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0화 텐 빌리언 달러
한진영은 거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훑어봤다.
사실 곳을 따로 만들어 드렸는데도 굳이 한진영이 있는 곳에 찾아와 일일 드라마를 보시는 어머니와 아버지.
분명 세이지 내에 새로운 보직을 내려줬음에도 여전히 비서실 실장인 것처럼 한진영을 챙기는 조지훈.
이제는 방송 출연을 자제하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했는데도 불구하고 기회만 되면 방송에 나가고 싶어 하는 최석영.
회사 문제를 물어보기 위해 찾아왔다가 붙잡힌 홍대민과 조수아 그리고 나창운.
조용히 한쪽 끝에 앉아 힐끔거리고 있는 김준하.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모임 속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
“봐라. 어? 봤어?”
한진영은 호들갑을 떠는 이성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성우는 뉴스 끝자락에 자랑스러운 기업인 상을 받는 자기 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거실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자랑스러운 기업인 상. 저 상을 받은 사람 중에 30대는 나밖에 없었어. 아버님. 보셨어요? 어머님? 보셨죠? 저 보셨죠?”
소파에 앉아있는 한진영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신나서 이야기한 이성우는 그들의 곁에 앉았다.
“제가 이렇게 보여도 꽤 잘나가요. 어머님.”
누가 누구의 어머니인지 모르게는 모습을 보인 이성우를 보며 한진영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너는 왜 여기 있냐?”
“내가 여기 있는 게 이상해?”
“이상하지. 너는 너희 집도 있잖아.”
“나만 집 있냐? 어머님, 아버님도 집 있고, 여기 있는 지훈이, 최 과장님, 준하 다 집 있잖아.”
이성우의 말에 한진영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내가 말하는 집은 그게 아니고…… 왜 다른 회사 사장님께서 여기 와 계시냐 이 말이지.”
“내가 사장으로 온 게 아니잖아.”
“그럼 뭐로 왔는데?”
“어…… 친구?”
이성우는 한진영을 향해 환하게 웃고는 최석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가 최 과장님을 모르냐?”
이성우의 손가락은 이어서 조지훈과 김준하를 가리켰다.
“지훈이와 준하를 몰라?”
이성우는 곁에 앉아 있는 한진영의 어머니 팔짱을 끼고 말했다.
“어머님, 아버님이 나를 몰라? 내가 여기 있을 수도 있지.”
이성우는 한진영의 어머니에 머리를 살짝 기댄 뒤 한진영을 바라봤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다. 나 정말 섭섭해.”
이성우가 섭섭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내뱉자 한진영의 어머니가 그런 이성우의 역성을 들었다.
“그래. 성우가 여기 있을 수도 있지. 너는 왜 성우한테 뭐라고 하니? 너 없을 때 성우가 얼마나 우리를 챙겼는지 내가 이야기했지? 성우는 우리한테는 또 다른 아들이나 마찬가지야. 여기 있어도 돼.”
이성우는 자기를 위해 편을 들어준 한진영의 어머니를 향해 머리를 깊이 기댔다.
한진영의 어머니는 이성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진영에게 잔소리했다.
“성우 봐라. 얼마나 예뻐. 좋은 아가씨랑 결혼해서 애도 둘이나 낳고…… 그런데 어떻게 우리 집 자식은 결혼도 안 한 데다 만나는 아가씨도 없어. 성우야. 네가 소개 좀 해주면 안 되겠니?”
“어머니. 말씀도 마세요. 저뿐만이 아니에요. 저희 집사람도 얼마나 진영이한테 소개를 해주려고 노력하는지 몰라요.”
“그래?”
“그렇다니까요. 그런데도 자기가 저렇게 싫다고 하니 어쩔 수가 있어야죠. 아무래도 이번 생에 아버님 어머님은 손주 보시기는 어려우실 것 같으세요.”
한진영은 가만히 있다가는 대를 끊어놓는 가문의 수치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다. 알았어. 가자.”
“어? 뭐가 알았다는 거야?”
한진영 어머니에게 머리를 기대고 있던 이성우는 한진영의 알았다는 말에 머리를 들어 올리고 한진영을 올려다봤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안 와? 안 오면 말고…….”
한진영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봤다.
“우선 들어가서 이야기부터 마저 마무리하도록 하죠.”
조지훈과 달리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한진영의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들은 한진영의 말에 아무런 질문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진영은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을 돌아본 뒤 아버지와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저희 들어가서 일 이야기 좀 하고 나올게요.”
“어? 그래. 편하게 이야기해. 우리는 여기서 드라마 좀 보다가 졸리면 들어갈 테니까. 우리 신경은 쓰지 마.”
조금 전까지 결혼 이야기로 한진영을 압박하려던 한진영의 부모님은 자기들은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어서 들어가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리고 곁에 앉아 있는 이성우에게도 들어가라며 등을 밀었다.
한진영은 어정쩡하게 일어나는 이성우를 바라보고 다시 한번 물었다.
“진짜 안 올 거야?
“어? 가야지. 갈 거야.”
자리에서 일어난 이성우는 한진영의 뒤를 따라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회의실용 방으로 걸어갔다.
이성우는 회의실용 방 앞에 서서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알았어?”
“그럼 내가 모르겠냐?”
한진영의 대답에 머쓱하게 웃은 이성우는 방에 들어가 회의용 탁자 가장 끝에 자리하고 앉았다.
한진영은 이성우까지 자리에 모두 앉은 것을 확인하고 이성우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얼마가 필요해?”
“어?”
“그냥 바로 이야기해 괜히 이리저리 말 돌리면 시간만 아까울 뿐이니까. 이번에 새로 나온 독일 철강회사. 너희 그거 인수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냐?”
“알고 있었구나.”
이성우는 한진영이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세이지의 한진영이 모를 리가 없지. 맞아. 그거 우리가 인수하고 싶어. 그런데 금리 때문에 대출을 진행하기도 불편하고, 그렇다고 대출이 나온다는 보장도 없고…….”
“금리는 여기서 더 안 오를 거야.”
“뭐? 금리가 여기서 더 안 오른다고?”
“그래.”
이성우는 그걸 어떻게 아냐는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그러자 한진영의 곁에 앉아있는 조지훈이 한진영을 대신해서 대답했다.
“어제 연준 의장과 대화를 나누셨어요. 그리고 연준 의장에게 금리 인상을 자제하라는 말씀을 회장님께서 전하셨어요.”
“연준 의장에게…… 금리 인상을…… 자제하라고 했다고? 저기 있는 한 회장이? 그리고 그걸 연준 의장이 들어서 금리 인상을 멈출 거라고?”
이성우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며 자리에 앉아있는 최석영을 바라봤다.
최석영은 이성우의 시선이 이해가 간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냥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글자 그대로 생각해. 한 회장이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한테 금리 인상이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했고, 연준 의장은 한 회장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금리 인상을 멈춘다는 발표가…….”
최석영은 잠시 벽에 걸려 있는 달력을 바라보고 날짜를 확인한 뒤 다시 말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 모레 새벽에 발표될 거야.”
최석영의 설명을 들었지만, 여전히 이성우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답답했는지 곁에 앉아있던 김준하가 이성우의 옆구리를 찌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국 금리를 저기 있는 진영이가 결정해. 연준이 물어보고 진영이가 대답해 주고…… 그게 발표가 되고…….”
“뭐? 미국 금리를 진영이가 결정한다고?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그게…… 그렇게 됐어.”
이성우는 마치 오늘 저녁 반찬이 김치찌개로 결정됐다는 듯이 말하는 김준하를 어처구니없게 바라봤다.
한진영은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성우를 바라보고 말했다.
“20억 달러면 충분하지?”
김준하를 바라보고 있던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급히 고개를 돌렸다.
한진영은 그런 김준하를 향해 다시 한번 말했다.
“20억 달러면 독일의 철강회사를 인수하고도 남을 거야. 우리랑 반반 합작으로 인수한 뒤 10년 뒤에 너희가 모두 가지고 가는 거로 계약 체결해.”
“정말? 정말로 그렇게 해?”
“그래. 그렇게 되면 이자도 아낄 수 있고, 10년 동안 회사 운영하면서 노하우도 쌓일 테고…… 뭐 그동안 돈도 벌어서 우리한테 빌린 돈 다 갚을 수 있을 테니까. 그게 좋을 것 같아. 나 사장님.”
한진영이 나창운을 돌아보고 부르자 나창운은 바로 대답했다.
“네. 바로 준비해서 기풍과 계약 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진행되는 모습에 이성우가 기쁜 표정으로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고맙다.”
“고맙기는…… 친구 사이에 이 정도는 문제없지. 대신 앞으로 다시는 부모님께 내 결혼 이야기하지 마.”
“알았어. 내가 약속할게. 여기 사람들 다 있는 곳에서 맹세도 할 수 있어. 나 이성우는…….”
“됐어.”
손까지 들어 보인 이성우를 향해 한진영은 웃어 보이고는 자리에 있던 나창운과 조수아 등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두 사람은 바로 한진영의 집을 나서면 바로 일을 진행하겠다고 대답했다.
이성우의 문제가 끝이 나자 자연스럽게 최석영을 비롯하여 홍대민 등이 회사 문제를 한진영에게 물었다.
한진영은 그런 그들의 질문에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휴식을 선언한 한진영이었지만 여전히 한진영의 손길이 아직 세이지에는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회사 이야기가 한 바퀴 돌고 나자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이성우가 손을 번쩍 들었다.
“뭔데?”
한진영은 손을 쭉 뻗어 들어 올린 이성우를 바라봤다.
이성우는 한진영의 시선이 자기에게로 오자 지금까지 참았던 것을 묻기 시작했다.
“저기…… 이건 친구 사이에도 실례일 수 있는데…… 내가 뉴스에서 보고 궁금해 참을 수가 없어서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려고 하는데…….”
“그러니까 그게 뭔데? 그냥 물어봐.”
한진영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하자 이성우가 조금 전 부탁을 할 때와는 다른 머쓱한 표정으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저기 방송을 보니까 네 연봉이…… 텐 빌리언 달러라고 하던데…… 그게 정말이야? 연봉이 100억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10조? 그게 정말이야?”
“그게 그렇게 궁금했어?”
“궁금했지.”
이성우는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그렇지 않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진영을 향해 다시 물었다.
“100억 달러, 13조면 대기업이라고 부르는 회사들 연간 매출액 수준이야. 순이익도 아니라 매출이라고…… 그런 돈을 연봉으로 받는다는데 궁금한 게 당연하지.”
한진영은 이성우의 궁금증이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따지니까 궁금하기는 하겠다. 맞아. 올해 내 연봉 수준이 100억 달러야.”
한진영이 맞는다고 대답하자 이성우는 눈을 크게 떴다.
궁금증이 해소되면서 둑이 터지자 그동안 쌓여 있던 충격이 한꺼번에 몰아쳐 왔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은 연봉 1억을 목표로 삼았다.
연봉 10억은 대기업 임원들이나 받을 수 있는 꿈의 숫자로 통용됐다.
연봉 100억은 뉴스에서 나오는 기업 오너들만이 받을 수 있지 않겠냐고 생각할 뿐이었다.
1,000억부터는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1조를 받는 사람도 어디엔가 있지 않겠냐는 막연하게 생각하고는 했다.
자기 이름을 건 펀드를 출시한 자산운용사 회장들이 몇조를 벌었느니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그런 사람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한진영은 13조를…… 그것도 매년 받는다는 이야기에 이성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눈과 입을 벌린 채 한진영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성우의 시선을 받으며 가만히 웃고 있던 한진영은 최석영을 돌아봤다.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내가 한 회장에게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거 말하는 거지?’
‘네.’
‘솔직히 처음 이야기 들었을 때 많이 놀랐지. 텐 빌리언 달러라니? 누가 들어도 믿기 어려운 말이잖아. 그럼에도 난 믿었어. 한 회장이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야.’
‘정말이십니까? 아닌 것 같은데요?’
한진영의 눈이 웃고 있었다.
‘그래도 어쨌든 저는 해냈습니다.’
‘그래. 해낸 게 중요한 거지. 축하하네. 그 말도 안 되는 목표를 정말로 이루어냈으니 말이야.’
한진영과 최석영은 눈빛으로 대화했다.
최석영은 대단하다며 칭찬의 빛이 담긴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고, 한진영은 그런 최석영을 향해 자기와 대화를 기억해 줘서 감사하다는 눈짓을 건넸다.
두 사람은 웃는 얼굴로 서로의 눈을 한동안 바라봤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