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5화 적대감이 아니라 복수다
게리 챈슬러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한진영을 바라보고 마치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놀랐지?”
“네. 뭐…… 놀랍기는 합니다.”
“그래. 놀랄만한 일이기는 하지.”
게리 챈슬러는 마치 큰 은혜라도 내린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나도 SEC에 압력을 가하는 일은 쉽게 내리기 어려운 결정이야. 게다가 그게 블랙문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곳을 위해서라면 하기 더 어려운 일이지.”
“그런데 저를 위해서 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자네를 위해서 할 생각이네.”
한진영은 어서 고맙다는 말을 하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게리 챈슬러를 향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서 그러시는지 이유를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이유가 궁금한가?”
“네.”
한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운 마음보다 그게 먼저인 게 사실입니다. 회장님께서 저를 위해…… 아무리 저와 친분이 있다고 하지만 회장님 말씀대로 SEC와 같이 정부기관에 압력을 행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니라 저희와 마찬가지로 SEC의 감시하에 있는 기업이…… 오히려 SEC에 압력을…….”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한진영의 말에 가만히 미소 지은 게리 챈슬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진영의 자리로 다가가 한진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조금 전 사무실에서 나간 코인 그라운드의 버드 CEO를 봤겠지?”
“네. 이곳에 오기 전에 잠시 만나 인사를 나눴습니다.”
“그 친구가 아주 기가 막힌 제안을 해오더구먼.”
“제안이요?”
한진영은 앉아있는 자세를 바꿔 게리 챈슬러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전혀 몰랐다는 얼굴로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물었다.
“설마 스테이블 코인 이야기를 한 겁니까?”
“그래. 자네한테도 제안했다면서?”
“네. 했습니다.”
한진영은 빠르게 대답하고는 게리 챈슬러를 향해 양손을 들어 올린 채 말했다.
“회장님. 하셔서는 안 됩니다.”
“해서는 안 된다고?”
“네.”
한진영은 게리 챈슬러를 필사적으로 설득했다.
“매우 그럴 듯해 보이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노출된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게리 챈슬러의 얼굴에는 미소가 점점 짙어지며 한진영을 향해 궁금하다는 듯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노출된 치명적인 약점이 무엇인가?”
“알고리즘으로 코인의 가격을 맞춘다는 것인데…… 기준으로 잡은 코인이 무너지게 되면 함께 무너지는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달러처럼 중앙은행이 유통량을 틀어쥐고 조절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기준 코인의 가격이 내려가면 신규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하여 그것으로 기준 코인의 가격을 맞추고, 반대로 스테이블 코인 가격이 흔들리면 기준 코인을 팔아 스테이블 코인을 안정시킨다는 건데…… 말이 좋아 알고리즘으로 코인의 안정을 꾀한다는 거지 결국 윗돌을 빼서 아랫돌에 괴는 형식 아닙니까?”
한진영은 말에 게리 챈슬러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윗돌을 빼서 아랫돌에 괸다고? 재미있는 표현이군 그래. 자네 나라에서 쓰는 말인가?”
“아시아에서 자주 쓰는 표현입니다.”
“윗돌을 빼서 아랫돌에 괸다. 재미있는 표현이야. 나도 써먹어야겠어.”
게리 챈슬러는 한진영이 한 말을 몇 차례나 따라 하고는 한진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게 놀라지 말게. 나도 그건 곤란하다고 이야기했어.”
“곤란하다고 하셨다고요?”
“그래. 그건 좀 생각해보자는 말을 했지. 자네 말대로 그 방식은 굉장히 위험한 방법이니까.”
한진영은 게리 챈슬러의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게리 챈슬러는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나를 생각해 주는 게 남다르구먼.”
“회장님과 블랙문이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생소한 분야에 뛰어들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매우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우리가 굳이 그걸 건드릴 이유가 없지.”
게리 챈슬러는 한진영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아쉬운지 무의식적으로 몇 차례 입맛을 다시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게리 챈슬러의 모습에 한진영이 눈을 반짝였다.
한진영의 생각대로 게리 챈슬러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접어두기로 했네. 대신 다른 걸 하기로 했지.”
“다른 것이요?”
게리 챈슬러가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코인 대출사업을 하기로 했다네.”
“코인…… 대출사업이라니…… 그게 무엇입니까?”
한진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잘 이해하지 못하는 한진영의 모습에 게리 챈슬러는 오히려 재미를 느꼈는지 더욱 짙게 웃으며 한진영에게 설명했다.
“코인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대출 사업이지. 흥미로운 분야야. 기존 금융권이 전혀 손을 대고 있지 않은 분야지만 수요는 상당한 곳이지. 코인 그라운드이기에 생각할 수 있고, 코인 그라운드라서 할 수 있는 사업이라고 생각한다네.”
게리 챈슬러의 말에 한진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블랙문이 말입니까? 대출 사업을 한다고요?”
“맞아. 우리가 할 생각이네.”
게리 챈슬러는 한진영 어깨에 올려놓은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안을 서성이며 말했다.
“오랜만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어.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분야에 금맥이 형성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젊은 시절의 뜨거운 피가 가슴을 요동치게 하고 있네.”
게리 챈슬러는 감회가 새로운 얼굴로 사무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식물들을 바라봤다.
남미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는 식물들이 이제는 게리 챈슬러의 눈에 거슬리게 보이는 것만 같은 시선이었다.
“일선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사무실이나 꾸미며 지내는 생활을 이제 그만 둘 생각이네.”
“현역에 복귀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자네 덕분에 내가 현역에 뛰어들 마음이 생겼어.”
“제 덕분에요?”
한진영이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가슴에 손바닥을 대자 게리 챈슬러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렇게 놀라지 말게. 자네가 코인 그라운드의 타일러 버드 CEO를 소개해주지 않았나? 그러니 자네 덕분이지.”
“엄밀히 말하면…… 회장님이 코인 그라운드의 지분을 팔라고 하셔서 판 건데…….”
왜 자기가 소개해준 거냐는 어수룩한 한진영의 표정에 게리 챈슬러는 더욱 한진영을 마음에 들어 했다.
“뭐가 됐건 내가 자네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게 중요하지 않나? 그리고 그 이유로 SEC 문제를 해결해 줄 테니 자네에겐 더 잘 된 일이고 말이야.”
강요에 가까운 게리 챈슬러의 말에 한진영은 더는 다른 소리를 하지 못했다.
그저 감사하다는 말 외에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한진영은 게리 챈슬러의 사무실에서 나올 때까지 계속 감사하다는 말을 건넸다.
게리 챈슬러가 그 말을 듣고 싶어하는 것에 한진영은 게리 챈슬러가 만족할 때까지 계속 감사하다는 말을 건넨 것이었다.
게리 챈슬러는 한진영이 감사하다는 말을 쏟아내자 더욱 한진영을 마음에 들어 했다.
보통 한진영쯤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남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블랙문의 게리 챈슬러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조지훈은 게리 챈슬러의 사무실에서 나오는 한진영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한진영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게리 챈슬러 회장이 왜 회장님을 부른 거라고 하던가요?”
“SEC에서 조사하는 것을 자기가 막아준다고 하더군.”
사무실에서 나올 때부터 웃고 있는 얼굴의 한진영 모습에 특별한 일이 있을 줄 알았던 조지훈은 특별할 것이 없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블랙문이 도와주지 않아도 되는 해결될 문제 아니었습니까? 회장님 계획에 따르면 상장 때문에 사이즈가 커진 것을 부담스러워한 SEC가 자연스럽게 발을 빼면서 말입니다.”
“흐흐흐. 그렇지. 그런데도 챈슬러 회장은 생색을 내고 싶었던지 나를 불러 자기가 해결해준다고 하더군.”
한진영은 사무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조지훈에게 이야기했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은 뒤 더욱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진영에게 물었다.
“정말 코인 발행에 관심을 두고 있는 챈슬러 회장을 만류하신 겁니까?”
조지훈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굳이 그러실 필요가 있으셨습니까? 코인을 발행해서 자금을 유치하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라고 등 떠미셔야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말리셨다니요?”
조지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조지훈을 조금 더 자기 쪽으로 가깝게 끌어당기고는 말했다.
“그가 나를 부른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어?”
“네?”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SEC의 조사를 무마해주기 위해 한진영을 부른 것 외에 다른 게 뭐가 또 있느냐는 눈빛이었다.
한진영은 조지훈을 더욱 가깝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조지훈만 들을 수 있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시험하기 위해 부른 거야.”
“시…….”
조지훈은 급히 말을 하려던 입을 손으로 막았다.
혹시 몰라 한국말로 대화를 하고 있지만, 이것조차도 어디의 누군가가 대화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한진영은 조지훈의 모습에 가볍게 웃고는 멈춰선 차에 올라탔다.
조지훈은 급히 한진영을 따라 차에 올라탄 후 조금 전 하지 못한 말을 한진영에게 물었다.
“시험이라니요?”
“떠본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한진영은 운전기사에게 출발할 것을 지시하고 조지훈에게 말했다.
“내가 일관성 있는 태도를 보이는지 아닌지를 확인해보고 싶어 나를 부른 거야.”
“코인 발행에 관해서 말입니까?”
“그것뿐만이 아니야. 코인에 관한 모든 내 생각을 확인해보고 싶었을 거야.”
“왜 챈슬러 회장이 회장님의 생각을 확인해보고 싶어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이미 코인 그라운드는 블랙문의 품에 들어간 회사인데 말입니다.”
조지훈은 이야기하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설마 그래서 코인 발행을 말리신 겁니까? 챈슬러 회장에게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해서요?”
“그것도 있지. 내가 진심으로 챈슬러 회장을 대하는지 확인하고 싶어 던진 질문이니까. 그리고 코인에 대한 내 시각을 확인함으로써 나와 경쟁 관계에 서지 않는다는 확인도 겸사겸사 알아보기 위함이었지. 그걸 알고서 나는 챈슬러 회장에게 경쟁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꾸준히 심어주기 위해 말렸던 거야. 하지만 그것보다 내가 코인 발행을 말린 진짜 이유는 따로 있어.”
“진짜 이유요?”
“그래.”
한진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조지훈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코인 발행이라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머리에 깊이 각인시키기 위해서 말린 거야.”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은 눈만 끔벅거렸다.
한진영의 말이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만 끔벅인다고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조지훈은 궁금한 것을 입을 열어 직접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머리에 각인시키기 위해서 그런 거라니…… 저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머리에 각인시킨다고 뭐가 달라지는 겁니까?”
“많이 달라지지.”
한진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코인 발행을 하게 되면 블랙문의 여러 사업 중의 하나라는 위치밖에 차지하지 못해. 지금은 넉넉한 상황이니까. 하지만 정말 돈이 급하게 필요하게 될 때는 어떨까?”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은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천하에 블랙문이 돈이 급하게 필요하게 된 때가 생긴다는 말이 너무나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진영은 마치 미래를 알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여전히 단호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코인 발행만큼 쉽고 빠르게 돈을 만드는 방법이 없어. 그것도 원하는 만큼 마음대로 찍어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 그런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머릿속에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땐 필사적으로 그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어. 귀찮게 가지고 있는 물량을 정리하는 것보다 쉽게 발행해서 사람들에게 팔아먹어 돈을 마련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지.”
“발행해도 사주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 아닙니까? 무슨 물건도 아니고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한 걸 사람들이…….”
사주겠냐는 말을 하려던 조지훈은 말끝을 흐렸다.
코인 그라운드가 바로 그 데이터 쪼가리를 가지고 사업을 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지훈이 말하는 데이터 쪼가리가 하루 거래대금 수십억 달러를 가볍게 넘어가고 있었다.
코인 그라운드의 회사 가치도 1,000억 달러를 넘어선지 오래였다.
물건도 아닌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하다고 말하기에는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가치가 엄청난 수준까지 올라선 상태였다.
조지훈의 얼굴을 바라본 한진영의 입가에는 미소가 짙어졌다.
“그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한 것을 발행한 곳이 블랙문과 코인 그라운드가 되면 어떨까? 어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곳에 수억, 수십억 달러가 오가는 지금 상황에 블랙문과 코인 그라운드가 보장하는 코인이 나온다면 어떻게 되겠어?”
“수요가 그곳으로 엄청나게 몰려들겠네요.”
“그래. 그러니 찍으면 찍어내는 대로 팔려나가게 될 거야.”
한진영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마치 본 것처럼 계속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렇게 찍어내는 대로 팔려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블랙문 특히 게리 챈슬러는 무슨 생각을 할까? 마치 자기가 중앙은행이 된 기분이 들지 않을까? 발권력을 손에 움켜쥐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겠어?”
“확실히…… 발권력을 손에 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기는 할 것 같습니다.”
“같은 게 아니라 그렇게 느낄 거야. 코인 담보대출 회사까지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 느낌이 더 강해질 테고…….”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은 점점 더 무서운 느낌을 받았다.
블랙문이라는 거대한 투자회사를 가진 존재가 발권력과 같은 힘을 손에 쥐고 담보대출 회사를 차렸다.
미국 연준이 하려는 일을 하겠다고 나설 만큼 강대한 힘이 게리 챈슬러의 손에 쥐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진영은 스테이블 코인의 발행을 반대했다.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해야 확실하게 힘에 취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늘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려 하는구나.’
어떤 이유 때문인지 확실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한진영이 게리 챈슬러와 블랙문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조지훈이었다.
적대감이 단순히 경쟁상대 혹은 자기를 해치려 하는 것에 대한 방어본능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적대감이 아니라 복수 같은데?’
조지훈은 힘에 취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을 것 같은 블랙문과 게리 챈슬러를 생각하며 즐거워하는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간 뒤 끝없는 무저갱까지 떨어져 내릴 걸 상상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조지훈은 한진영이 가진 감정이 단순하지 않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