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2화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진심이다
한진영은 서류를 받아 든 채로 여전히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다 수집한 건가?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조지훈은 한진영의 질문에 민망한 듯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그냥 예상했던 것보다 오래 걸려서 한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해도 조지훈은 신경 쓰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한진영에게 오래 걸린 것에 대한 변명 아닌 변명을 이야기했다.
“오래된 인물인 데다 바람처럼 사라져 버려서 이름 외에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젠슨 고문님께 여쭤볼 수도 없어 시간이 걸렸습니다.”
“잘했어. 내가 궁금해서 알아보라고 한 거니까. 그게 아니라면 레이 젠슨 고문님께 직접 여쭤봤겠지.”
한진영은 손에 든 서류를 내려다봤다.
얇은 서류봉투의 두께를 느끼며 살며시 웃었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려 추적했음에도 이 정도밖에 모으지 못한 것이 화면 속의 인물이 손을 썼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 실장이니까 이 정도나 모았겠지.”
“과거 이야기보다 현재 이야기에 집중해서 모아서 그렇습니다.”
“현재를 이야기할 게 있던가? 죽은 사람이라며?”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기에 정보를 모으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었다.
살아있다면 직접 찾아가거나 초대하여 이야기 들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미 랜스는 죽은 지 20년이 넘어가는 인물이었다.
한진영은 죽은 지 20년이 넘은 사람이 현재 이야기가 있을 수가 있느냐는 시선으로 조지훈을 돌아봤다.
조지훈은 한진영이 들고 있는 서류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토미 랜스는 죽었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한진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고? 저 양반과 함께?”
한진영은 화면을 향해 턱짓했다.
화면 속의 게리 챈슬러는 가상화폐가 쓰일 미래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 알아듣기 쉬운 말로 방청객과 시청자를 향해 이야기했다.
조지훈은 한진영이 턱짓한 게리 챈슬러를 잠시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직도 게리 챈슬러 블랙문 명예회장과 관계된 이야기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한진영은 조지훈의 말에 황당하다는 듯이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는 서류봉투를 열어 안에 들어있는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종이에 쓰여 있는 내용을 확인했다.
블랙문을 게리 챈슬러와 함께 설립한 토미 랜스는 게리 챈슬러 그리고 레이 젠슨과 같은 회사에 다녔던 인물이었다.
엄연히 따지면 게리 챈슬러와 레이 젠슨의 선배로 그래서 처음 블랙문을 설립했을 때 게리 챈슬러보다 이름이 앞에 놓이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토미 랜스는 그 이후 갑작스럽게 사라져 수십 년 동안 언급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진영도 블랙문의 설립자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랬던 인물이 게리 챈슬러와 레이 젠슨의 대화 속에서 등장했다.
한진영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존재할 것으로 떠올리고 조지훈에게 조사를 지시했고 그 결과가 지금 한진영의 손안에 들려 있었다.
서류를 바라보고 있는 한진영의 귀로 게리 챈슬러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상화폐는 여러분의 인생을 바꾸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여러분 앞에 놓여 있습니다. 당신의 아이가 그리고 손자가 먼 훗날 지금 이 시기에 여러분에게 뭘 하고 있었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인생을 바꿀 기회를 보고 놓쳤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기회를 잡았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짝짝짝짝.
게리 챈슬러의 말에 방청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열렬히 손뼉을 쳤다.
게리 챈슬러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방청객을 향해 손을 흔들어 환호에 화답했다.
그리고 진행자와 가볍게 악수를 하며 오늘 좋은 시간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한진영은 박수 소리를 들으며 조지훈이 조사한 내용을 살피고는 코웃음을 흘렸다.
“이걸 아직도 진행하고 있었다고?”
“네. 저도 상상도 못 했습니다. 소송이 30년이 넘게 이어졌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처음 시작부터 따진다면 뭐야? 40년? 40년이나 이어진 거 아냐?”
“맞습니다.”
한진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올리고 조지훈을 바라봤다.
조지훈도 한진영과 마찬가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안이 복잡한 경우에 따라 10년이 걸리는 소송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었다.
새로운 증거가 나오고 소송의 범위가 바뀌게 된다면 소송이 새롭게 진행되어 계속 연장이 되는 경우가 간혹 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들리기는 했다.
그러나 소송이 40년이 간다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경우였다.
오히려 누군가가 소송의 진행을 막고 있다는 생각이 짙게 들 정도로 소송이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한진영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듯이 조지훈이 가지고 온 서류를 손으로 툭 하고 내리쳤다.
그리고 조지훈을 돌아보고 물었다.
“결국 둘이 깨진 게 게리 챈슬러 때문이라고 볼 수 있나?”
“토미 랜스 측의 주장은 그렇습니다. 게리 챈슬러가 회사에 욕심을 가지고 외부에서 자금을 끌어와 지분을 희석했다고 합니다. 게리 챈슬러 측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소송의 골자입니다.”
“소송이 이어지고 있는 사안이지만 내가 경험한 게리 챈슬러면 분명 그러고도 남았을 거야.”
한진영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이제는 화면에서 사라져가는 게리 챈슬러를 바라봤다.
조지훈은 40년 동안이나 법률적으로 공방을 벌이는 사건을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한진영의 모습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한진영이 이렇게 자신했을 때 그의 말이 틀렸던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토미 랜스 유족과 만날 수 있나?”
“그게…….”
한진영이 고개를 돌려 조지훈을 돌아봤다.
조지훈은 난감한 표정으로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유족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자식은 약물과 자살로 모두 죽은 상태입니다. 있는 사람이라고는 토미 랜스의 부인이신 안젤라 랜스 분이 유일한데 랜스 여사도 요양원에 계시느라 요양원의 면회시간 외에는 만나 뵙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어렵다는 거지 못 만나는 건 아니지 않나?”
“네. 그렇긴 한데…….”
“시간 잡아봐.”
“직접 가실 생각이십니까?”
한진영은 확인하던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우리가 원하는 게 바로 이거 아닌가?”
한진영은 서류를 손으로 두드렸다.
“그렇다면 우리도 진심으로 대해야지.”
“40년 동안이나 시간이 질질 끌린 만큼 적당한 돈을 제시하면 회장님께서 가지 않으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반대야.”
한진영은 팔짱을 끼고 화면을 바라봤다.
이제 화면에서는 게리 챈슬러가 나오고 난 뒤 가상화폐 분석가들이 나와 가상화폐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서 하는 중이었다.
투자시장의 주류에 올라선 만큼 본격적으로 가상화폐에 관한 이야기를 방송국에서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진영은 화면을 바라본 채로 서류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원망이 얼마나 깊겠나? 그리고 원망이 깊은 만큼 자기 손으로 직접 끝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왜 하지 않겠나? 자식도 없고 본인도 요양원에서 지낸다면 돈도 랜스 여사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해. 오직 랜스 여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진심이야. 그리고 그에 대한 원망을 같은 무게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가야 하는 게 맞지.”
한진영은 조지훈을 돌아봤다.
조지훈은 한진영이 게리 챈슬러에게 가지고 있는 원망이 얼마만큼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화가 났다는 정도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의 원망은 자기의 생각보다 더 크고 깊다는 것을 조금 전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됐다.
토미 랜스 여사와 같은 무게의 원망을 하고 있다는 한진영의 말에 부모의 원수와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최대한 빠른 시간으로 잡아.”
“네. 알겠습니다.”
조지훈은 한진영을 향해 고개 숙여 알겠다는 뜻을 전했다.
한진영은 조지훈의 모습에 팔짱을 끼고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에서는 게리 챈슬러가 이야기한 내용을 중심으로 분석가들이 가상화폐와 관련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는 중이었다.
***
뉴욕주 북서부에 자리한 로체스터는 온타리오 호 연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과거 로체스터를 지탱하던 커다란 두 개의 회사가 파산과 이사로 사라지며 다른 러스트벨트 도시들과 다르지 않게 몰락을 걷는 듯했다.
그러나 로체스터 대학교를 위시한 교육계와 오랜 도시의 특징인 의료계가 도시를 지탱하며 다른 러스트벨트 도시들과 다르게 체질 개선에 성공했다.
좋은 환경 때문에 좋은 요양원이 온타리오 호를 끼고 자리하고 있었다.
조지훈은 바로 이런 로체스터 요양원으로 한진영을 안내했다.
“좋은 곳이네. 날씨와 함께 풍경이 마음을 안정시켜줘.”
한진영은 요양원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벤치에 앉아 넓게 펼쳐진 호수를 바라봤다.
그리고 벤치 옆에 서 있는 조지훈에게 물었다.
“나 사장에게서는 연락이 왔나?”
“현재 협상 중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40억 달러에 맞출 수 있을 것 같다고 해?”
한진영은 다리를 꼬고 벤치에 앉은 채로 조지훈을 올려다봤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곁에 서서 한진영이 던진 질문에 대답했다.
“긍정적인 상황에서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조만간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올 것 같습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라고 해. 꼭 40억 달러를 맞추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이야.”
한진영은 다시 호수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강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점점 시원해지는 것을 보니 시간을 더 끌었다가는 재미가 없어질지도 몰라. 그러니까 속도를 올리라고 해.”
“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이제 곧 오른다는 건가?’
나창운에게 지시했을 때보다 나스닥 지수는 더욱 떨어진 상태였다.
특히, 지수는 10,500선마저 깨며 10,000선 하향 이탈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시장 전문가들은 모두 하나같이 입을 모아 10,000선을 하향 이탈하게 된다면 상승장은 끝이 나는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지금의 추세로 보아 하향 이탈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대부분의 주장이었다.
조지훈은 이런 상황에서 조만간 상승할지 모르니 콜옵션 계약을 빨리 마무리 지으라는 한진영의 제안이 이상하게만 들린 것이었다.
“테라 주가는 어때?”
조지훈은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조지훈의 질문에 다시 대답했다.
“테라와 블랙문의 경우에는 하락 추세를 벗어난 모습입니다. 아무래도 코인의 영향 때문인지 두 종목은 지수와는 무관한 흐름을 보이고 있습니다. 테라는 300불을 돌파하여 다시 전고점인 400달러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블랙문 또한 상승세를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수가 10,500을 지키고 있는 것이 두 회사 때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테라 400달러…….”
한진영은 가볍게 웃었다.
“거의 다 왔네.”
“네?”
조지훈은 한진영이 다 왔다는 것이 무얼 이야기하는지 알아듣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한진영은 조지훈을 살짝 올려다보고 말했다.
“테라에서 재미있는 뉴스가 나오게 될 거야.”
“재미있는 뉴스요?”
“그래. 액면분할.”
“액면분할이요?”
조지훈은 깜짝 놀란 얼굴로 한진영을 향해 되물었다.
“첫 번째 액면분할 이야기가 나올 거야.”
“첫 번째라면…….”
첫 번째라면 두 번째, 세 번째가 있다는 말이었다.
조지훈은 그게 정말이냐고 물으려 할 때 그들에게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지훈은 우선 궁금증을 멈추고 한진영에게 말했다.
“오셨습니다.”
한진영은 넓게 펼쳐진 호수를 잠시 바라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다듬은 뒤 휠체어를 타고 있는 노파를 향해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나를 찾았다고요?”
하안머리의 노파는 무릎담요를 덮은 채로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한진영은 노파를 향해 먼저 자기를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진영이라고 합니다.”
“미스터 한?”
휠체어에 앉아 있는 노파는 고개를 갸웃했다.
젊은 동양인의 남자가 자기를 찾아올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양인 남자는 젊었고 기품이 넘쳐 보였다.
비싼 옷과 구두 그리고 넥타이까지 일반인들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할 것들로 치장하고 있었다.
비서까지 대동한 것이 보통 인물처럼 보이지 않았다.
노파는 다시 한번 한진영을 위아래로 살핀 뒤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모르는 분이군요. 저를 찾아온 게 맞으신 가요?”
노인은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은 동양인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한진영은 노인에게 가까이 다가가 노인의 요양사를 향해 웃으며 비켜줄 것을 권했다.
그리고 요양사 대신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았다.
“잠시 움직이면서 이야기 나누시겠습니까? 오늘 날씨가 참 좋습니다.”
한진영이 휠체어를 밀자 조지훈이 요양사에게 다가가 괜찮다고 말한 뒤 뒤를 따랐다.
요양사는 멀리 나가면 안 된다는 말을 하려다 조지훈의 뒤로 천천히 몰려드는 검은색 양복의 남자들을 보고 감히 말하지 못했다.
자기가 조심하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될 것처럼 검은 양복의 남자들이 주변을 철저히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넓게 펼쳐진 호수를 왼쪽에 끼고 천천히 휠체어를 밀었다.
노파는 잠시 고개를 돌려 호수를 바라봤다.
“말씀대로 날씨가 참 좋네요.”
“네. 좋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셨네요. 저를 왜 보러 오신 거죠?”
“날씨만큼이나 좋은 말씀을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날씨만큼 좋은 이야기요?”
노파는 고개를 돌려 뒤에서 휠체어를 미는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살짝 내린 뒤 노파에게 말했다.
“게리 챈슬러를 끌어내리려 합니다.”
“뭐라고요?”
노파는 깜짝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한진영은 노파가 타고 있는 휠체어를 웃는 얼굴로 계속 밀어내며 랜스 부인을 향해 이야기했다.
“블랙문의 공동 설립자이자 부군이신 토미 랜스 씨의 복수를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한진영을 바라보고 있는 노파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무릎을 덮고 있던 담요를 끌어 올린 뒤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나는 다 잊었어요. 나는 이곳에서 편안히 지내는 것에 만족한 사람이에요. 누군가에 대한 적개심은 잊은 지 오래니 그만 가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노파는 말을 마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더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고개까지 호수 쪽의 반대로 돌려 버렸다.
그러나 한진영은 휠체어를 미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