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는 종말에 적응했다-162화 (162/222)

# 162

162화

-보면서 젖은 수건 짜듯 질질 짰습니다.

-눈 촉촉해진 거 봐. ㅠㅠ

-그래서 배구부 선배 어떻게 됐는데? 당연히 잘 안 됐지? 제발 그렇다고 해 줘!

-극한의 사이다 ㅋㅋㅋ

시청자들은 김상혁의 이야기에 울고 웃었다.

음탕과 왕이나는 울음에 화장이 번져 잠시 자리를 비우고 고치고 올 정도였다.

-하하하 하나도 안 슬퍼, 아, 사물이 왜 이렇게 흐릿하지? 난시인가?

-이런 거에 슬퍼하는 밀수들이 있냐? ㅉㅉ 한심하긴, 오랜만에 친구한테 전화나 한 통 해 볼까?

-나도…… 아, 이런! 난 친구가 원래 없었지?

-니가 제일 슬프잖아. ㅋㅋㅋㅋㅋ

‘님들 우리 큰일 남’ 님이 1,000원 후원하셨습니다!

[아직 진짜 슬픈 얘기 꺼내지도 않았는데 어캄?]

-맞다; 이거 자기소개였지;

-안녕하세요, 저희는 존나 슬픔입니다.

-꺼흑, 꺼흐흐흑 자기소개 개슬프자너 ㅠㅠ

-빨리! 빨리 말해 봐! ‘그 사건’을!

최혜연과 정재민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앞서 친구들과의 관계를 얘기할 때와는 달리 그 표정이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다.

김상혁이 얘기했다.

“우리는 스칸다의 서버 종료를 앞두고 기억에 남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다들 일이 바빠졌거든요.”

“아, 유학을 준비하신다던 친구분도 그렇고 확실히 바빠질 시기죠.”

“네. 비록 함께 즐거웠지만,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기에는 시간적으로, 일적으로도 어려웠으니까요.”

“이해해요.”

기념할 만한 일을 남기고 싶다.

그런 마음에서 시작한 일.

다 함께 시초의 유적을 돌파하는 것으로 이 추억을 끝마치고 싶었다.

추억에도 방점이 필요한 법이니까.

보통은 그것이 사진이 되고.

삑.

왕이나가 화면 한편에 사진 하나를 띄웠다.

정확히는 스크린샷이었다.

-웬 스샷?

-가만, 저거 좋은 친구들이네?

-어디서 찍은 거지?

-저거 시초의 유적 입구잖아.

“이유 없는 사막의 오벨리스크를 다 모아 유적의 입구를 개방했을 때의 사진이네요. 어떻게 구하셨어요?”

“재민 씨가 보내 주셨어요.”

“……그랬군요.”

“이렇게 사이 좋아 보이는데,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김상혁은 대답하기 위해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야 했다.

그는 인상을 쓰며 답했다.

“처음에는 모든 게 순조로웠어요. 비록 많은 함정과 고난이 있었고 힘든 부분들도 존재했지만, 마지막을 기념하기 위해 모두 시간을 내서 오랫동안 함께했으니까요. 또, 함께 손발을 맞춰 온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으니까.”

“그렇죠, 아무래도.”

“하지만…… 문제가 생겼었어요.”

김상혁은 그날을 떠올렸다.

***

“그러네, 정말. 시간이 부족해.”

“아무리 봐도 끝이 안 보여. 오늘 안에 공략이 가능할까?”

“음…… 아니, 끝까지 둘러보지는 못할 것 같네.”

“아오! 조금 일찍 도전할걸.”

“그러게 말이야.”

유적에 돌입한 초반에 길을 헤맨 것이 문제였다.

중심부에서 점차 멀어졌다는 것을 깨닫고 방향을 바꾸었을 땐, 이미 시간이 꽤 흐른 후였다.

곧, 서버 종료가 임박할 것이다.

김상혁이 말했다.

“가는 데까지 가 보자. 아쉽잖아.”

“그래, 유적 끝까지 가 보진 못하더라도 그 전에 중간 보스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중간 보스 잡다가 섭종 되면 어쩌지?”

“잠 못 자는 거지 뭐.”

심대형이 코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그래도 지금 우리한테는 최상의 버프가 걸려 있다.”

“그게 뭔데?”

“우리는 섭종을 앞둔 고인물들. 더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네! 사실 이때를 대비해 필살기를 아껴 뒀지.”

“그게 뭔데?”

“심대형 던지기.”

“음, 참으로 무서운 필살기야.”

“지랄.”

웃고 떠드는 사이,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함정을 돌파하면 할수록 정신적으로 지쳤고 그보다 더 힘든 것은 아무 수확도 없이 끝날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어?”

“왜?”

정재민이 바닥을 만지다가 뭔가를 깨달았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얘들아, 오빠가 중요한 정보를 알아낸 것 같다.”

심대형이 얼굴에 앙증맞은 표정을 하며 물었다.

“정말요, 옵빠?”

“죽인다.”

“아, 왜. 빨리 말해 줘.”

“싫어. 예지가 나한테 ‘꺄악, 재민 오빠는 정말 최고야.’라고 하면 바로 알려 줄게.”

송예지는 그런 대사와는 매치가 안 될 정도로 솔직한 편이었다.

내숭도 그만큼 없었고.

아마 그녀가 입을 열면 정재민에 대한 욕이 쏟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뒤에 몰래 숨은 김상혁이 복화술로 다른 말을 했다.

“꺄악, 재민 오빠는 정말 최고다! 최고!”

“……상혁이냐?”

“어, 어어…….”

“선 넘지 마라. 콤보 넣을 뻔했다.”

다시 또 히죽거리며 웃는 일행.

친구들끼리 모험가 활동을 하면 이런 점이 좋았다.

정재민이 얼굴을 굳히고 엄청난 사실을 얘기하듯이 말했다.

“뭔가 달라진 거 없어?”

“너? 일단 아까보다 못생겨졌어.”

“음, 확실히.”

“죽일까?”

정재민은 뒤를 가리켰다.

“살아 있는 모래가 없어졌잖아.”

“어? 진짜네?”

“에이, 우리만 졸졸 쫓아다니던데 뭐. 아마 화장실 간 거 아닐까? 조금만 지나면 올 것 같은데.”

“아냐, 아까부터 지금까지 계속 봤는데 안 오더라고.”

“앞질러 간 거 아니야?”

“어떻게 알았어?”

“엥?”

정재민이 상황을 설명했다.

“기척을 주시했는데, 모래가 저기 저 문 너머로 넘어간 것 같아.”

“그래?”

“근데, 문제는…… 하나가 아니야.”

“하나가 아니라고?”

“살아 있는 모래와 같은 기척이 수십 개는 저 문 너머에 있어.”

“음, 거짓말이 아니네. 정말이야.”

이들의 표정은 심각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밝아졌다.

많은 힘이 한데 모인다는 얘기는 곧 모험가들에겐 반가운 소식이었으니까.

“네임드다!”

“네임드네!”

고개를 끄덕거린 정재민이 설명했다.

“이 문 앞에 있는 건 네임드가 분명하겠지. 나 같은 성채남보석 도적은 이런 문 따위는 자다가도 열 수 있고.”

“그래도 시원하게 한 판하고 가겠네.”

“가자.”

후우.

정재민이 먼지 쌓인 문을 후후 불었다.

그곳엔 어떤 문자가 적혀 있었다.

“뭐라고 적혀 있는데?”

“몰라, 여기 유적에 아는 말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알겠…… 어?”

“어?”

“뭐지?”

-시에르는 영원히 이곳을 지키리라.

그들의 머릿속에 한 줄기 문구가 떠올랐다.

신기한 현상에 너도나도 놀랐다.

“너희도 보여?”

“신기하다, 역시 데자뷰! 칭찬해.”

“쩐다, 진짜 연출 미쳤어.”

“크, 이 좋은 걸 왜 섭종한다는 거야.”

“내 말이! 아오! 사장 머리털 다 뽑아 버리고 싶네.”

“근데 뭘 지킨다는 거지?”

“합리적 추론 발동!”

정재민이 탐정의 모습을 흉내 내더니 말했다.

“그거네. 무덤 지기.”

“그런 게 있어?”

“딱 봐도 왕릉 그런 거잖아? 당연히 지키는 게 있어야지.”

“적당하네. 가자.”

정재민이 노련하게 수를 쓰자 문이 덜컹거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줄곧 말이 없던 이선익이 말했다.

“애아 아 이아 이.”

내가 앞, 네가 뒤.

고개를 끄덕인 일행은 문 너머로 향했다.

그리고 좌절했다.

“뭐, 뭐야!”

“모래를 조심해!”

문 너머의 살아 있는 모래는 특이했다.

수많은 모래로 분화되었다가 또, 시에르가 있는 곳의 골렘에게 들어갔다가 하는 등의 변칙적인 행동을 반복했다.

또 그것 스스로 모양을 주먹으로 변해 후열을 후려치기도 했다.

서버 종료 30초 전.

이 공략은 실패다.

“나가! 뒤로 달려! 어차피 잡지는 못해!”

“문은?”

“열려 있어! 쭉 달려!”

일행은 이미 돌파했던 곳이 아닌 열려 있는 문으로만 내달렸다.

서버 종료 20초 전.

“모래가 막고 있어!”

“뚫어! 마력이랑 신성력도 바닥이야!”

“다 어디 있어!”

“헉, 헉…….”

서버 종료 10초 전.

철컹.

오다가 누군가 기관 장치를 건드린 것 같았다.

나가야 하는 출구가 닫히고 있었다.

서버 종료 5초 전.

“나가! 나가라고!”

3초 전.

“아…….”

파티의 가장 후열이었던 김상혁은 자신이 빠져나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아악.

자신을 노리고 오른쪽에서 살아 있는 모래가 쏘아져 들어왔다.

저것을 막으면, 빠져나갈 시간이 부족했고 무시하면 몸이 꿰뚫려 결국 즉사할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모두 빠져나갔으니까.

하지만, 김상혁은 이내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몸이 붕 들려서 문 너머로 세차게 날아갔다.

파아앙!

그리고 살아 있는 모래에 누군가 부딪히는 소리.

서둘러 뒤를 확인했다.

자신을 집어던진 건 이선익이었다.

이선익과 심대형이 방금 넘은 문 반대편에서 모래를 막았다.

2초 전.

“뭐, 뭐 하…….”

1초 전.

“이아 아, 애아 이.”

네가 앞, 내가 뒤.

이선익은 위기에 몰리면 반대로 행동하곤 했다.

“야아아!”

쿵.

문이 닫히고, 서버가 닫혔다.

이 세계 스칸다.

서버 종료.

***

“정말 좋은 동료였네요.”

“정말로 그랬어요.”

“그런데, 뒷얘기가…….”

김상혁은 조금씩 눈물을 흘렸다.

“선익이랑…… 대형이가…….”

“…….”

“깨어나질 않았어요…… 그 후로.”

시청자들이 언급했던 유저가 의식불명에 빠진 사건.

채팅 창에서는 정확한 얘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스칸다에서 빽섭이라도 난 거야?

-아, 근데 그때 안전을 위해 서버 종료 전에 안전한 장소에서 미리 종료해 달라고 하긴 했었어.

-그럼 쟤들 잘못이네

-넌씨눈?

-미안, 내 잘못이네.

-3초 사과 ㅇㅈ합니다.

“정신적인 문제가 발생한 건가요?”

“그게……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고 하더군요.”

“혹시 빠져나오지 못해서?”

“그건 아니에요. 혹시 멘탈 번이라고 아세요?”

“멘탈 번인은 아는데…….”

멘탈 번(Mental burn)과 멘탈 번인(Mental burn-in)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개념이었다.

-나도 나도 멘탈 번인은 아는뎅.

-멘탈 번 나 암.

-어쩌라고.

김상혁이 멘탈 번에 대해 설명했다.

“멘탈 번은 가상현실 사용자가 플레이 중 심대한 충격을 받았을 때, 정신이 흔들리는 것을 뜻해요.”

“한마디로 멘탈이 놀랐다는 거네요?”

“네, 근데 정도가 각각 달라요. 어떤 경우에는 그냥 놀라는 정도에 그치고 어떤 경우에는 신체에도 대미지가 가는 경우가 있어요.”

“설마…… 그것 때문에?”

“아마, 서버 종료와 맞물려서 선익이가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아요. 데자뷰와 연계된 병원에서도 그렇게 결론 내렸고요.”

사실상의 뇌졸중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일반 뇌졸중과 다른 점은 분명히 의식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캡슐에 연결된 사용자의 의식과 연결되지만 않았다는 점.

또한, 뇌졸중과는 달리 의식을 잃은 와중에도 추가적인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이런 경우가 분명 존재했고, 그에 따른 동의서도 회원 가입 때 받았나 봐요. 나중에 안 사실이긴 하지만.”

“그 말은 이런 경우가 흔하다는 건가요?”

“아뇨, 선익이와 대형이 이전에는 최장 기록이 몇 시간이었다고 해요. 근데…… 선익이와 대형이는…….”

두 사람은 스칸다가 종료되고 종말 이후가 서비스되는 이 시점까지 깨어나지 못했다.

채팅 창은 이 사연에 대한 분노를 데자뷰에게 쏟아 냈다.

-결국 데자뷰가 x새끼라는 거네?

-그렇네, 듣고 보니까 친구들이 이 겜만 안 했어도;;

-보상해라! 보상해! 보상할 때까지 잠 못 자!

음탕이 최혜연에게 물었다.

“어…… 그…… 제가 스칸다는 잘 몰라서 그런데, 혹시 보상은…….”

“받았어요. 넘치도록.”

“어떤 보상을 받았는지 혹시 여쭤봐도 될까요?”

최혜연이 설명했다.

“데자뷰와 연계된 병원에서 선익이와 대형이를 돌보기로 했고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해 준다고 했어요.”

“그것뿐인가요?”

“또 보상금이랑…… 진심 어린 사과도요.”

“보상금은 얼마나…….”

“그건 말씀 못 드리겠어요. 하지만 대략 선익이와 대형이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평생을 놀면서 살아도 될 금액이에요.”

정재민이 조용히 읊조렸다.

“그래요, 돌아오기만 한다면…….”

점점 분위기가 어두워지자 왕이나가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다들 많이 궁금해 하셨던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오늘 와 주신 게스트분들에게는 꽤 힘이 들어서요.”

“아, 그렇네요. 오늘은 유적 공략도 더는 진도를 뺄 것 같지는 않으니 이만 퇴근하죠! 아마 새벽 즈음에 다시 진행할 것 같은데 그때는 저만 나와서 진행하다 오전 중에 게스트 중 한 분이 함께하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 아쉬워 -3-

-나 쓈쒸매 ‘3’ 더 노라죵.

-밀수들아, 낄끼빠빠. ㅎㅎ

-얘 좀 보게?

왕이나와 음탕이 마무리 멘트를 하고 김상혁에게 물었다.

“이제, 아마 이렇게 전부 모시는 날은 공략이 끝나는 날일 텐데 혹시 그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실까요?”

“음…….”

“없으면 굳이 안 하셔도 되지만, 뭐…… 있잖아요?”

김상혁이 힘들게 입을 뗐다.

“……제가 그날 선익이와 대형이 대신 남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네?”

“아닙니다.”

김상혁은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파티의 리더답게 가장 나중에 나왔다면, 어쩌면 심대형과 이선익은 지금 함께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김상혁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

“형님! 돌 굴러갑니다!”

철컥!

서걱.

성진이 바위를 일검에 잘라 냈다.

그 절단면이 너무도 깔끔했다.

시초의 유적 탐험도 진척을 보였다.

점차 합이 맞아가자 기상천외한 파티가 만들어졌다.

-힐러2 검쓰레기1 도폐기물1

-놀랍게도 광역기는 힐러들한테만 있음. ㅋㅋ

-검 쓰레기도 광역기 있음. ㅡㅡ 아무튼 있음.

-도폐기물은 검 쓰레기 때문에 평가 절하된 거임!

-똥 묻은 놈이 똥 묻은 놈 나무라네!

살아 있는 모래는 둘로 늘어났다.

중간 중간 방심한 틈을 타서 모래가 일행을 습격해 왔다.

재밌는 점은, 일행을 쫓는 두 모래는 멀찍이서 지켜볼 뿐이었고 오히려 다른 모래들이 덤벼들었다.

성진은 크게 개의치 않고 길을 나아갔다.

그를 막는 것들은 주로 함정이었지만, 아닌 것들도 분명 존재했다.

콰아앙!

지금 마주한 바위 거인은 그저 유적을 장식하던 구조물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살아 있는 모래가 스며들자 생명이 깃든 것처럼 팔을 휘둘러 왔다.

이런 비생명체는 성진의 호흡도 크게 효용이 없었다.

콰앙!

“물!”

“알겠습니다!”

물이 주문을 외고 하늘로 팔을 뻗었다.

그러자, 물기둥이 형성되어 바위 거인의 몸 틈새를 적셨다.

바위 골렘은 그 공격을 우습게 생각했는지, 물을 무시하고 송하린을 노렸다.

하지만, 그것은 큰 패착이었다.

우득, 우드득.

바위 골렘의 몸 틈새로 나무가 자라났다.

나무는 성진이 미리 심어 둔 것이었다.

그으어어어.

팔이 기괴하게 꺾인 바위 거인은 이내 다리마저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쿠우웅.

“핵을 부숴!”

“알았소!”

베어가 소리치자, 송하린이 대꾸했다.

그녀의 일장에, 넘어지며 노출됐던 바위 거인의 핵이 산산이 부서졌다.

파작!

그으으으.

바위 거인은 마치 시체가 된 것처럼 축 늘어졌다.

송하린이 바위 거인의 시체에 올라서 투덜댔다.

“쓸데없이 맷집만 좋아서는.”

“……패턴이 있는 것 같은데.”

성진은 이곳까지 오며 살아 있는 모래가 계속 눈에 밟혔다.

지금도 그랬다.

사아악.

“어어?”

바위 거인에서 살아 있는 모래가 빠져 나와 어딘가로 사라졌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이런 식이었다.

살아 있는 모래는 아무래도 이 유적의 주요한 존재가 분명했다.

물론, 주요하다는 것이 성진 일행을 방해하는 의미에서였다.

-누가 조종하는 건가?

-ㄴㄴ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글고 점점 수가 많아져; 방금도 서너 개 합쳐서 들어간 거잖어.

-진짜네; 저 관음 모래 둘은 그대로인데 계속 늘어나잖어

-관음 모래. ㅋㅋㅋ

베어가 바닥에 널브러지며 말했다.

“하아, 이거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우리 형님이랑 함께인데도 성공하지 못하면 말이 안 되지.”

“다른 건 그렇다 쳐도 균열주가 문제요.”

“균열주?”

“협회와 지혜의 고리가 직접 나설 정도의 규모입니다. 물론, 성장한다는 점 때문에 더 주의하는 것이겠지만 아시다시피 시간이 꽤 지났습니다.”

“더 커졌을 거란 얘기군.”

베어는 고개를 끄덕이고 지도를 훑었다.

그가 만든 지도였다.

앞서 길을 통과하면서 그린 것인데 공간 지각력이 매우 뛰어난 듯, 성진이 머릿속에 그린 지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베어가 짧은 필기구로 뭔가를 슥슥 그렸다.

부우욱.

그는 방금 그린 종이를 찢어 일행에게 건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했다.

“자, 보십시오. 이게 뭔 것 같습니까?”

“사각형.”

“정확히.”

“정방형.”

“맞습니다, 정사각형입니다.”

“우리가 뺑뺑 돌았다는 얘기요?”

“아마도. 표식을 남기며 움직였으니까 맞을 거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유적이 움직이거나 특별한 작용을 한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성진은 내심 충격을 받았다.

최단 거리로 중심부까지 주파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모든 구역을 다 훑으며 가고 있었다.

-이런 무능한 색히들. ㅋㅋㅋ

-성채남보석 헛 달았네. ㅋㅋ

-그럴 거면 나 줘!

성진이 베어에게 물었다.

“도중에 가로지를 수 있었나요?”

“아닙니다, 반드시 지나쳐야만 하는 것 같습니다. 중간 중간 나타났던 문구를 해석하면 모르겠지만, 우린 그럴 수가 없잖습니까?”

“어쨌든, 잘 가고 있다는 얘기였군요.”

“그렇죠, 여기 제가 강조한 부분 보입니까?”

정방형의 약도에는 검은 공간이 꽤 크게 존재했다.

아직 일행이 가지 못한 곳이었다.

“여기에 균열이 있을 겁니다.”

“그래도 곧 도착하네요.”

“네, 이 문을 넘으면 제 생각엔 큰 공간이 하나 나올 겁니다.”

***

오늘의 게스트는 김상혁이었다.

왕이나는 자러 갔고 음탕이 방송을 진행했다.

거의 일주일 내내 방송을 진행했기 때문에 그녀는 처음과 달리 조금 찌들어 보였다.

“어…… 정말 약도를 보니까 그렇네요?”

“아마도 재민이보다 베어가 더 뛰어난 것 같네요.”

-갓 베어. ㅋㅋ

-JJM! 당신은 틀렸어!

-어차피 정해진 길 따라서 가는 거구나.

-모르지 또; 가는 길 달랐다고 하니까 들어갈 때마다 매번 달라지는지도 모르는 거자나.

김상혁이 부연 설명을 하고 있을 때 왕이나는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어차피 당장 급한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으니 잡담을 늘어놓아야 시청자들의 이탈을 막을 수 있었다.

“저, 아마 이번 방송으로 많은 분이 관심을 가져 주신 것 같아요!”

김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김상혁과 친구들의 안타까운 사연은 외국 레딧과 한국 팬사이트, 그리고 SNS 등으로 퍼져 나가 많은 이들을 울렸다.

좋은 친구들은 이것을 원했다.

이 일이 화제가 되어 잊히지 않기를.

이선익과 심대형이 친구들의 가슴에서 숨 쉬듯,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함께했으면 하고 바랐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잊힌다는 건 너무 가슴 아픈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많은 이들이 알게 되면 꼭 친구가 돌아올 것만 같았다.

삐이이.

‘또.’

이명 현상.

아니면 환각.

사실, 김상혁은 줄곧 멀쩡한 척했지만 멀쩡하지 않았다.

밤이면 친구들이 나오는 악몽을 꿨고 떨쳐 낸 듯 보였던 이선익의 어머니의 환각도 보았다.

아침이면 일어나 축축하게 젖은 이불을 갰고 친구들과의 만남도 피했다.

체중도 5키로나 빠졌다.

“……생각해 봤을 때…….”

음탕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말았다 했다.

얼마 전에는 정신과를 수시로 드나들었다.

우울증 초기 증상.

처방받은 약을 먹어도 가끔씩 멍해지는 이런 순간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마치 친구를 쓸쓸한 유적에 두고 온 그에게 주어진 형벌이자 낙인 같았다.

-선의 날개는 언젠가 자라서 멀리멀리 날아갈 수 있을 거야. 선익이는 밥도 잘 먹고 울지도 않고 씩씩하게 자라기만 하면…… 언젠가는 선익이 말도…… 흑…… 누가…… 귀담아들어…… 흑…… 줄 거고……

이럴 때 갑자기 선익이 어머니의 말은 왜 떠오르는지.

선익의 말을 귀담아들어 줄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왜 돌아오지 않는지.

심대형은 이번에도 친구를 구하기 위해 남은 건지.

뒤죽박죽이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

“김상혁 님?”

“…….”

“김상혁 님?”

“아, 네. 왜 그러시죠?”

“문이 열리려나 봐요! 네임드일까요?”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아닐 겁니다. 아마 이 문을 지나…… 문…… 문…….”

“네?”

“문이…… 이 문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했다.

저 문은 서버가 종료되며 함께 닫힌 문이었다.

김상혁이 이선익과 심대형을 잃은.

김상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왜 그러…… 어! 문이 열렸네요!”

드드드드.

문이 열리며 김상혁의 심장은 반으로 쪼개지고 있었다.

줄곧 아닐 거라며, 망상일 뿐이라고 거부했던 생각들.

하지만, 진실은 분명 존재했다.

“허억…… 허억…….”

“맙소사…….”

“허어억…… 허억…….”

“왜, 왜 그러세요?”

“부우우웁…….”

김상혁의 볼이 크게 부풀고,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해 황량했던 속을 게워 냈다.

“부웨에에에엑.”

김상혁은 바닥에 쓰러진 채로 헤엄쳤다.

토사물이 그의 팔을 적셨다.

음탕은 몸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셔츠를 풀어헤치며 소리쳤다.

“누가 좀! 누가 좀 도와주세요! 어, 어쩌지? 일단 119에 전화부터!”

음탕이 다급하게 다이얼을 누르는 사이 김상혁은 실신 직전이었다.

멀어져 가는 시야 너머로 그의 친구들이 보였다.

자신이 떠난 그곳에, 아직도 친구들은 남아 있었다.

단단한 돌이 되어.

이선익과 심대형은 웃는 얼굴 그대로 굳은 모습이었다.

-선의 날개는 언젠가 자라서 멀리멀리 날아갈 수 있을 거야.

모험가 협회 공식 랭킹 2위.

활금강(活金剛) ‘선의 날개.’

모험가 협회 공식 랭킹 3위.

활금강(活金剛) ‘큰형님’

“왜…… 왜…….”

‘왜 아직 거기 남아 있는 거야’라는 물음은 끝내 내뱉지 못하고 김상혁은 정신을 잃었다.

그의 친구들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그 자리에 쓸쓸히 남아 있었다.

아직 그곳에 남아,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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