을 건네고 조심스럽게 몸을 비껴 앉아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다 받은 조지훈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로 한진영에게 말했다.
“회장님.”
한진영은 가만히 조지훈의 표정을 살피고는 말했다.
“게리 챈슬러 회장이 나를 찾는다는 전화야?”
“어떻게 아셨습니까?”
조지훈은 말하지 않아도 아는 한진영의 모습에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알기는? 자네 표정이 이야기해주고 있으니까 알지.”
“제 표정이요?”
“앞으로 조 실장은 여자친구한테 거짓말할 생각일랑 하지도 마. 얼굴에 그렇게 다 써놓고 다니는데 제대로 거짓말이나 할 수 있겠어?”
“그 정도입니까?”
조지훈이 정말로 얼굴에 글자가 쓰여 있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냈다.
한진영은 가볍게 웃고는 차를 돌려 블랙문으로 향하게 지시했다.
“이제 슬슬 얼굴 보는 것도 익숙해졌는데 친숙함 단계가 한 단계 더 높아지지 않았나? 그랬으면 좋겠는데…….”
선밸리 컨퍼런스 이후 생각보다 자주 만나는 게리 챈슬러와의 만남을 통해 한진영은 조금 더 사이가 가까워졌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 더 가까운 거리에서 게리 챈슬러에게 일격을 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을 태운 차가 익숙한 거리를 지나 블랙문으로 향했다.
***
지난번과 달리 블랙문에 도착한 한진영을 반기는 사람은 없었다.
하다못해 블랙문의 건물 앞을 지키는 보안요원조차 도착한 한진영의 차를 흘끔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와야 할 사람이 왔다는 것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었다.
“이제는 뭐 거의 블랙문의 직원처럼 대하네.”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도 동감했다.
로비 안으로 들어갔을 때 한진영을 향해 어떻게 왔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보안요원이 게이트를 잡아줘 편하게 들어오도록 조치했다.
몸수색을 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으며 한진영을 향해 살짝 고개 인사를 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로 한진영을 대하는 분위기가 편하기만 한 블랙문의 직원들이었다.
한진영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게리 챈슬러 회장의 사무실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어서 오십시오. 내려가서 오시는 걸 반겼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먼저 와 계신 분께서 계셔서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먼저 와 계신 분이 있으시다고요?”
“네.”
제이슨 서튼 명예회장 비서는 누가 와 있는지 이야기하려다 말고 열리는 사무실 문을 바라보고 말했다.
“마침 나오시는군요.”
한진영은 제이슨 서튼의 반응을 보고 자기가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열리는 사무실 문을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릭 앤더슨 블랙문 최고투자책임자와 코인 그라운드의 타일러 버드가 나오고 있었다.
“어이구. 한 회장님.”
타일러 버드가 한진영을 발견하고 급히 달려왔다.
그리고 한진영의 손을 잡아채듯이 양손으로 붙잡고 살갑게 인사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네. 저야 잘 지냈습니다.”
“상장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단숨에 대부호에 오르셨습니다.”
“하하하. 대부호라니요? 상장했다고 하지만 제가 보유하고 있는 세이지 인베스트먼트의 지분은 없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코인 그라운드의 지분을 직접 보유하고 있는 버드 CEO님이 저보다 더 부자지요.”
“에이. 왜 이러십니까? 개인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주식들만 해도 수백억 달러는 넘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테라하고 대한민국의 2차전지 관련주를 직접 보유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하하.”
한진영은 타일러 버드의 말에 가볍게 웃었다.
긍정하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웃음만으로도 한진영이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진영은 웃는 것을 멈추고 릭 앤더슨과 타일러 버드를 한차례 돌아보고는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챈슬러 회장님을 뵈러 오신 겁니까?”
“네. 그게…….”
챈슬러의 사무실을 나올 때만 해도 살짝 상기된 표정을 하고 있던 타일러 버드였다.
그러나 한진영의 질문에 급히 얼굴을 굳히고 대답을 얼버무렸다.
“어…… 그저…… 회장님께서 부르셔서…… 그래서 왔습니다.”
한진영은 타일러 버드의 표정만으로 그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하고 못한 일을 진행하고 싶어서 온 거구나.’
최근 코인의 상승세가 심상치가 않았다.
유동성 확장에 대한 효과를 확실하게 받는 업종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다른 곳보다 상승폭이 큰 상황이었다.
코인 그라운드는 이런 분위기에 지난날 하지 못했던 일을 하려 했다.
게다가 지금은 한진영이라는 방지 턱까지 사라진 마당이었다.
타일러 버드는 이 상황을 적절히 이용하려 했고 그 일 때문에 바로 오늘 이곳에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나타난 한진영이 왜 이곳에 왔느냐고 묻자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지고 만 것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타일러 버드의 모습에 가볍게 웃고는 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음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테니 이만 들어가 봐야 해서요.”
한진영의 인사에 굳어있던 타일러 버드의 표정이 환하게 풀렸다.
“네. 네. 제가 연락드리고 한번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만나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타일러 버드가 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라며 자리까지 비켜주고, 손으로 게리 챈슬러의 사무실을 가리켰다.
한진영은 타일러 버드를 향해 고개 인사를 건네고 게리 챈슬러의 사무실로 향했다.
“재미있네.”
한진영은 판을 깔아주기만 하였는데 알아서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타일러 버드의 모습에 웃음기를 머금고 게리 챈슬러 사무실로 들어갔다.
“어서 오게.”
“찾으셨다고요?”
“그래. 우선 축하한다는 말부터 해야겠지? 성공적인 상장이었어. 이대로 가면 70달러, 80달러도 문제가 안 될 것 같아.”
게리 챈슬러는 한진영의 손을 잡은 채로 오늘 있었던 세이지 인베스트먼트의 상장 이야기부터 건넸다.
한진영은 게리 챈슬러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가며 고개를 저었다.
“80달러까지야 가겠습니까? 80달러면 공모가의 2배인데 말입니다.”
“JM모건 놈들이 바보 같은 짓을 하는 바람에 가능하게 됐어. 40달러가 뭔가? 40달러가…… 내가 진작 알았다면 JM모건 애들에게 이야기해서 가격 책정부터 다시 하라고 했을 거야. 무슨 아마추어도 아니고…….”
게리 챈슬러는 한진영에게 직접 의자까지 빼줬다.
그리고 자리에 앉는 것까지 확인한 뒤 한진영의 맞은편에 앉으며 이야기했다.
“아직도 뉴욕은 경직된 사회야. 내가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하고 다르지가 않아. 인종차별도 심하고 새로 진입하는 신규회사에는 차가울 정도로 모질기만 하지.”
“뭐 그래도 결국 회장님 덕분에 저도 주류에 편입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말일세.”
게리 챈슬러는 한진영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그걸 조금 더 일찍 해야 했어. 그래야 이런 말도 안 되는 불합리한 일을 당하지를 않지. 시가총액 800억 달러는 도대체 어떤 놈 머리에서 나온 숫자야?”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게리 챈슬러는 화부터 냈다.
“걱정하지 말게. 이제부터 자네한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게리 챈슬러가 마치 자기가 모든 것을 감당해주겠다는 듯이 한진영에게 큰소리쳤다.
한진영은 그런 게리 챈슬러를 향해 양손을 들어 휘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덕분에 상장하자마자 큰 폭의 상승이 나오지도 않았습니까? 그 덕분에 화제가 되기도 했고요. 상장 첫날 음봉이 나온 것보다는 이편이 저는 더 마음에 듭니다.”
“하여튼 자네는 사람이 참 물러. 그렇게 물러서야 어디 이 바닥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겠나?”
게리 챈슬러는 혀를 차며 말했다.
“쯧. 그러니 내가 도와줘야지.”
게리 챈슬러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는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SEC에서 세이지를 조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네. 내가 그걸 중단시켜주도록 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