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646화 (646/650)

646화 시장의 지배자

9,000을 깨고 8,000대까지 내려앉았던 나스닥이었다.

VIX는 90을 넘어 100이라는 이론상의 숫자 코앞까지 다가가기도 했다.

채권시장은 제대로 거래가 되지 않았으며 원자재 시장은 마이너스 숫자를 다시 보는 게 아니냐는 시각이 지배적인 상황이었다.

전 세계가 동반 폭락을 이어갔다.

미국이 50% 하락이라는 기록적인 폭락을 보였다.

유럽과 아시아는 고점 대비 60%가 빠져 내려왔다.

시장은 이제 모두가 끝이 났다며 포기하는 상황에 빠졌었다.

이대로 끝이 나 석기시대로 가는 것이 아니냐는 자조적인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이렇게 꿈과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구세주가 나타났다.

세이지.

블랙문이라는 폭탄을 떠안은 것도 모자라 블랙문을 통해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확신에 찬 목소리를 냈다.

세이지는 블랙문을 인수할 여력이 충분한 곳이었다.

하지만 여력이 충분하다고 하더라도 품고 나서 같이 쓰러지지 말란 법이 없었다.

승자의 저주 같은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닐 정도로 대규모 M&A 이후에 함께 무너지는 상황은 비일비재하게 나왔었다.

하물며 정상적인 M&A도 이럴진대 시장을 붕괴시킬 뻔한 블랙문을 삼킨 세이지가 과연 지금 상황을 딛고 블랙문을 소화 시킬 수 있을지 사람들은 의문을 품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영국의 도박업체는 세이지의 파산 확률을 60%까지 올려 잡았다.

블랙문을 삼키기 전 0.2%에 불과했던 확률이 100%짜리 블랙문을 잡아먹은 뒤 60%까지 올라간 것이었다.

시장은 걱정에 휩싸였다.

블랙문 하나도 시장 붕괴를 걱정해야 하는데 세이지까지 함께 무너진다면 석기시대로 간다는 농담이 농담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시장은 불안한 눈으로 세이지를 바라봤다.

그때 재미있는 루머가 시장에 흘러나왔다.

세이지는 현재 상황을 천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로 생각하고 있다.

총액 9,000억 달러의 자금을 전 세계 주식시장에 풀어 매수에 들어갔다.

지난 고점에서 3,000억 달러의 공매도를 쳤던 세이지가 지금은 세 배의 금액을 매수에 베팅했다.

블랙문 인수 뉴스와 함께 나온 반등에 벌써 인수대금을 세이지는 확보했다.

세이지는…….

세이지는…….

세이지와 관련된 뉴스가 쏟아져 나왔다.

쏟아진 뉴스의 대부분은 현재 시장을 바라보는 세이지의 시각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리고 세이지의 시각은 현재 시장이 기회라고 이야기했다.

최석영이 방송에서 나와 이야기한 것과 다르지 않은 내용이 뉴스를 통해 외부에 전해진 것이었다.

세이지가 블랙문을 인수했다는 뉴스로 9,000대까지 회복했던 나스닥 지수가 세이지가 지금 시장에 9,000억 달러를 집행했다는 소식과 함께 단숨에 10,000선을 뚫어냈다.

상방 서킷 브레이커라는 흔하지 않은 상황이 펼쳐지며 시장을 한방에 돌려세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장은 8,000에서 10,000까지 사흘 만에 회복하는 믿기지 않는 회복력을 보였다.

눈을 감았다 뜨기가 무섭게 떨어져 내려가던 시장이 이제는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오르기 시작했다.

***

밝은 표정의 앵커는 앞에 앉아 있는 기자를 향해 말했다.

-정말 숨 가쁘게 지나온 지난 몇 달이었습니다. 이제는 조금 안심해도 되는 겁니까?

-앵커님의 표정만큼이나 지금 시장은 어둠이 지나가고 밝은 햇살이 내리쬐고 있는 상황입니다.

앵커는 기자의 말에 얼굴을 손으로 매만졌다.

기자는 그런 앵커의 얼굴을 바라보고 웃으며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고점 대비 숨도 안 쉬고 절반까지 내려왔던 지수가 50%의 상승을 눈 깜짝할 사이에 보여줬습니다. 이제 시장은 블랙문이라는 악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모습으로 나스닥 기준 12,000선에서 횡보를 하는 중입니다.

-지옥 같던 시간이 지나갔으니 이제 좋은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앵커는 한결 온화해진 시장의 모습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은 뒤 감탄하는 말을 내뱉었다.

-세이지는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네. 대단하다는 말에 저도 동의합니다. 지금 전 세계 시장을 세이지가 안정시켰으니까 말입니다.

-그뿐이 아니라 지금 블랙문의 인수 비용을 모두 벌었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앵커가 시장 참여자들이 모두 궁금해하는 질문을 던졌다.

기자는 그런 앵커의 질문에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세이지는 인수 협상이 벌어지기 전부터 매수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매수한 금액이 총액 9,000억 달러에 달한다고 합니다. 예비비만 남기고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을 모두 쏟아부어 매수를 했다는 이야기인데요. 그만큼 세이지는 시장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기자의 말에 앵커는 놀란 듯이 입을 열었다.

9,000억 달러라는 금액이 보여주는 엄청난 수준의 매수 사이즈에 첫 번째 놀랐다.

그리고 모두가 손을 놓을 상황에 오히려 그 큰 금액을 집행했다는 것에 두 번째 놀라고 말았다.

기자는 놀란 표정의 앵커를 향해 계속 이야기했다.

-그렇게 매수하여 올린 수익이 현재 3,000억 달러에 달한다고 합니다. 인수 금액과 채무 변제 금액 등을 제외하고도 2,000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뭐가 또 있다는 말씀입니까?

-블랙문의 자산도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블랙문 것도요?

-네.

기자는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을 자세히 설명했다.

-분명 블랙문은 부실 덩어리였습니다. 예치금과 채무 그리고 펀드런에 금방이라도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전혀 다르다니요? 어떻게 다르다는 말씀입니까?

앵커는 점점 더 놀란 듯한 표정으로 기자에게 질문했다.

기자는 가지고 온 서류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우선 첫 번째로 들여다봐야 할 것이 블랙문의 자산 변화입니다. 세이지에 인수되기 전 3조 달러가 무너진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시장이 반등하고 안정되며 3조 5,000억까지 자산이 증가한 상황입니다. 3조 달러는 고객의 예탁금과 자산이 균형을 이루는 지점입니다. 3조 달러 이하가 되면 고객에게 돈을 다 돌려주지 못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지금 3조 5,000억까지 자산이 늘어났으니, 예탁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모든 고객이 돈을 인출하더라도 자체적으로 해결이 가능한 선을 넘었으니, 고객은 더는 돈을 찾지 못할 거라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자는 맞장구치는 앵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계속 이야기했다.

-그리고 예탁금 문제가 해결된 상황에서 채무 변제 또한 발목을 잡지 않게 됐습니다. 오히려 채권자들은 채무 변제를 원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오고 있습니다.

-채권자들이 돈을 오히려 갚지 말라고 한다고요?

앵커는 뜻밖의 이야기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기자는 그런 앵커의 반응이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네. 채무를 통해 세이지와 조금 더 깊은 유대관계를 이어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 채권 회사들의 생각이라는 이야기를 관계자의 입을 통해 이야기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앵커는 기자의 말에 연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돈을 빌려준 사람이 세이지와 친해지고 싶어 돈을 천천히 갚아도 된다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앵커는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고는 질문했다.

-참으로 신기하기만 한 상황인데요. 혹시 어떤 이유로 그러는 것인지 알 수가 있을까요?

-현장에서는 바로 펀드런의 변화가 채무 유예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는 예상을 하고 있습니다.

기자가 펀드런을 이야기하자 앵커는 지난 기억이 떠올랐던지 살며시 몸을 떨었다.

-실질적으로 블랙문을 무너뜨릴 뻔한 것이 바로 펀드런 때문이었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세이지가 블랙문을 인수하며 펀드런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런데 펀드런과 채무 유예가 어떻게 연관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이제는 펀드런이 반대로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반대요? 반대라면…….

앵커는 기자가 말한 반대라는 개념을 가만히 생각하고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가입자가 폭증하고 있다는 이야기인가요?

-바로 그렇습니다. 빠져나갔던 가입자들이 모두 돌아오고 있는 것도 모자라 새로 가입하겠다는 신규 고객이 너무 많다고 합니다. 마치 펀드런이 발생하여 고객이 빠져나갔을 때와 비슷한 속도로 신규 고객이 유입되고 있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이야기가 채무 변제를 늦추게 만들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기자의 말에 앵커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신규 가입 고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채권자들이 그 고객을 자기들 은행으로 유치하고 싶어 채무 변제를 늦추고 싶다는 건가요?

-고객의 유입이 상당한 만큼 그 고객들을 잡기 위해 은행들도 맨발로 뛰쳐나와 세이지에게 부탁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그 이유가 아니라면 굳이 빚을 갚겠다는데도 갚지 말라고 하는 상황이 나오지 않을 테니까요.

-세이지가 블랙문을 인수하자 갑과 을이 바뀌어 버린 모습이군요.

-우습게도 지금 상황이 그렇습니다.

기자의 말에 앵커는 처음 보여주었던 감탄하는 표정을 다시 한번 지었다.

기자 또한 앵커와 같은 감탄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마무리 이야기를 꺼냈다.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블랙문을 인수하며 시장을 안정시킨 것도 모자라 단시간 만에 시장의 흐름을 바꾸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장의 안정을 통해 연준의 정책 드라이브에도 힘을 보탠 모습입니다. 세이지가 이번 일을 통해 이룬 것이 정말 많습니다. 하나의 회사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 아니 그 이상을 보여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세이지가 가지는 시장에서의 위치는 당분간 각국 중앙은행과 같은 위치에서 시장에 영향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

기자의 말에 앵커도 동의했다.

오히려 방송이라서 과한 표현을 자제했다고 느껴질 만큼 현재 세이지가 가지는 지위와 영향력은 글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런 지위와 영향력을 시기하거나 질투 혹은 경계하는 곳은 없었다.

시장 붕괴 직전까지 발을 내디뎠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는 상황에서 세이지를 욕하는 것은 시장에서 더는 활동하고 싶지 않다는 것과 같은 말로 통용됐기 때문이다.

명실상부 세이지가 시장의 지배자 위치에 올라갔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이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

세이지의 블랙문 인수 소식이 이제 차분히 가라앉을 무렵 또 다른 소식 하나가 시장에 전해졌다.

바로 테라의 CEO인 노아 스미스가 모든 경영권을 내려놓고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었다.

사람들은 노아 스미스의 결정을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노아 스미스의 실책으로 인해 테라가 위험한 상황을 겪었던 만큼 계속 회사를 이끌어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노아 스미스가 물러난 테라는 신임 CEO를 선출하고 세이지에 도움을 요청했다는 발표를 공식적으로 내놓았다.

세이지가 테라가 곤란해하는 채무를 대신 변제한 후 채권을 주식으로 전환하여 받는 계약을 진행했다는 것이었다.

통상적으로 신규 주식이 발행되는 것은 주가에 악재가 되고는 했다.

게다가 이번 같이 대규모 신규 발행의 경우 회사와 경영진이 질타받아도 이상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시장은 테라의 결정에 환호와 찬사로 화답했다.

다른 곳도 아닌 세이지의 도움을 이끌어낸 것에 테라가 탁월한 선택을 했다며 칭찬을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칭찬은 바로 주가의 상승을 이끌어냈다.

1,000달러에서 100달러까지 90%가 떨어져 내렸던 주가가 세이지의 지분 참여 소식이 전해지며 단숨에 200달러까지 올라간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멈추지 않고 상승세는 당분간 계속 이어질 것으로 예상됐다.

세이지가 테라에 대한 경영권을 인정하고 투자금이 필요할 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세이지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생긴 상황에 테라의 앞날은 전보다 더욱 밝은 모습으로 사람들을 유혹했다.

***

몸수색을 마친 한진영과 조지훈이 연방수사관의 안내에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면회 시간은 30분입니다. 약속 시간이 모두 소진되면 수사관이 계신 방으로 찾아갈 테니 그땐 바로 나오셔야 합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조지훈이 한진영을 대신하여 연방 수사관을 향해 알겠다는 말을 건넸다.

연방 수사관은 조지훈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후 닫혀있는 방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연방 수사관의 말에 한진영은 고맙다는 말을 건넨 후 직접 닫혀있던 방의 문을 열었다.

“왔나?”

문이 열리자 안에서 힘이 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진영은 완전히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간 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잘 지내셨습니까?”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내가 잘 지내는 것으로 보이나?”

허연 수염으로 얼굴을 뒤덮은 게리 챈슬러는 다 말라비틀어진 화분들 가운데 앉아 있었다.

과거의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같은 사람인지 의심부터 될만한 모습을 한 채로 양팔을 벌린 뒤 말했다.

“내 겉모습이 어떤지 내가 제일 잘 아니까 잘 지낸다 혹은 얼굴이 망가졌다 같은 말일랑 할 생각하지 말게. 자네와 나는 그런 이야기 말고도 할 이야기가 많으니까.”

웃음을 거두고 손을 내린 게리 챈슬러는 앞에 놓인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거기 앉게. 시간이 30분 밖에 없다며? 어서 시작하세 나.”

급한 모습의 게리 챈슬러였다.

한진영이 자리에 앉자마자 게리 챈슬러는 의자를 한진영 쪽을 끌어당기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떤가? 세계 최고의 자산운용사의 대표가 된 기분 말일세.”

“기분이 어떤지 묻지 말라시면서 제 기분은 궁금하신 겁니까?”

“그럼. 당연히 궁금하지.”

게리 챈슬러는 두 번 말하면 입이 아프다는 듯이 손을 흔들고는 말했다.

“나도 그 자리에 앉아봐서 그 기분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같은 세계 최고라고 하지만 엄연히 내가 앉았던 곳과 자네가 앉은 곳은 다르지 않나?”

“어떻게 다르다는 말씀입니까?”

“2위가 없는 1위.”

게리 챈슬러는 한진영을 향해 몸을 굽히고 한진영에게 뛰어들 듯한 자세를 잡았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뒤에서 긴장한 얼굴로 게리 챈슬러를 바라봤다.

게리 챈슬러가 한진영을 향해 덤벼들지 않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게리 챈슬러는 바짝 긴장한 조지훈의 모습을 확인하고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 주인을 내가 어떻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게리 챈슬러는 비웃음이 담긴 표정으로 조지훈을 바라본 후 다시 한진영에게 말했다.

“그래서 기분이 어떤가? 전 세계에서 오롯이 자네 혼자 자리에 앉아있는 그 기분 말일세. 아래 앉아 있는 사람들과 까마득한 차이로 형체도 보이지 않는 그 자리. 내가 원하던 그 자리에 앉으면 어떤 기분인지 나한테 이야기나 해주게나. 자네 말을 듣고 대리만족이라도 하려니까.”

친구에게 과자 맛이 어떤지 물어보는 아이처럼 눈을 반짝인 게리 챈슬러였다.

한진영은 말없이 가만히 게리 챈슬러를 바라봤다.

웃고 있던 게리 챈슬러는 한진영의 시선에 손으로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왜 그러나? 내 얼굴에 뭐라도 묻은 건가?”

“제가 궁금한 게 그게 전부입니까?”

한진영의 말에 게리 챈슬러는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게 무슨 소리? 자네에게 물어볼 게 어디 한두 가지인 줄 아나? 30분이라는 시간이 모자랄 정도야.”

게리 챈슬러는 한진영을 향해 숙였던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말했다.

“그런데도 자네에게 기분이 어떤지부터 물어보는 건 정말로 내가 원하던 자리라서 그러는 거네.”

의자에서 일어난 게리 챈슬러는 말라비틀어진 잎을 늘어뜨리고 있는 화분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만지면 그대로 떨어져 내릴 것 같은 잎을 손등으로 쓸어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은퇴를 하고 뒤로 물러났던 내가 왜 다시 전면에 나온 줄 아나?”

게리 챈슬러는 쓸어내리던 손길을 멈췄다.

“바로 자네가 앉아있는 그 자리가 눈에 보였기 때문이네. 바로 그 자리가…….”

돌아선 게리 챈슬러의 어깨에서 분노와 질투가 넘실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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