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98. 응어리
“가…가람……쿨럭…!”
어느새 피로 끈적해진 바닥.
사방의 벽으로 피와 살점들이 튀어 그로테스크한 광경을 연출해 냈다.
간신히 숨이 붙어 있는 한아름의 말.
은가람은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표정으로…… 아니, 오히려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으로 쓰러진 그녀에게 다가섰다.
“이제 슬슬 죽지 그래?”
자신의 단도를 역으로 쥐는 은가람.
한아름이 떨리는 눈동자로 그에게 물었다.
“대체……왜…?”
“흐음……”
잠시간 말을 길게 끄는 은가람.
이미 타이머는 멈췄기에 그리 서두를 것도 없었다.
잠시간 고민하던 그는 마치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 간단한 대답을 내 놓았다.
“난 존나게 이기적인 사람이라서 말야.”
푸우욱!
*
“이거, 어쩔 수 없잖아? 너희들이 죽어야지.”
“……”
다소 차갑게 말을 내뱉는 은가람.
장내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말 없이 자신의 애검들을 꺼내는 일행들을 보며, 한아름은 미간을 좁혔다.
‘아냐…… 뭔가 이상해!’
이제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1분.
촉박한 시간 속에서 그녀는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그리고는 나지막히, 자신의 언니에게 질문을 던졌다.
“언니……? 만약 여기서 살아나가기 위해서라면 날 죽일 생각이야?”
즉각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흥! 아무리 동생이라고는 해도, 내가 내 목숨을 버려 가며……!”
그녀의 대답을 끝까지 듣지도 않는 한아름.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인벤토리에서 도끼를 꺼내들어, 한주희를 향해 휘둘렀다.
후우웅- 퍼컥!!
갑작스레 튀는 피의 향연.
“아름아!!”
“뭐…뭐 하는 거야?!”
갑작스레 돌변한 그녀의 행동에 일행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한아름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호했다.
“이제 슬슬 본성을 드러내시지? 니들이 가짜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뭐……?”
“그게 무슨 개소리야?!”
“말 그대로야. 내가 아는 은가람은, 상당히 이기적이긴 해도 너처럼 그런 쓰레기는 아니거든.”
“……”
“언니도 마찬가지야. 언니가 나를 죽이려 들 리 없어.”
─그리고 내 공격을 못 피할 리도 없고.
그렇게 덧붙이는 한아름.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은가람도, 한주희도.
차현화나 이현진, 은서현 할 것 없이 모든 일행들이 진짜가 아니라고.
그랬기에, 더이상 그녀의 눈에서 망설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면…… 감히 나를 가지고 논 니들을 어떻게 요리해 줘야 할까, 앙?!”
분노를 가득 실은 그녀의 도끼가 춤을 췄다.
*
“현진아.”
“어……?”
꽤나 낯이 익은 목소리.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그 음성에 현진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형?”
이곳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그런 의문이 잠시간 그의 머릿속에 생겨났다가, 서서히 지워져 갔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응? 뭐하다니…… 그야, 던전을……?”
“……?”
거기까지 대답하던 그는 묘한 위화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던전에 들어 올 일이 있었던가?”
어느새 주변은 서늘한 밤공기가 나도는 거리로 변해 있었다.
자신의 옆에서 발걸음을 맞추며, 현성은 웃음을 흘렸다.
“무슨 소리야? 왜 넋을 놓고 있어.”
“아……그러게…? 내가 왜 그랬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그는 현성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조금은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며, 괜한 그리움을 담아 왔다.
“그런데 형은…… 괜찮아?”
마음 속에 응어리져 있던 의문을, 결국 내뱉는 이현진.
자신이 왜 그런 질문을 건냈는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그는 형의 대답을 기다렸다.
“무슨 말이야?”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왠지 물어야만 할 것 같았어.”
“풋……그러냐.”
그에 현성은 옅게 웃음을 흘렸다.
한 손으로 현진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는 현성.
괜히 쑥쓰러운 감각에 현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버지랑은 좀 어때?”
잠시 후 현성이 그렇게 물었다.
“뭐가?”
“하긴, 아버지가 조금 고지식한 면이 있으시긴 하지. 세상에 몇 안되는 S급 헌터이시기도 하고. 무서워 해도 이상할 건 없어.”
“……어?”
“괜찮아. 나도 그러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무서워하는게 꼭 이상한 것만은 아니잖아?”
“……”
─조금 다르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이현진이었다.
물론, 이전까지 아버지라는 존재는 그에게 있어서 두려움의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통제하는 존재.
몇 안되는 S급 헌터이자, 진명 그룹의 회장.
그것이 자신이 바라보던 아버지의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도 그러냐고 묻는다면, 그는 고개를 저을 것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그는 자신의 아버지였다.
돌이켜 보면,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에는 늘 그가 함께 있었다.
자신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병문안을 와 준 것도 아버지였다.
“아버지를…… 그저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던 시절은 이미 지났어.”
“……응? 아, 그렇구나. 그래, 너도 이제 성장했……”
“그리고 기억났어.”
“……”
그는 현성의 말을 끊었다.
─아니, 현성을 닮은 무언가의 말을 끊었따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병원에 있던 그 날. 형은 죽었잖아?”
우뚝.
걸음을 옮기던 이현성의 발이 멈춰섰다.
“그래. 난 죽었지.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조금씩 변해 가는 현성의 얼굴.
그의 눈에서는 가느다란 핏줄기가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왜… 난 왜 죽어야만 했지? 네가 쓸데 없는 것에 관심만 안 가졌어도……”
“……”
“그랬다면 나도 살아 있었지 않았을까?”
욱신-
그의 말에 현진은 가슴 한 켠이 시리게 아파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칼로 도려내듯, 심장 한쪽이 아려왔다.
그럼에도, 그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말했다.
“그래, 그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랬다면, 아버지와의 관계도 그대로였을 것이고…… 나 스스로 여기까지 성장하지도 못했을 거야.”
“…결국 스스로의 성장을 위해서 나를 버린 거구나?”
“……”
덥썩!
현진의 어깨를 붙잡는 현성.
그는 한이 가득 맺힌 얼굴로 절규했다.
“네가……네가 날 죽인 거야. 결국 너 때문에 난 죽은 거라고!”
“아니. 형을 버린 게 아냐. 내가 어찌할 수 없었을 뿐이지.”
“넌 날 죽였어! 살인자……! 어떻게 형을…!!”
“형을 죽인 건 내가 아냐. 예전에는 자책감에 빠졌었지만,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어. 형을 죽인 건 그 놈들의 잘못이지,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한때는 죄책감에 빠져 허우적대던 시기도 있었다.
자신 때문에 형이 죽은 것은 아니었을까.
괜한 것에 관심을 가진 게 실수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아버지를 노렸던 코사 노스트라였다.
자신에게 먼저 접근해 온 것도 그들이었다.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 하며 일방적으로 당하고 사는 것은, 결코 이진명이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맞서 싸우려고 했던 것이다.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그는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아무런 소용 없어. 네놈이 그딴 식으로 나를 무너뜨리려고 해 봐도, 나는 무너지지 않을 거니까!”
촤앙!
자신의 애도를 꺼내드는 현진.
옅은 푸른 빛을 발하는 도신은 삼각수의 뿔로 만들어 진 것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내게 무기를 들이댈 수가……!”
“네가 그 모습이라서 더 확신할 수 있거든.”
피빗-!
옅은 섬광이, 현성의 목을 갈랐다.
*
“하여간 너무 뻔한 트릭이라니까?”
물론, 그렇다고 쉽게 간파가 가능한 것은 또 아니기는 했다.
특히나 처음 이런 함정을 접하게 되면 더 그랬다.
제 아무리 동료들간의 신뢰가 받쳐준다고는 해도, 쉽지 않은 결정임에는 분명할 테니까.
[그런 면에서 내가 크게 봐 준 거지. 후후.]
“……”
봐 주기는 얼어 뒤질.
조금 전의 일로 일시적인 스킬의 해방이 있었다.
물론, 그 중 대부분은 다시 원상복귀 되기는 했지만.
“그림자 갑주라…… 이 정도도 나쁘지는 않지.”
그럼에도 ‘그림자 갑주’라는 이름의 스킬 만은 여전히 개방된 채로 남아 있었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이미 침식은 시작된 것 같거든.]
“염병떨고 있네.”
침식은 무슨.
내 손에 망설임이 없던 건, 단순히 트랩의 패턴을 미리 간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질리도록 겪어 본 패턴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제 아무리 상위종의 도플갱어라고는 해도 완벽히 상대를 따라할 수는 없는 법.
사소한 그 차이를 잡아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후후…… 스스로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 아무튼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걸?]
꺼림찍한 그 말과 함께 놈은 입을 다물었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드는 새끼.”
나즈막하게 중얼거린다.
사실 이런 트랩의 경우, 단일 트랩 자체가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회귀 이전에도 이렇게 단일로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무서운 건 이런 것들이 반복되었을 때의 경우지.’
도플갱어에 대한 대처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거나, 동료들 간의 신뢰가 부족한 경우라면 치명적이었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려고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일 테니까.
실제로 이런 함정의 반복 끝에 서로를 죽이며 자멸한 길드도 여럿 존재했다.
‘아직 그런 길드가 생겨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끈적하게 피가 튄 작은 콜로세움을 지나, 한 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문을 향해 걸어갔다.
어쨌건 살아남은 인원은 나 혼자.
문은 열려 있었다.
*
은가람이 문을 열고 들어 온 곳에는 앞서보다 조금은 더 큰 방이 있었다.
여러 개의 문이 달린 방.
마찬가지로 원형에, 콜로세움과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자신이 나온 문이었다.
“설마 또 서로를 죽이니 뭐니 지랄을 떨진 않겠지?”
불쾌감에 그는 미간을 좁혔다.
자신이야 무리 없이 파훼할 수는 있었지만, 나머지 인원들까지 그럴 것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일단은 내가 가장 먼저 나온 것 같긴 하네. 과연 다른 방은 어떻게 하고 있으려나?”
그는 걸음을 옮겨 바로 옆 방의 문으로 다가섰다.
[진입 불가]
“……씨발, 가지가지 하네.”
하지만 역시나, 쉽게 문이 열리지는 않았다.
결국 기다리는 것 밖에는 답이 없는 상황.
기약 없는 기다림에 그가 한숨을 내쉴 때 즘, 반대편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섰다.
“아우! 진짜, 이 거지같은 던전은 누가! 만들어 놓은 건지! 하나도 마음에 드는게 없다니까?!”
“……현화 쌤, 하이요.”
잔뜩 신경질을 내며 씩씩대는 여성.
차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