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3화 어차피 한 번 겪을 일이었다
연말 연휴를 보내고 출근하기 위해 조지훈이 한진영의 집으로 찾아왔다.
“푹 쉬셨습니까?”
“말도 마.”
준비하고 나가는 길에 한진영은 조지훈을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연휴가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출근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어.”
한진영은 연휴 내내 어머니에게 시달렸던 것을 떠올리고는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차 문을 직접 열고 차에 올라탔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맞은편으로 달려가 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뒤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어르신께서 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집밥을 드셔서 좋지 않으셨습니까?”
“집밥보다 잔소리를 더 많이 먹어서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질 지경이다. 이거 봐. 이게 연휴 동안 내가 먹은 잔소리야.”
한진영은 말을 하며 배를 쓰다듬었다.
잔소리를 들어 배가 터질 지경이라면서도 한진영의 손길은 싫은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잘 먹고 잘 쉬었다는 느낌이 잘 드러나는 손길이었다.
그렇게 두어 차례 배를 쓰다듬은 한진영은 손바닥으로 배를 두드리고 말했다.
“새해가 밝았으니 이제 또 힘내야지. 앞으로 차곡차곡 해야 할 일들이 쌓여있으니까.”
한진영은 조지훈을 돌아보고 지시했다.
“자 이제 시작하자.”
“네. 그럼 세이지 자산운용으로 이동하겠습니다.”
한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이 준비되었음을 확인한 조지훈은 차를 움직이도록 지시했다.
세이지는 신년이라고 특별한 행사를 준비하지 않았다.
회장을 비롯한 경영자들이 나서서 신년을 다짐하는 자리를 굳이 마련하지 않은 것이었다.
대신 언제나 그렇듯이 두둑한 연말 보너스를 지급하여 직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킨 한진영이었다.
단체로 모여 지루한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그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한진영의 선택이 옳았다는 듯이 한진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세이지 자산운용의 직원들이 한진영을 향해 환호를 보냈다.
마치 락스타가 등장한 것처럼 열렬한 환호로 한진영을 반긴 세이지 자산운용 직원의 모습에 한진영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 홍대민에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조용히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회장님께서 등장하시면 일이 안 될 정도입니다. 다들 회장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도 못 합니다.”
“홍 사장님도 저를 사랑하십니까?”
“가족 다음으로 사랑합니다.”
“하하하.”
한진영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사랑한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한 홍대민의 모습에 크게 웃고는 조정실에 서서 모니터링 화면을 통해 들어오는 현재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곁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홍대민을 향해 말했다.
“오늘부터 정리에 들어가면 됩니다.”
“네. 지난번에 말씀하신 내용을 전략분석실을 통해 전달받았습니다. 그 내용을 그대로 각 팀에 내려보냈습니다. 오늘부터 보유하고 있는 물량을 정리할 계획입니다.”
“좋습니다.”
한진영은 루터 컴퍼니를 나와 자산운용에 도착하여 전달한 내용을 홍대민이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홍대민은 한진영이 만족해하는 것을 보고 슬쩍 물었다.
“지난번에도 여쭸던 내용인데…… 그럼 연준이 금리 인상을 단행하고 시장이 꺾이는 건가요?”
홍대민의 질문에 한진영이 고개를 돌리고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 역시 지난번에도 했던 말이지만 지금의 움직임은 경계심 정도로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직 불꽃은 살아있습니다.”
“불꽃이요?”
“네. 사람들 마음에 투자시장에 발을 들이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불꽃 말입니다. 그게 살아있는 한 시장은 계속 갈 겁니다. 그리고 연준도 섣불리 금리 인상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아직’ 인플레이션이 확실하게 살아나지 않는 상황에서 금리 인상 카드를 꺼내 들 수 없으니까요. ‘아직’까지는요.”
홍대민은 한진영의 말에 안심했다.
상승장의 달콤함을 맛본 상황에서 하락장에 다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홍대민의 귀에 ‘아직’이라는 단어가 들렸다.
의미를 부여할 것까지는 없는 단어였지만 의미를 담는다면 충분히 담을만한 단어가 홍대민의 귀를 두드렸던 것이었다.
홍대민은 궁금한 마음에 한진영에게 왜 ‘아직’이라는 단어를 이야기한 것인지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그런 홍대민의 질문보다 조지훈이 먼저였다.
“회장님.”
조정실 화면을 바라보던 한진영이 고개를 돌려 다가온 조지훈을 바라봤다.
“블랙문의 게리 챈슬러 명예회장님께서 직접 사무실에 찾아오셨다고 합니다.”
“챈슬러 회장님이? 직접?”
“네.”
평소에도 일이 있다면 한진영을 부르곤 했던 게리 챈슬러였다.
그런 그가 이야기도 없이 직접 찾아왔다는 것에 한진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홍대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의미를 부여해야만 의미가 생기는 단어에 홍대민은 한진영에게 물으려던 것을 멈췄다.
겨우 ‘아직’이라는 단어에 신경 쓰기보다 게리 챈슬러라는 거물의 움직임이 더욱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어서 가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리 챈슬러 블랙문 명예회장님께서 직접 찾았다면…… 작은 일은 아닐 텐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작은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홍대민의 말에 동의하고 있지만 한진영은 여유롭기만 했다.
한진영은 고개를 돌려 조정실에 보이는 화면을 확인한 후 홍대민에게 지시했다.
“이번에도 12,000을 깼을 때와 마찬가지 움직임을 보일 겁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12,000을 깨지 않는 선에서 추세를 망가뜨리지 않으려 할 겁니다. 대충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120일 선? 그쯤 언저리에서 멈춘 뒤에 다시 튀어 오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홍대민은 한진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한진영이 무심하다는 듯이 던지는 말이었지만 바로 이 말이 앞으로의 주가 흐름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홍대민은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한번에는 14,000을 넘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니 진폭이 잦아질 때까지는 섣불리 상승을 예단하지 마십시오. 못해도 3번의 시도 뒤에야 돌파가 이루어질 테니까요.”
홍대민은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마음속으로 14,000 돌파 시도에 대한 숫자를 생각했다.
‘이번이 첫 번째이니 앞으로 두 번?’
홍대민은 잊지 않기 위해 마음속에 한진영이 건넨 말을 새겨 넣었다.
***
한진영은 홍대민에게 주의사항과 몇 가지 지시를 남기고는 게리 챈슬러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무실로 향했다.
조지훈은 차 안에서 한진영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챈슬러 회장님께서 왜 오신 걸까요?”
“뻔하지.”
“뻔하다고요? 그럼 오신 이유를 알고 계신 겁니까?”
조지훈은 답을 알고 있다는 듯한 한진영의 말에 놀란 얼굴로 바라봤다.
그러나 한진영은 조지훈을 향해 바로 답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안젤라 랜스 여사님은 잘 지내고 계시던가?”
한진영은 생뚱맞게도 조지훈을 향해 랜스 여사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조지훈은 그런 한진영을 향해 고개를 갸웃하고는 대답했다.
“네. 불편한 것 없이 지낸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최근에는 랜스 여사께서 오래된 친구 몇몇을 저택으로 초대해서 간단한 식사를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간단한 식사?”
“네. 점심 겸 저녁으로 몇몇 친구분과 함께 자리를 마련했다고 했습니다.”
조지훈의 말에 한진영은 가볍게 웃었다.
“역시 그래서 그랬나 보구나.”
한진영은 이제 알겠다는 표정을 지은 후 말했다.
“랜스 여사님의 친구를 통해 말이 전해진 것 같아.”
“말이 전해지다니요? 무슨 말이 전해졌다는 말씀이십니까?”
조지훈은 혹시라도 자기가 랜스 여사를 잘 감시하지 못해 일이 잘못된 게 아니냐는 걱정하는 얼굴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조지훈의 표정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채고는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걱정하지 마. 뭐 이상이 생기거나 그랬다는 뜻이 아니니까.”
“그러면…….”
“챈슬러 회장이 찾아온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고 했지?”
“네.”
“랜스 여사 때문에 온 거야.”
“랜스 여사 때문에요?”
“그래.”
한진영은 가볍게 차 안 팔걸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랜스 여사님의 오래된 친구를 통해 랜스 여사님이 이사를 한 걸 알게 된 거겠지. 그리고 그곳의 주인이 나라는 사실도 알았을 테고…… 나아가 내가 랜스 여사님을 데리고 온 것까지도 눈치를 챘을 거야. 그래서 나를 찾아온 거겠지.”
“화가 나서 말씀이십니까?”
“그랬으니 통보도 하지 않은 채 바로 달려온 거겠지?”
조지훈은 화가 나서 달려왔다는 말에 표정이 굳어진 채로 한진영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이번 일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조지훈이 자기 잘못이라고 말하는 말에 한진영이 웃었다.
“왜? 랜스 여사님을 감시하지 못한 걸 후회하는 거야?”
“감시까지는 아니더라도 친구분들을 초대하는 것을 막았다던가 아니면 초대했다고 하더라도 다른 곳에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약속을 받았어야 했는데 그걸 하지 못해서…… 챈슬러 회장님에게까지 랜스 여사님 이야기가 들어간 것 같습니다.”
“됐어. 신경 쓰지 마.”
한진영은 대수롭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가 가리면 가릴수록 상대에게 정체가 들통나게 되어 있어. 그리고 애초에 난 숨길 생각도 없었으니까 별일 아니야.”
“숨길 생각도 없으셨다고요?”
“그래.”
한진영은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숨겨? 숨길 이유가 없잖아.”
“그게…….”
당연히 숨길 이유가 없다는 한진영의 모습에 조지훈은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자기는 숨길 이유가 100가지는 넘는다고 생각하는데 한진영은 숨길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에 다음 말이 떠오르지 않은 것이었다.
“걱정하지 말고 자책하지도 마. 어차피 한번 겪을 상황이고 큰일도 아니니까.”
한진영은 여유롭게 자동차 시트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어차피 한번 겪을 일이었어. 오히려 너무 늦게 찾아와서 이상하던 참이었어.”
조지훈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한진영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처음부터 이런 일을 한진영은 예상했다는 것이었다.
한진영을 태운 차는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사무실 건물에 도착하게 됐다.
조지훈은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걱정하는 얼굴을 지우지 못한 채 한진영의 뒤를 따랐다.
그런 조지훈과 달리 한진영은 그의 말 대로 걱정이 없다는 얼굴로 게리 챈슬러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왔구먼.”
문이 열리고 한진영이 안으로 들어오자 게리 챈슬러가 한진영의 의자에 앉은 채로 들어오는 한진영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한진영은 자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게리 챈슬러를 향해 모르는 척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연락도 없이 새해 첫날에……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게리 챈슬러는 말없이 한진영을 계속 바라봤다.
한진영은 천연덕스럽게 맞은 편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았다.
정작 사무실의 주인이 손님 자리에 앉았는데도 자리를 뺏은 사람이나 빼앗긴 사람이나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게리 챈슬러는 팔걸이에 올려놓은 손을 책상 위로 옮기면서 입을 열었다.
“자네를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생각했었네.”
“저를요?”
“그래.”
게리 챈슬러는 책상 위에 올린 손을 들어 한진영을 가리켰다.
“안젤라 랜스를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오신 겁니까? 저는 또 왜 오셨나 했더니 그것 때문이었군요.”
게리 챈슬러가 왜 찾아왔는지 알면서도 천연덕스럽게 게리 챈슬러 앞에서는 이제 알았다는 듯이 연기를 보인 한진영은 손님 의자에 몸을 기댔다.
게리 챈슬러는 그런 한진영을 향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제부터 말 잘해야 할 거야.”
“말을 잘해야 하다니 무슨 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지금부터 하는 모든 말. 자네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내가 가진 모든 걸 이용해서 자네를 월스트리트에서 쫓아낼 생각으로 여기에 찾아온 거니 자네는 내 앞에서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해. 내가 기분이 안 좋아지면 자네는 쫓겨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저를 쫓아낸다고요? 왜 그렇게 무섭게 말씀하십니까?”
한진영은 몸서리를 치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뭐든 물어보십시오. 숨기는 것 없이 말씀드릴 테니까요.”
“그래. 자네는 당연히 그래야 할 거야.”
게리 챈슬러는 미간을 모으고는 한진영에게 물었다.
“안젤라 랜스를 뉴욕으로 데리고 왔는데 이유가 뭔가?”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뉴욕이 아니라 뉴포트로 모신 겁니다.”
한진영은 찌를 듯한 게리 챈슬러의 시선을 마주하고도 물러나는 모습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명예회장님이 기분이 나쁜 게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습니다. 왜 명예회장님께 이야기도 하지 않고 소송당사자를 데리고 왔느냐는 것 때문에 화가 나신 거지요?”
“그래. 잘 알고 있네. 이유가 뭐야? 설마 나하고 뭘 어쩔 생각으로 뒤에서 수작을 벌이고 있는 건가?”
“설마 그러기야 하겠습니까? 그랬다면 안젤라 랜스 여사님을 꼭꼭 숨겼겠지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럼 무슨 속셈으로 그런 건가?”
한진영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회장님. 제 처지도 이해해주십시오.”
“자네 입장?”
“네. 저희 회사 고문이 누구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게리 챈슬러는 한진영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세이지의 고문이 누구인지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손가락으로 문 쪽을 가리키고 말했다.
“고문님께서 랜스 여사님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마침 제가 뉴포트에 새로운 집을 사기도 했고…… 그래서 이곳으로 모신 겁니다. 그리고 소송과 관련된 것은…….”
게리 챈슬러가 묻기 전에 한진영이 먼저 소송 문제를 이야기했다.
“랜스 여사님께 돈을 드릴 이유가 필요했습니다. 그냥 드릴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그걸 지금 나한테 믿으라는 건가?”
“믿지 않으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게 사실이니까요.”
한진영은 날카롭다 못해 레이저가 쏘아지는 듯한 게리 챈슬러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묶인 채로 수십 년이 지나간 소송입니다. 다시 열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죠. 설마 제가 그걸 받아서 소송을 진행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하십니까?”
게리 챈슬러는 한진영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말없이 의심의 시선을 한진영을 향해 쏘아 보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