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649화 (649/650)

649화 은퇴가 아닌 휴식

비행기에 올라탄 한진영은 지금 막 완성됐다는 광고를 확인했다.

영상 속에서는 지난 폭풍 같았던 증시 상황이 편집되어 나왔다.

뉴스를 통해 마구 쓰러지는 자산운용사들의 리스트와 당장에 석기시대로 돌아갈지 모른다며 호들갑을 떠는 내용이 나왔다.

그리고 이어진 멘트는 사람의 가슴을 울리게 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왔다.

블랙문 파산 위기로 인해 모든 금융 시장이 무너질 것 같은 상황에서 나타난 세이지가 모든 것을 해결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광고는 끝이 났다.

“괜찮네.”

한진영은 만족감을 나타내고는 태블릿을 조지훈에게 건넸다.

조지훈은 한진영이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조 부사장님은 이걸 전 세계 동시에 광고하는 것이 어떠냐고 이야기했습니다. 각 지역에 맞는 언어로 바꿔서 한날한시에 뿌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입니다.”

“알아서 하시라고 해. 내가 원한 건 세이지가 돈을 훔치는 도적처럼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것 정도니까. 분명 시장이 잠잠해지면 우리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거야. 그들이 나타나기 전에 먼저 이미지를 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진행하는 거니까 나머지는 알아서 해도 된다고 해.”

한진영은 조지훈이 들고 있는 태블릿을 슬쩍 바라보고 말했다.

“영웅으로 치장될 것까지 없어. 그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우리가 하려는 일이 곤란해지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해.”

한진영은 지금 나오는 영웅으로 치장되는 것이 불편하다는 듯이 말했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뜻을 알아듣고 바로 들고 있는 노트에 한진영의 지시를 적어 넣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대로 바로 회장님의 뜻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진영은 노트에 한진영의 지시를 적어 넣는 조지훈을 가만히 바라봤다.

“쓰읍…….”

“왜 그러십니까? 혹시 다른 지시할 일이 있으십니까?”

조지훈은 지시를 모두 적어 넣은 뒤 노트를 덮으며 한진영을 바라보고 물었다.

한진영은 조지훈의 질문을 듣고도 바로 대답하지 않고 조지훈의 얼굴을 계속 살피기만 했다.

“혹시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조지훈은 한진영의 시선에 손으로 얼굴을 훑어냈다.

얼굴에 난 여드름이 한진영을 신경 쓰게 만드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에게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조 실장이 내 옆에 얼마나 있었지?”

조지훈은 한진영의 질문에 살짝 눈을 치켜뜨고는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글쎄요. 대략 5~6년 정도 지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그건 어째서 물어보십니까?”

“5~6년. 뭐 짧다면 짧고 오래됐다면 오래됐다고 할 수 있겠네.”

“학교 졸업하고 바로 들어왔으니, 저에게는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하하. 짧고 긴 게 아니라 전부라고?”

한진영은 조지훈의 대답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조지훈의 대답이 듣고 싶었던 정답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좋아. 전부건 아니건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이제 조 실장도 슬슬 한 자리 맡아야지.”

“네? 그게 무슨 말씀인지…….”

“언제까지 내 옆에서 내 시중이나 들 생각이야? 어찌 보면 자네도 창립 멤버나 마찬가지인데 이대로 계속 비서실에서 썩을 생각이야?”

“회장님.”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했다.

그러다 급히 정신을 차리고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회장님. 다른 분들과 달리 저는 처음부터 회장님 곁에 있던 사람 아닙니까? 회장님의 곁을 지키는 것 외에 저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뭐 달랐을 줄 알아?”

한진영은 당황한 표정의 조지훈을 향해 말했다.

“최 사장님은 나하고 같이 객장에서 일하던 분이었어. 조 부사장님의 경우에도 나와 같이 채권 팀에서 일했었고…… 다 마찬가지야. 처음 하는 일과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어. 하지만 봐봐. 다들 잘하잖아. 걱정할 것 없어.”

“회장님.”

“생각해 봐.”

한진영은 아랫입술을 살며시 떨고 있는 조지훈을 바라봤다.

이제 서른을 갓 넘은 나이의 조지훈이었다.

조지훈이라고 야망이 없을 리가 없었다.

세이지에서 회장 비서실 실장이라는 위치가 가지는 힘은 웬만한 계열사 사장들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홍대민이나 나창운조차 한진영을 만나기 위해서는 조지훈의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다른 계열사 사장들은 조지훈이 아니라 조지훈이 거느리고 있는 비서실 직원과 스케줄을 맞춰야 했다.

세이지에서 오직 최석영 정도만이 조지훈에게 한진영과의 만남 시간을 먼저 정해서 통보할 수 있을 정도로 비서실 실장이 가지는 파워는 막강했다.

세이지 계열사 내에서도 이 정도인데 외부에서 바라보는 힘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공공연하게 세이지의 2인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세이지에서 가지는 조지훈의 위치는 확고하기만 했다.

하지만 힘이 강하다고 해서 모험심이 없는 것까지는 아니었다.

이제 겨우 30 초반의 나이에 승승장구해 가는 계열사를 바라보며 가슴이 뜨거워지지는 것을 식히길 하루 이틀 한 것이 아니었다.

한진영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조지훈에게 제안한 것이었다.

“오랜 시간 지켜봤으니까 자네도 잘하겠지. 이번에 블랙문까지 인수하면서 자리에 공석이 많이 생겼어. 자네가 원하는 곳이 있으면 정해서 이야기해 봐. 웬만하면 내가 그 자리에 앉혀줄 테니까.”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의 눈빛이 흔들렸다.

한진영의 제안이 조지훈의 귀에 매력적으로 들렸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내 조지훈은 자기가 비서실을 떠났을 때를 떠올리고 걱정하는 말투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회장님. 그럼 회장님을…… 누가 모시는 겁니까?”

“나? 지금 조 실장이 떠난 뒤 나를 모실 사람이 없을까 봐 그걸 걱정하는 거야? 자네가 가서 회사를 잘 운영할지 말지를 걱정하는 게 아니고?”

한진영은 재미있다는 듯이 조지훈을 바라보고 말했다.

“회장님 말씀대로 회장님 곁에서 회장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봤는데 제가 잘하지 못할 거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하. 자신감 좋은데.”

“그리고 저를 도와주실 분들이 많이 계시니 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분들께 여쭤본다면 어려움도 문제없이 헤쳐나갈 거로 생각합니다.”

“그래. 물어보는 건 나쁜 게 아니야. 아주 좋아.”

한진영은 조지훈의 말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지훈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이 이제 가장 걱정되는 문제를 다시 물어봤다.

“그래서 그건 문제가 안 되는데…… 회장님을 보필하는 게 문제가 됩니다. 저 말고 누가…… 아! 회장님을 저밖에 모실 사람이 없다고 하여 이러는 게 아닙니다. 그저…….”

조지훈은 혹시 말실수라도 했을까 봐 걱정하는 얼굴로 한진영에게 손을 들어 휘저었다.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을 바라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조 실장 말이 맞아. 날 제대로 챙겨줄 사람은 조 실장밖에 없어.”

“그럼…….”

한진영이 인정하자 조지훈은 급히 머릿속으로 비서실의 직원 중 누가 자기 후임으로 괜찮을지를 생각했다.

‘앤더슨은 한국말이 서투르니 힘들고…… 미스 성은 아무래도 여자라 회장님이 불편해하실 것 같고…… 미스터 김? 미스터 김이 가장 적당하기는 한데…… 비서실로 넘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업무 숙달이 덜 되었을 텐데…….’

아주 잠시였지만 조지훈의 머릿속에서는 비서실 직원 50명의 얼굴이 한 번에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괜찮은 사람 세 명을 떠올랐다.

하지만 세 명 모두 단점이 존재했다.

조지훈은 역시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지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조금 더 회장님의 곁을 지키면서 제 후임을 만든 뒤에 그때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야. 지금이 딱 좋아.”

“네? 지금이 딱 좋다고요?”

“그래. 지금이 타이밍이라서 조 실장에게 제안한 거야.”

“지금이 어떤 타이밍인지…….”

조지훈은 도대체 한진영이 말하는 타이밍이라는 것이 무얼 말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한진영은 앉았던 의자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의자도 누울 수 있도록 뒤로 젖히고는 말했다.

“앞으로 한동안 좀 쉴 생각이야.”

“쉬신다고요? 언제까지 쉬신다는 말씀입니까? 아니. 그전에…… 왜 쉬려 하시는 겁니까?”

쉰다는 말에 조지훈은 다급히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한진영과 쉰다는 말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주말은 물론이고 휴일까지도 한진영에게는 일하는 날이었다.

낮과 밤도 가리지 않았다.

급한 일이 있을 땐 밤도 수시로 새어가며 일을 했던 것이 한진영이었다.

그런 한진영이 쉰다고 이야기하니 조지훈은 혹시 한진영이 어디 아픈 게 아니냐는 생각까지 들게 됐다.

“분명 두 달 전에 받은 건강검진에서는 이상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혹시…… 지금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정확하게 한국 의료진을 통해 정밀 검사를 받으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아니면…… 수술받기 위해…… 우리나라가 무슨 분야에 뛰어났지?”

말을 하며 점점 안 좋은 생각이 늘어난 조지훈은 어두운 표정으로 혼잣말까지 내뱉었다.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을 바라보고 혀를 찼다.

“나중에 회사 맡아서 운영하게 되면 그렇게 조급하게 움직이는 건 고치도록 해. 그러다 정작 중요한 걸 놓치게 될 테니까.”

“회장님. 지금 회장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게 뭐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말씀 좀 해보십시오. 도대체 어디가 얼마큼 안 좋으신 겁니까?”

조지훈은 참지 못하고 누워있는 한진영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당장에라도 한진영의 옷을 벗겨 한진영의 몸을 살펴야겠다고 덤벼들었다.

“거참.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앉아. 난 괜찮으니까.”

“정말 괜찮으십니까?”

“그래. 정말 괜찮아.”

조지훈은 자리에 앉으면서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의 모습에 가볍게 웃고는 눈을 감았다.

“거의 10년이야. 그 시간 동안 미친 듯이 달려서 여기까지 왔어.”

한진영은 말을 하며 고단함을 느꼈는지 목소리에 피로함이 가득 묻어 나왔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을 듣고 숙연해졌다.

한진영이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조지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달려서 내가 이루고 싶은 건 다 이뤘어. 복수와 성공. 하나를 쫓아도 모자란다는 것을 나는 두 가지 모두 성공시켰어. 안 그래?”

“맞습니다. 이보다 더 잘 해낼 사람이 없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완벽하게 해내셨습니다.”

한진영이 뉴욕에서 떠나기 전 게리 챈슬러에 대한 첫 재판이 열렸다.

검찰은 게리 챈슬러에게 벌금 2,000억 달러와 1,200년 형을 구형했다.

구형이 내려지는 순간 순식간에 평범한 노인처럼 변한 게리 챈슬러가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겨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방송됐다.

조지훈은 무엇에 대한 복수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하지만 복수가 성공한 것만큼은 확실하게 성공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게리 챈슬러는 감옥에 들어갔고, 모든 업종을 통틀어서 세계 최고 기업을 일구셨습니다. 이것보다 더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 그런데 내가 뭘 더해야 하겠나?”

눈을 감고 뭘 더 할 수 있겠냐는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복수의 대상은 모두 감방에 들어가 세상과 단절되었다.

회사는 압도적인 1위로 2위와 까마득한 차이를 내고 있었다.

여기서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할지 조지훈으로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좀 쉬어야지.”

“언제까지 쉬실 생각인지…….”

조지훈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글쎄? 목표가 생길 때까지? 그때까지 좀 쉬려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요새 파이어족이란 말이 있다며?”

“네. 이른 나이에 은퇴하는 것 말씀입니까?”

“그래. 그거.”

한진영은 고개를 돌려 조지훈을 돌아봤다.

“나도 그거 한번 해봐야겠어. 파이어족. 그거 할 생각이야.”

한진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후 고개를 돌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조 실장은 내 곁을 떠나서 회사 하나 맡아서 운영하도록 해. 파이어족인 사람을 돌봐줄 필요 없으니까.”

말을 마치고 눈을 감고 있는 한진영을 조지훈은 가만히 바라봤다.

파이어족이 은퇴를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조지훈이 느끼기에 한진영이 말한 것은 휴식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휴식의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은 조지훈이었다.

‘앞으로 시장이 잠잠해진다는 건가?’

한진영만큼 휴식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스스로 휴식하겠다고 나섰다는 것은 시장이 그만큼 안정적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진영이 다시 움직일 때.

그때 다시 시장이 요동칠 때라고 생각했다.

이런 사실을 떠올리자 조지훈은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지난 몇 년 동안의 심한 등락으로 피로해진 시장이 이제 잠시나마 평화를 되찾는다는 것이 기쁘게 다가왔다.

한진영이 아픈 것도 아니고 시장이 잠잠해진다는 것에 만족한 조지훈은 눈을 감은 한진영이 잠이 들 때까지 곁을 지켰다.

그리고 한진영이 잠이 든 것을 확인한 뒤 담요를 덮어준 뒤 한진영의 곁에서 물러났다.

한진영과 조지훈의 대화가 끊기자 고요해진 비행기는 한진영 등을 태우고 서울을 향해 조용히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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