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35화
“일?”
“그렇다. 쉘터에 들어온 이상 당신도 명백히 이곳의 주민. 그 사실을 부정하려는가?”
성진은 잠시 전령의 눈을 쳐다봤다. 후드를 눌러써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어떤 일입니까?”
“쉘터의 쉴드에 공백이 생긴 곳이 있다. 그곳을 잠시만 경계하면 되는 일이다.”
“······.”
함정일까?
성진은 이게 자신을 처리할 함정인지, 혹은 교주가 자신을 길들이려는 수작인지 의심했다.
‘근거가 빈약해.’
아직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괜히 대립각을 세우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고.
그리고 함정이나 길들이려는 수작질이어도 상관없었다. 상황판단이 이루어지면 언제든 응수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성진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되죠?”
전령이 성진의 대답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말했다.
“따라와라.”
성진은 전례복을 입은 전령을 따라 이동했다. 중간에 말을 걸어 무기고에서 보급하고 갈지 고민했지만, 당장에 경계에 사용할만한 무기는 충분했다.
그리고 자신 말고도 다른 각성자들이 편성된 것 같다.
“흥, 굼벵이처럼 느려 터졌군.”
“각성자라고 거들먹거리는 거지. 전형적인 초짜들 마음가짐이야.”
“어이, 올빼미라고 했나? 준비는 끝났나?”
성진이 말을 하기도 전에 저들 알아서 떠들어댔다. 성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잠시만 나갔다 오면 될 일이다. 이들의 조소는 성진에게 자극이 약했고, 눈에 띄는 행동을 할 생각도 없었으니 무시했다.
철그럭···
슈트를 입은 각성자는 총 셋.
“박재용이다. 참고로 이 경계조의 조장은 나니까 경어를 붙여.”
“안동광, 나랑은 가급적이면 말은 안 섞었으면 좋겠군.”
박재용, 안동광.
합류한 성진을 물고 뜯던 둘이다.
성진은 그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이들과 별로 친해 보이지 않는 청년이 성진을 보며 말했다.
“이민상이에요, 형.”
“올빼밉니다.”
교주에게 박형제라고 친근하게 불리었던 박재용, 그가 성진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콧방귀를 끼었다.
“흥, 빨리 가자고. 누가 늦게 온 덕분에 보급창고가 이미 박살 났을 수도 있으니까.”
성진은 가라앉은 눈으로 이들과 합류해 이동했다.
건물의 동을 몇 개 넘었고 승강기도 여러 번 타야 했다. 상당히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고, 그 과정에서 다시 한번 쉘터가 무지막지하게 거대하다는 걸 체감했다.
위이잉-
설치된 무빙워크에 올라 외부로 향했다. 그냥 걸어가도 될 노릇인데 박재용이란 자는 무빙워크에 가만히 선 채로 잡담을 나눴다.
“쯧, 방한슈트를 안 입어도 된다는 게 각성한 능력이라고? 그런 식이면 지나가던 개도 각성했겠네.”
“누가 아니래? 차라리 개새끼를 조에 넣어올 걸 그랬어. 그럼 말이라도 잘 듣지 않았을까?”
“크큭··· 이 사람, 말도 참 재밌게 하네.”
성진과 냉담한 청년은 그들과 조금 뒤에 떨어져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들릴 정도면 거의 고함을 치듯 잡담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일부러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신경 쓰지 마요.”
“무슨···.”
“신경 쓰지 말라고요. 저 아저씨들, 역겨운 건 여전하네. 개새끼라고? 하, 그러지 그랬나? 근데 그러면 비슷비슷한 놈들이라 목줄을 누구한테 채워야 할지 헷갈려서 곤란하긴 하겠네.”
정작 성진은 아무런 감흥도 없었는데 옆에 이민상이라는 청년이 대신 화를 내주었다. 문제는 이쪽도 무척 큰 소리로 떠들어서 앞서던 두 명이 들었다는 점.
모욕적인 내용이라 듣자마자 앞에서 고압적인 언성이 터져 나왔다.
“뭐?”
“시발, 너 뭐라 그랬냐?”
“아니 뭐, 못할 말 한 것도 아니고. 그렇잖아요? 나도 혼잣말 한 건데 왜들 난리래?”
이민상은 여유로웠다.
성진이 보기에 이들의 실력은 고만고만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강하게 나간다는 건 담력이 세거나, 싸움꾼의 기질이 있다는 거다.
“이 새끼가, 그냥 넘어가 줄려고 했더니···.”
“그냥 안 넘어가면 어쩔 건데요? 뭐 쏘기라도 하시게?”
철그럭- 철그럭-
걸음걸이도 요란하게 박재용은 이민상의 앞으로 걸어왔다. 바이저 밑으로 표정이 찌그러져 있고 호흡이 거칠다.
성진의 화를 돋우려고 시도한 사람치고는 화를 못 참는 성격이었다.
“···또 한 번 지껄여봐라.”
“하라면 누가 못하나? 개 목줄을 누구한테···.”
철컥-
휙-
박재용의 권총이 허리춤의 벨트에서 뽑혀 나왔다. 성진이 보기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릿한 동작이었지만, 혹시 사고가 일어날까 염려되어 한쪽 팔로 박재용의 팔을 잡아챘다.
팟-!
박재용의 권총이 이민상을 노리기에는 각도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성진의 팔이 바둥거리는 박재용의 팔을 붙잡고 미동조차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이거 안 놔? 오! 너부터 쏴줄까?”
뒤쪽에 서 있던 안동광도 권총을 뽑아 겁을 줄 작정이었는지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때, 성진의 입에서 낮게 깔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만하시죠, 조장님.”
“뭐?”
“그만하시라고요.”
흥분으로 고조됐던 분위기가 얼음보다 차갑게 가라앉았다.
박재용과 안동광은 성진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굳었다. 특히 박재용은 성진과 눈이 마주쳤는데, 교주의 옆에서 마주했던 눈빛이 다시 한번 박재용을 내려보고 있자 동공이 주체를 못 하고 흔들렸다.
무심한 눈빛.
그 눈빛에 박재용은 힘이 빠져 권총을 툭-하고 떨어트리고 말았다. 사자 앞에 놓인 사슴이 된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박재용과 안동광의 뇌리에 방한슈트를 입고 근력 보정을 받은 팔을 성진이 장비 없이 잡아채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근력 보정을 받았음에도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꿈쩍하지 않는 박재용의 팔. 박재용은 이 비범함을 이제야 눈치챘다.
위이잉-
무빙워크 움직이는 소리만 들리는 상황, 박재용이 고개를 아주 미미하게 끄덕였다.
성진은 천천히 그의 손을 놔주었다. 안동광은 권총을 집어넣고 옆으로 다가온 박재용과 함께 성진 일행과 거리를 조금 더 벌렸다. 그 둘은 구시렁거리며 다시 저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뭉개진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서 한참을 더 떠들 것처럼 보였다.
일행은 아무 말도 없이 무빙워크가 문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깨소금이네. 어휴. 근데 형, 좀 멋있네요?”
“사이가 안 좋은 겁니까?”
“말 놓으세요. 저보다 형인 것 같은데. 사이요? 좋을 리가. 각성자들끼리도 견제가 좀 심해야지. 다들 교주한테 잘 보이려고 꼬리 흔드는 것만 봐도 역겨워 죽겠어요.”
“그래? 근데 왜 굳이 교주에게 잘 보이려 하지?”
“그건···.”
“다 왔다! 잡담은 그쯤 하지?”
“쳇, 지들도 여태까지 떠들어 놓고선. 가요, 형.”
푸치익-
내부와의 단절을 위해 이중으로 되어있는 구조였는데, 굳게 닫힌 문의 손잡이를 일으켜 세워 밀자 문이 열렸다.
성진은 이젠 실내보다 오히려 야외가 익숙할 지경이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닌 모양이다.
“밖에 나오면 기분이 지랄 같다니까 진짜.”
“누가 아니래. 어이! 저기가 쉴드가 복구되고 있는 곳이다! 잘 따라와.”
“예. 갑니다, 가요.”
박재용은 이민상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트집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미 성진에게 한차례 제압당하기도 했고 다시 신경전을 벌이다간 그 눈과 다시 마주해야 할 것 같아서.
“엿 같네···.”
“음? 뭐라고?”
“아니야, 일단 한 번 둘러보고 반으로 나눠서 둘씩 맡자고.”
“그래, 그러자고.”
박재용은 조장의 위엄을 보여 서열정리에 들어가려 했으나 도리어 성진에게 위축되자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아마 교주가 쓸데없이 나섰다고 포상을 내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동하는 내내 박재용은 성진을 힐끔거렸다. 아까의 위압감은 대체 뭐였을까? 그냥 별거 없는 능력일 텐데··· 자신이 육체 강화형 능력이 아니긴 해도 어디 가서 약골 소리는 안 들어 왔는데··· 혹시나 해서 근력보정 기능이 꺼져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보정 기능엔 분명히 불이 들어와 있었다. 이번에 경계를 마치고 돌아간다면 슈트를 점검해 봐야겠다. 아무렴, 자신이 저런 놈팡이한테 밀린다는 게 말이 안 됐다.
박재용은 열이 뻗쳐왔지만, 그래도 조장 역할을 충실하게 하려 했다. 어차피 별로 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자,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경계구역이다. 보급창고는 다행히 식량은 아니고 잘 사용하지 않는 부수적인 물자들이지. 경계구역이 마침 반으로 나누기 딱 좋으니 거기 올빼미랑 둘은 저쪽을 경계해.”
“알겠습니다.”
“쳇, 대답은··· 어차피 시간만 죽이다가 들어갈 확률이 높다. 그냥 소형 몬스터 같은 쥐새끼나 숨어들지 않나 잘 확인해.”
“예이, 조장님.”
“이 새··· 하아, 쉴드 복구되는 거 확인하면 여기로 모이자고.”
성진은 이민상이란 청년과 딱 창고처럼 생긴 건물들 주위를 서성였다. 부산 최대의 쉘터답게 보급창고들은 항구의 하역장처럼 구획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성진이 그 구조들을 눈여겨보고 있던 차에, 이민상이 말을 걸어왔다.
“형은 좋겠네요, 나도 슈트같은 건 벗어버리고 싶은데.”
“그래?”
“그렇잖아요? 난 원래 겨울철에 싸돌아다니는 거 좋아했어요. 크리스마스에 여자친구 손 잡고 서면이나 이런 데 돌아다니면 기분이 이상하게 간질간질하더라고요.”
“여자친구는?”
“죽었어요. 대피 못 해서.”
“······.”
“소꿉친구였는데 걔네 엄마랑 우리 엄마랑 알아서 어떻게 가깝게 지내다 보니까 사귀게 됐어요. 걔네 엄마가 우리 사귀는 거 알고는 된장찌개 끓이다 말고 애호박 들고 저 쫓아온 거 알아요?”
성진이 미미한 미소를 띄웠다.
“뒤지게 맞았지. 애 울리면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들으면서···. 애호박에 맞으면서 울었다니까요? 멍도 진짜 안 빠져요.”
‘애호박 소드마스터인 줄’ 하고 말하는 이민상을 바라보았다.
고등학생 정도 나이나 되어 보이는 이민상에게도 종말과 관련된 사연이 있었다.
성진은 그 후로도 이민상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이 어느 고등학교를 나왔고, 각성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부모님도 종말에 휘말려 실종되셨는데, 아마 죽었을 거라는 얘기.
성진이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주자 이민상도 신이 나서 수다를 떨었다. 성진은 그런 이야기가 싫지 않았다.
“아! 형은 얘기할 거 없어요?”
“나? 글쎄···.”
“에이, 재미없게···. 그럼 물어볼 거 없어요? 나만 얘기하니까 흥이 안 나네.”
충분히 흥이 나서 떠들어 대던 이민상이었지만, 성진은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다. 물어볼 것이 좀 있었다.
“그럼, 뭐 하나만 물어보자.”
“예, 다 물어보세요.”
“각성자들은 왜 교주에게 호의적인 거야?”
“그 돼지 새끼한테요? 음··· 이건 저도 정확히는 몰라요. 근데 그 사이비 대장한테 잘 보이면 콩고물이 떨어지는 것 같던데··· 저는 안 그래도 찍혀서 교주가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잘 된 거죠, 뭐. 나도 근처에 가기 싫으니까.”
콩고물이라··· 사이비 교단이 벌일 만한 일들이 몇 가지 떠오르긴 했다. 만일 그것이 실제로 자행되고 있다면 성진은 조금 화가 날 것 같다.
이번에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신도들이 이상하다는 소문이 있던데, 정말이야?”
“아, 그놈들이요? 네. 진짜 이상해요. 진짜 더럽게 안 씻는지 가까이 가면 썩은 내가 진동한다니까요? 일부러 지나칠 때 숨 참고 가요. 흡!”
“그거 말고는?”
“그거 말고요? 음, 글쎄··· 잘 모르···.”
“끄아아아아아아악!”
성진과 이민상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박재용과 안동광이 경계하기로 한 방향이었다.
성진과 이민상의 눈이 교차했다.
“가, 가보죠!”
“그래.”
성진은 내달렸고, 이민상은 설상 기동을 작동했다. 이민상이 슈트의 보조를 받았음에도 성진과 속도가 비슷했다. 이민상이 감탄했지만, 성진은 전력을 다하지도 않았다.
성진과 이민상이 그간 걸어온 만큼을 되돌아간 것도 모자라 더 깊숙이 경계구역으로 들어갔는데, 재차 소리가 들려왔다.
“주, 죽어! 죽으라고!”
기이잉-
퍼어엉! 퍼어엉!
소총의 격발음.
이민상에게 박재용이 에너지 증폭 능력자라는 걸 들은 성진은 소총을 쏜 사람이 박재용이라는 걸 눈치챘다.
아무래도 적이 나타난 것 같다.
성진과 이민상이 서둘러 접근하려는 찰나, 경계를 맡은 두 명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투두두두두두두!
안동광이 소총 사격으로 무언가를 견제하고 있었다.
이제는 성진도 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2m는 훨씬 넘어 보이는 신장, 긴 팔다리. 이족 보행을 하고 민머리인 몬스터.
특이한 점은, 온몸이 불길에 휘감겨 있다는 것이다. 성진과는 거리가 벌어져 있는데도 그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허, 허억··· 사, 살려···.”
박재용은 그 거인의 한 손에 바이저를 붙잡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들어 올려진 박재용이 슈트 채로 흐믈흐믈 녹아내렸다.
“씨, 씨바알! 나, 난···.”
안동광이 아예 등까지 돌려 도망치려 하자 거인의 반대편 손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불길은 일직선으로 날아가 안동광의 등판에 적중했다.
콰아아-
“크어억···.”
안동광은 그 불길에 맞자마자 등판에 구멍이 뻥 뚫렸다.
성진이 거리가 멀어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몬스터에게 두 명이 살해 당했다. 누군가 성진의 손을 잡아끌어 창고 귀퉁이에 숨게 했다. 이민상이었다.
이민상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혀, 형 어떡해요? 다 주, 죽었어요. 우리도 죽는 거 아니에요?”
‘어떡하지··· 어떡해···.’라고 말하는 이민상의 바이저를 성진이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이민상이 그제야 성진의 눈을 바라봤다.
“민상아, 진정해.”
“하지만···.”
“여기서 뚫리면 거주구역이 금방이야. 저게 쉘터 안으로 들어서면 다 죽어.”
“혀엉!”
“너 무슨 능력자야?”
“저··· 가, 가속이요.”
“다행이네. 죽지는 않겠어.”
성진이 굽혔던 몸을 일으켰다. 몬스터가 어슬렁거리며 쉘터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형! 어쩌려고요!”
“막아야지.”
“저, 저는 도움도 안 될 텐데··· 총도 안 먹히는 거 보셨잖아요!”
“그래, 괜찮아.”
성진이 보급창고의 귀퉁이에서 툭하고 튀어나왔다.
“구으으···.”
몬스터가 성진을 인식했다.
아마도 이민상은 전투에 큰 도움이 안 되리라.
하지만 다행인 점은, 성진이 오히려 혼자서 싸우는 게 익숙하다는 점이다.
기이이이잉-
성진이 빼든 펌프 액션 샷건.
철컥-!
그리고 한 번의 펌핑.
성진이 몬스터를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