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는 종말에 적응했다-129화 (129/222)

# 129

129화

엄숙한 공간.

기사들의 성역(聖域)이나 다름없는 도시 카멜롯.

서부 대륙의 교역 중심지이자 서부 문화의 발상지이다.

비록 전통과 역사에서는 별자리 관이 카멜롯보다 윗줄에 놓이지만, 모든 부분을 고려했을 때 그 위상은 결코, 뒤처지지 않았다.

카멜롯의 궁정에 모여 있는 기사들.

아비규환이 되어 버린 동부와는 달리 이곳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달그락.

찻잔을 들어 올린 기사는 마시기 전, 잔에 담긴 향을 음미했다.

“훌륭해.”

“차가?”

“아니, 그녀 말이야.”

“최별…….”

“이 얼마나 훌륭한 기사의 풍모란 말인가! 부디 나와 결혼해 주었으면 좋겠건만.”

황홀한 표정을 짓는 미청년.

관련 없는 이와의 결혼을 함부로 입에 담는 그의 행동은 다소 가벼워 보였다.

그 때문인지 대다수는 미청년의 말에 관심이 없었고, 있다 하더라도 인상을 찡그릴 뿐이었다.

다부진 인상의 철탑 같은 사내가 미청년에게 말했다.

“건방 떨지 마라. 그녀는 비록 이전 세대일지라도 원탁의 기사다. 그녀를 모욕하지 마라.”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 하지 못하고 갖고 싶은 것을 가지고 싶다고 하지 못하니 그대의 삶도 그대의 검처럼 경직되어 있구나.”

“닥쳐라, 케이.”

“아, 그대의 아버지 영향도 있겠군.”

“……죽고 싶은가?”

미청년은 시종일관 갤러헤드를 약 올렸다.

“하하하…… 성질내지 말라고 친구, 같은 원탁끼리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

“모든 분쟁이 꼭 필요에 의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 네 주둥아리가 분쟁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단어의 조합이 험악하니 나는 그대와의 대화는 즐겁지가 않구나. 뭐, 가끔은 별식으로 즐길 만하지만.”

둘은 기세로는 싸울지언정 서로 언성을 높이진 않았다.

이곳은 함부로 자신을 증명하려 해서는 안 되는 곳이다.

끝없이 자신을 의심하고 되물어야 하는 곳이다.

이곳은 모두가 경쟁자이며, 결국 하나의 검에 무릎 꿇을 운명을 가진 이들이 모여든 곳.

태양의 원탁.

기사들은 이곳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기 위해 끝없이 단련하며 이름이 올라간 후에도 모두의 앞에 서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

“시시한 얘기뿐이군.”

“자주 보니 어쩔 수 없잖아?”

“네놈의 상판대기를 이렇게 짧은 주기로 봐야 하다니, 불운하다.”

“최별을 탓하라고. 우리가 이렇게 뻔질나게 모여야 하는 것은 다 그녀 때문이니까.”

이곳저곳에서 한마디씩 던졌다.

“동부는 혈만지 뭔지가 나타나서 난리라던데, 서부는 조용하기만 하네.”

“맹이 밀리는 건 의외인데…….”

“문제가 좀 심각한가 보더군. 협회에까지 지원을 요청했다 들었는데.”

“그 맹이? 하, 협회의 요청은 콧방귀도 안 뀌더니.”

“그건 원탁도 마찬가지잖나.”

“뭐, 그런가.”

잡담이 잠시 끊겼다.

모일 사람은 다 모였다.

“란슬롯은 오늘도 오지 않을 생각인가 본데.”

“그의 의중은 알 수 없으니까, 뭐. 딱히 필요한 것도 아니고 무시하자고.”

란슬롯은 전 세대의 인물이었다.

원탁은 세대교체를 성공적으로 이루어 냈다.

50년 전 영웅들이 활동했던 당시와는 달리 지금은 신세대가 그 이름을 물려받았다.

다만, 한 자리는 교체가 이뤄지지 않았다.

호수의 기사 란슬롯.

그는 여전히 전설로서 살아가고 있었다.

원탁의 자리는 총 13석.

‘위험한 13번째 자리.’를 제외하고 12석.

그중 아서의 자리는 공석이기에 11석.

최별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최별이 차지했던 위치는 ‘위험한 13번째 자리.’

원탁은 이 자리를 비워 두었다.

원탁의 조언자인 대마법사 멀린이 경고했다.

-이방인이 아닌 이 중, 이 자리의 주인을 자처하는 자는 참혹하게 죽을 것이다.

50년 전 영웅들은 사라졌고, 얼마 전 전이된 무능력한 이방인들은 결코 13번째 자리를 넘볼 수 없었다.

그러니 50년간 공석이었다.

정확히는 최별의 이름이 올라간 채로 시간이 흘렀다.

원탁의 힘은 원심력이다.

그 힘이 외부로 뻗치지 않고 내부에서 순환한다.

쉽게 말해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를 견제하느라 그 힘이 소모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서부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 원탁이 웅크리고 있기만 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철그럭.

갑옷의 이음새가 삐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기사 1명이 다가와 알렸다.

“멀린 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오늘은 조금 늦으셨군.”

“이걸 어쩌나? 주인공은 아직인데.”

“최별 님도 방금 도착하셨다고 성문에서 전해 왔습니다.”

“그래?”

저벅, 저벅.

외관은 서른을 넘지 않은 남자.

깔끔하게 머리를 쓸어 넘긴 마법사가 원탁에 다가왔다.

자리에 앉아 있던 모든 기사가 일어나 예를 취했다.

“오셨습니까, 멀린 님.”

“멀린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푸른 벽안의 멀린은 이들을 가볍게 쓸어 보고 원탁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에 답하고는 멍하니 허공을 보았다.

철컥, 철컥.

정돈된 걸음걸이.

발걸음이 모두의 귓가에 닿았다.

“왔군.”

구궁.

문을 열어 주는 이가 없어 혼자서 문을 열었다.

불꽃의 기사, 최별.

스스로 모든 것을 했지만, 그 모습이 어색하지 않고 당당했다.

케이가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저런 점! 저런 점이 매력적이라고.”

“앉아라.”

“아…… 정말 멋져.”

철컥, 철컥.

그녀는 머뭇거리지 않고 걸어와 그녀에게 배정된 좌석에 앉았다.

끼익.

투구를 벗은 그녀가 부스스해진 머리를 흔들었다.

“후우…… 늦어서 미안하네. 다들 잘 있었지?”

“대모님, 대모님께서 이대로 원래 세계로 돌아가신 것은 아닐까 얘기하던 중입니다.”

“대모는 무슨…….”

“아니지, 아니지요. 50년이나 전 시대에 살던 분 아니십니까? 스칸다에서 고작해야 100년도 살기 힘든 우리가 보기엔 지나치게 긴 세월입니다.”

대모라 추켜세웠지만, 과거의 인물이라 비꼬는 것이었다.

다소 불쾌한 어조였지만 최별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차피 영양가 없는 말다툼이고 그녀에게 경쟁자 천지인 이곳에서의 그런 말다툼은 독이었다.

그녀는 변함없이 타올랐다.

카멜롯에 도착한 후, 멀린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는 원탁의 시작을 함께한 자.

훌륭한 조언가이며, 공정한 조정자이다.

멀린은 원탁의 시작을 아는 자다.

항간에는 그가 원탁을 만들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는 최별이 돌아왔음을 확인하자, 기사들을 불러 모았다.

최별은 기사들에게 무려 50년 전의 인물이다.

기사들은 그녀가 쌓아 올렸던 업적과 그녀가 활동했을 당시의 주변 인물들이 퍼트렸던 이야기들을 들으며 자랐다.

그들로서는 최별의 등장이 동화책을 찢고 나타난 기사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멀린이 기사들을 소집했을 당시 절반은 우려를 표명했고 절반은 흥분했다.

그녀의 등장은 꽤 화제가 되었다.

그녀가 원탁을 상대로 무슨 얘기를 꺼낼지, 그것이 거부되었을 때 어떻게 행동할지가 그들의 중대한 관심사였다.

하지만, 뜻밖에도 최별의 행보에 제동을 건 사람은 멀린이었다.

-최별, 그대는 자격을 증명해야 합니다.

-자격? 난…….

-압니다. 그대와 그대의 추종자들이 과거에 자격을 증명했음을. 하지만, 그것은 반백 년도 더 된 일입니다.

-원탁이 변했다는 말입니까?

-원탁은 그대로입니다. 저는 원탁의 조정자로서 그대의 힘을 확인해야 합니다.

-내 힘?

-지금 그대의 곁에 누가 있죠? 그대를 따르던 사람들, 그대를 도우려던 조력자들. 이들은 전부 사라졌습니다.

-…….

-그대는 잿더미 위에서 오로지 자신의 힘을 증명해야 합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받아들이겠습니다.

최별도 멀린을 알았다.

멀린은 최별이 50년 전에 보았을 때도 저 모습 그대로였다.

늙지도, 무언가 욕구가 있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냥 원탁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사람.

세 가지 증명.

최별을 원탁의 기사로 받아들이는 데에 필요한 과정이었다.

기사들은 동의했고, 최별은 첫 번째 증명을 떠났다.

오늘 원탁의 기사들은 최별의 경과보고를 듣기 위해 소집되었다.

텅.

원탁에 보기 흉한 머리가 뒹굴었다.

절단면은 피가 마른 지 오래되었고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엔 허전함만이 자리한 사람의 머리.

최별이 물었다.

“사람을 잡아먹는 탈주 기사 베일턴. 이자가 맞습니까, 멀린?”

“팔라테인 지방에서 100명이 넘는 자가 죽었습니다. 흉수는 모두 한 사람이었고요.”

“묻습니다, 이자가 맞습니까?”

“……맞습니다. 첫 번째 증명을 하셨습니다.”

기사들이 감탄했다.

베일턴은 그 무력도 무력이었지만 강자답지 않게 도주에 능했다.

일을 벌이기 전에는 누구도 그가 그곳에 있었는지 알지 못했고, 일을 벌인 후에는 환영처럼 사라졌다.

케이가 웃었다.

“푸하하하하! 대모님! 정말 화끈하십니다!”

“어떻게 한 겁니까? 이자는 원탁에서도 몇 명이 나섰다가 꼬리를 잡지 못했던 자인데.”

최별이 어깨를 으쓱했다.

대답할 의무는 없었다.

화르륵.

멀린이 머리를 불태우자, 지독한 살인마의 흔적이 사라졌다.

멀린이 말했다.

“두 번째 증명은…….”

증명의 조건을 이야기하자 기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멀린, 증명의 내용이 정당한 겁니까?”

“이건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임무입니다.”

“우리가 모두 나서서 도우라는 의미?”

멀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증명에 나서는 것은 그녀뿐입니다. 다른 기사들의 조력은 금합니다.”

“하지만…….”

멀린의 말에는 따른다.

그것이 원탁의 원심력이 유지되는 이유였다.

수긍해야 했다.

최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별다른 불만을 표시하지 않자 기사들도 더 입을 열 수 없었다.

“한 가지.”

최별의 말에 멀린이 담담히 시선을 주었다.

“원탁에 속한 이가 아니라면 도움을 받아도 되는 겁니까?”

“얼마든지.”

“알겠습니다.”

그녀는 그 한마디면 만족한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다행입니다.”

***

성진이 씨앗을 삼키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깊은 잠에 빠진 이는 꿈을 꾸지 않는다.

성진도 잠에 빠진 상태였지만, 꿈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머야? 저러다 죽는 거 아니야?

-보름~ 한 달은 캡슐에서 안 나와도 문제없는 거로 아는뎅.

-오히려 건강해진다는 얘기도 있음.

-장수 마을 비결 : 종말 이후 플레이

-안에 갈아줘야 하는 거만 제때 갈아 주면 된다던데.

-그 뭐시기 섭종할 때 가상현실 사고 난 사람도 한창 난리였었잖아? 그 사람 아직도 못 깨어남?

-ㅇㅇ 머 한참 반짝했는데 여윽시 우리나라! 바로 잊혔쥬. ㅋㅋ

-그래도 보상 진짜 장난 아니게 해 줬다던데.

-지금 보상이 중요하냐? 사람 목숨이…….

-라기엔 초모 방송과 상관없는 주제쥬? 화제 돌리쥬? 국이 왜 이렇게 짜쥬?

‘아빠 자?’ 님이 1,000원 후원하셨습니다!

[자? TV 끈다?]

-아빠 안 잔ㄷ…… 드르렁~

-진짜 안 일어나네?

-아니, 잠방하면 정지 아님?

-그건 온라인 게임이나 그랬고. ㅋㅋ

-저번에는 심상 다 보여 주더만 갑자기 왜 부끄러워하는 거야!

-여전히 쉽지 않아, 당신…… 늘 설레…….

-우웩 토 쏠려, 너 연애 안 해 봤지?

-응…… 너도?

-나도!

며칠을 아무 반응 없이 보내자, 시청자들이 우수수 빠져 나갔다.

-이걸 보고 있는 내 인생이 레전드다.

-라기엔 너무 많은 사람이 보고 있었죠?

-어쩌면 이것은 초모의 최종 진화 형태일 수도 있다. 합법적인 소통 거부, 역시 천재야.

-어으 속 터져; 난 울산 등불 방송이나 보러 갈랜다.ㅋㅋ

-요즘에 울산 쪽도 후끈 달아올라서 그쪽 자주 봄. 큭크루컥커헉

-웃다 사레들렸넼ㅋㅋㅋ

‘식물 갤러리에서 왔습니다’ 님이 3,000원 후원하셨습니다!

[여기가 초모 꽃망울 터지는 거 기다리는 방 맞나요?]

-ㅖ 맞게 오셨습니다.

-진짜 식물 키우는 사람들 존경스럽다. ㅋㅋ 온종일 이것만 들여다보고 있는 거 아니여. ㄷㄷ

-아니거든. ㅡㅡ 하루는 아니거든! 그리고 다른 것도 하면서 들여다보거든!

-왜?

-식물이 부끄러워해서!

-식물 좋아하는 사람은 역시 순수해…… 나랑 결혼해 줄래?

-나 남잔데?

-식물 계속 좋아하렴, 난 이만.

채팅 창이 성진의 존재를 잊고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눌 때, 그가 깨어났다.

성진이 깨어난 장소는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소였다.

‘여기는…….’

씨앗을 삼키고 잠에 빠진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하지만, 깨어났을 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왜 이곳에서 깨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 나무…….’

거대한 청설모를 보았던 나무.

세종에 도착하기 전에 꾸었던 꿈에 나왔던 곳.

그곳이다.

‘청설모는 어디에…….’

자주 오면 적응하기 마련이다.

눈을 의심하게 만들던 경이로운 풍광도, 낯선 상황도 익숙해졌다.

오히려 수수께끼를 내는 청설모를 보고 싶었다.

그 미지의 존재에게 물어야 할 것이 산더미 같았다.

청설모는 곧 나타났다.

어느새, 성진의 옆에 앉아 튼실한 덩치를 자랑하며 끝없이 펼쳐진 여러 빛깔의 하늘을 보고 있었다.

-의문이 많겠지.

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묻고 싶은 게 여러 가지였다.

첫째로 세종은 왜 스칸다와 뒤섞여 버린 것일까.

둘째로 이마의 용 각인은 무엇일까.

셋째로 자신이 올 것을 예언한 예언자는 누구일까.

이 밖에도 궁금한 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지만, 물을 수 없었다.

여전히 말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해 줄 수가 없다. 그저 널 지켜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럼 자신을 왜 이곳으로 불렀을까.

-이것은 공정한 투쟁이다. 원하는 것을 지키기 위한, 또 신념을 관철하기 위한.

무슨 뜻 모를 소리인 건지.

-대혼란이 임박했다. 세상이 크게 흔들리기 전 마지막 승부다.

대혼란?

청설모는 여전히 하늘을 보고 있다.

-누가 이기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저 관객일 뿐인 내가 주관을 가지는 것은 무례한 것이니까. 다만, 모든 싸움이 끝난 후에 평화가 있기를, 그 평화가 세계뿐만 아니라 네게도 깃들기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진이 입에서 말이 나오자 놀랐다.

줄곧 시도했지만,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아 포기한 상태였다.

청설모가 거대한 고개를 돌려 성진을 응시했다.

그 눈빛은 별이자 우주였다.

-네 안의 세계를 가꾸어라. 그것은 결국 네가 고난을 헤쳐 나가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성진이 눈을 감았다 떴다.

역시나 큰 나무와 청설모, 그리고 다양한 색의 하늘은 사라졌다.

콰르릉.

자신의 심상이다.

또 다른 자신이 이 세계를 가꾸고 있었다.

들판은 꽃망울을 터트리고 지평선엔 푸른 대지가 이어졌다.

파지익!

화르륵.

낙뢰는 들판에 불을 만들었고 또 다른 자신이 서둘러 그 불을 껐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어쩐지 슬펐다.

-어? 연결됐당!

-형 어디 갔었어요. ㅠㅠ

-휴방한 거지? 나무 심는 척하고 몰래 집에서 애니 본 거잖아. ㅋㅋ

-이놈에 풀다이버들은 잡아낼 수가 없네. ㄷㄷ

성진이 원래 자신이 있던 위치로 갔다.

들판에 솟은 한 그루의 나무.

그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아 또 런한다.

-호흡 런 시작됐다. ㅋㅋㅋㅋ

-불평 있습니까, 코레안 휴먼? 호흡의 맛을 덜 보았군요.

-잘못했어! 우리가 잘못했다고! 돌아와!

-방장!!!!

성진이 크게 호흡했다.

저 먹구름 가득 낀 하늘을 치우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하늘의 호흡.’

어쩌면 하늘까지 자신의 영역을 늘릴 수 있다면, 하늘도 어찌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심상일 뿐일지라도.

성진의 흉부가 크게 부풀었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남은 호흡으로 하늘을 움직여 보았다.

미동도 없다.

크게 호흡했다.

그리고 다시 하늘을 움직여 보았다.

똑같다.

이 과정을 반복했다.

수를 세는 것도 무의미했다.

호흡을 모으고, 하늘을 움직이려 했다.

성진의 시간 개념은 이미 어그러진 지 오래였다.

아마 씨앗을 먹은 지 일주일은 넘지 않은 것 같은데, 그조차도 확실치 않았다.

‘어?’

이상한 감각.

하늘이 조금 움직였다.

성진은 침착하게 행동했다.

호흡을 모으고, 차분하게 하늘을 움직였다.

‘움직여…….’

신기하게 하늘이 움직였다.

조금씩, 조금씩.

-어? 님들; 저거 머임;;

-뭔데; 여기 날씨도 있었어?

-으? 머라거여?(잠크리트)

밀려나는 뇌운.

붉은 번개가 아쉬움이 남는지 혀를 날름거렸다.

성진이 힘을 주자 그 번개도 스르륵 사그라들었다.

밀려난 뇌운들 사이로 틈이 생겼다.

그 틈으로 막대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하늘이 열린 순간이다.

구름은 느리게, 하지만 착실하게 모습을 감추었다.

성진이 더는 하늘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떴다.

맑게 갠 하늘이 성진을 반겼다.

더는 붉은 벼락도, 쏟아지는 폭우도 없었다.

세계의 색이 조금 선명해졌다.

-초모가 해냈어. ㅠㅠ

-내색기! 짐승색기! 결국 해내다니!

-감-격 ㅠㅠ 축하의 의미로 엽떡 시켰다.

성진은 들판을 가꾸던 성진과 눈을 마주쳤다.

슬며시 미소 짓는 둘.

이곳은 더 이상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분심공으로 분화되었던 성진이 하나로 합쳐졌다.

그리고 성진도 서서히 사라져 갔다.

성진의 몸은 작은 먼지로 쪼개져 흩날렸다.

심상은 이제 언제든 그에게 쉼터가 되어 줄 것처럼 보였다.

꿈에서 깨어났다.

스르륵.

눈이 뜨였다.

“연자여.”

“……카이 님.”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느긋해 보이는 용인이다.

하지만, 그의 안색은 굳어 있었다.

“네 덕분에 사원을 감추는 진을 보수해야겠으니 이를 어찌할꼬.”

“그게 무슨…….”

“네 몸을 봐라.”

성진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나무처럼 변한 피부, 나무줄기가 치덕치덕 연결되어 어딘가로 이어져 있었다.

-아이엠 구르트……. (이게 뭐야?)

-ㅎㄷㄷ;; 잠깐만여; 제가 지금 멀 보고 있는 거죠?

-아 ㅋㅋ 서프라이즈 이벤트? 카이 제법이야~

뚝, 뚝.

그는 나무줄기를 몸에서 떼어 냈다.

피부에 다시 생기가 돌아왔다.

턱을 매만지니 수염이 많이 자라 있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건…….”

압도적인 존재감.

사원 전체를 뒤덮다시피 한 크기.

홍예와 레이서가 심었던 나무들은 성진의 나무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나무는 끝도 없이 좌우, 상하로 뻗쳐 있었고 산 아래에서 보더라도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거대했다.

“이런 흉악한 나무가 네 안에 있었다니. 나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

“물푸레나무의 수도사여, 뜻한 바는 이루었느냐?”

성진이 심은 나무를 물푸레나무라고 하는 것 같았다.

비록, 꿈에서 본 나무만큼 거대하진 않았지만, 성진의 나무는 그 나무와 닮았다.

그는 카이를 보았다.

카이를 바라보는 성진의 눈은 올곧았으며, 별처럼 빛났다.

“예, 그런 것 같습니다.”

“큭큭큭…… 네게 줄 것이 있다.”

그때, 호랑이가 달려왔다.

“앗! 카이 님! 미안해요! 이것부터!”

“아, 그렇지.”

성진에게 서찰이 전해졌다.

“무엇입니까?”

“네가 나무를 심는 사이, 특이한 새 1마리가 날아왔다.”

성진은 곧 그 새가 무엇인지 떠올랐다.

“혹시 하얀 그리핀…….”

“아니다. 훨씬 작은 새였어.”

“그럼…….”

“직접 읽어 보지 그러느냐?”

서찰의 귀퉁이를 찢어 내용물을 꺼냈다.

적혀 있는 내용의 앞부분은 이랬다.

-나 강오일세. 나를 기억하나? 그…… 똥자루 말이야. 이렇게…….

‘아.’

찾아온 새가 어떤 새인지 알 것 같았다.

-이 향만 찾아, 만 리를 날아가는 새가 있습니다. 제 소식은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서찰의 내용을 끝까지 확인한 성진이 카이에게 말했다.

“가야 합니다.”

***

일금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장주를 따르는 가신들이 함께였다.

일금이 포권하자, 마주한 이들도 포권했다.

맹의 수뇌부였다.

수뇌부 중 일부가 이곳에 왔다.

제갈 군사가 말했다.

“일금 님의 헌신에 감사를 표합니다. 천금이 혈교 사태의 주축 중 1명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어찌나 위험했는지…….”

“밤공기가 쌀쌀하군요. 천금, 그놈이 물자를 틀어막는 겁니까?”

“맹과 가장 큰 거래를 하던 자였습니다. 역시나……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 버렸군요.”

“참으로 흉한 일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훌륭하신 상인을 알게 됐으니 세상사가 꼭 시련만 내주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칭찬이 과하십니다. 상황은…….”

그때, 누군가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습격이다! 혈교 놈들이다!”

“정확히 보고하라!”

“혀, 혈수마녀(血手魔女)와 지옥도(地獄刀) 외 절정 고수가 다수 보입니다. 강시의 수는 못 해도…….”

“빌어먹을! 은신처가 발각되었다! 다들 물러나라! 미리 정해진…….”

제갈 군사가 지시를 내릴 때는 침묵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런데, 누군가 말을 막았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왜 그러느냐?”

“뭔가…… 뭔가 이상합니다.”

수하의 이상한 말에 수뇌부가 직접 망루에 올랐다.

적들의 수는 지금 따로 나와 있는 맹의 병력보다 훨씬 많았다.

하지만, 적들의 기세가 어딘가 정돈되어 있지 않았다.

혈교가 싸구려 낭인을 쓰지도 않을 것인데.

보통 이런 상황에서 오합지졸처럼 달려드는 상대를 보고 할 생각은 한 가지다.

“도망? 쫓기고 있어?”

“혈교가 누구에게?”

푸화악!

섬광이 번뜩였다.

“창황 어른이시다!”

“악전 님이 돌아오셨어!”

수하들이 소리친 방향에는 악전이 적들을 도살하고 있었다.

적의 수뇌들은 한쪽 팔이 잘렸거나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등,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제갈 군사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악전 님이 저들 모두를 감당할 수는 없다. 홀로 떠나신 분이 어떻게…… 아니, 그보다…….’

혈교의 병력이 도망을 치다니?

강한 재생력을 믿고 활개를 치던 자들이다.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모습도 오늘 처음 보았다.

“서, 설마…….”

“왜 그러시오?”

“그들이 온 것 같습니다! 싸워라! 저들의 수를 이곳에서 줄여야 한다!”

“와아아아아아!”

제갈의 지시에 은신처에 웅크리고 있던 병력이 일제히 튀어 나갔다.

도망치는 혈교 무리와는 반대로 기세는 정돈되었고 움직임은 일사불란했다.

졸지에 둘러싸이게 된 혈교 무리는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했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끄아아아악!”

“비, 비켜!”

혈교는 산비탈에서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한 채로 전멸했다.

이들을 지휘하던 자들은 원통한 표정으로 죽어 갔다.

“왜…… 대체…….”

수뇌부도 이제는 눈치챘다.

혈교를 도망치게 만들고 압도적인 힘으로 두려움에 떨게 한 저 흑의인들이 누구인지를.

“월인…….”

“악전…… 당신이 정말…….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오는군.”

악전이 수뇌부에게 이야기했다.

“귀인을 맞을 준비를 하시오.”

“……알겠습니다.”

무장한 흑의인들을 은신처 안으로 들였다.

등롱(燈籠)을 손에 쥔 등롱꾼들이 은신처의 정문부터 산길까지 이어서 좌우로 도열했다.

누군가를 맞이하기 위한 의식 같았다.

등롱이 바람에 흔들렸다.

저 멀리,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덟 명의 가마꾼이 짊어진 지붕이 없는 팔인교(八人轎).

그곳에 누군가 서 있었다.

“소, 송하린.”

무인들이 으르렁거렸다.

“지존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지 마시오.”

송하린은 가마에 서서 수뇌부를 보았다.

수뇌부는 표정을 굳히고 악전을 바라보았다.

악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것을 신호로 모두 송하린, 그녀에게 포권했다.

“귀인을 뵙습니다.”

“귀인을 뵙습니다.”

“귀인을 뵙습니다.”

그녀는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바람결에 그녀의 머리칼과 등롱들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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