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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는 종말에 적응했다-189화 (189/222)

189화

성진은 최별의 얼굴을 보고 내심 당황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성진의 모습을 살폈다.

“원래 이쪽 사람이었어요?”

“……원래가 언제부터를 말하는 겁니까?”

“아, 아무튼요! 그보다 이렇게 만났으니…….”

최별이 성진에게 반가움을 표하며 다가오려 했지만, 성진이 손을 뻗어 제지했다.

“무슨…….”

그의 행동에 다들 두려움을 내비쳤다.

엉성하게 덤벼들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펄스를 운용하고 있던 6인이었다.

그런 6인을 손쉽게 제압한 성진의 힘을 가볍게 여길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심지어 상대가 전력을 다한다는 느낌도 받지 못했다.

성진은 아직, 그들에게 확실한 아군이 아니었다.

“오, 올빼미 씨?”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오늘 새벽부터 출입이 통제되어 있었을 텐데 어떻게 잠입한…….”

“다! 다 말씀드릴게요. 일단은…….”

삐익.

-아, 이제 연결됐군. 초모, 들리나?

“……들립니다.”

성진이 인이어를 감싸 쥐고 심각한 눈으로 대답하자, 최별 일행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하하, 1팀장이 하도 연락을 안 돼서 말이야. 혹시…… 2팀장이랑 같이 있는 거 맞아?

성진에게 얻어맞고 벌러덩 드러누워 있는 한승철은 귀에서인이어가 빠져 있었다.

성진은 그에게 턱짓했다.

“……예? 아!”

한승철이 성진의 턱짓에 화들짝 놀라 빠진 인이어를 주워 자신의 귀에 꽂았다.

“아, 네. 기관장님! 1팀장 찾으셨습니까?”

한승철에게만 연결된 채널인지 그가 강부용과 대화하는 내용은 성진에게 들리지 않았다.

“아…… 네. 대원들은 따로 휴식 중이고…… 네, 네. 저는 현재 2팀장이랑 네, 네. 하하…….”

한승철은 성진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어차피 태반이 가려진 얼굴이었지만, 한승철은 성진이라는 존재 자체가 흥미로운 듯했다.

“네, 안면은…… 트기는 텄습니다. 하하하!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인사라도 하고 지낼 걸 그랬습니다.”

그의 말에는 뼈가 있었지만 그걸 알 리가 없는 강부용은 팀장끼리 교류하는 관계가 됐다는 것에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한승철이 아닌 성진에게 말을 붙였다.

-그래, 2팀장. 지금 그쪽으로 갈게.

“지금 이쪽으로 온다고 하신 겁니까?”

성진이 긴장 상태에 놓인 다른 이들을 쳐다보며 내뱉은 말에 다들 동공이 흔들렸다.

“……알겠습니다. 대원들과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삐익.

성진은 강부용과의 대화가 끊어지자 최별을 쳐다보았다.

“윽.”

“어, 어떡하지…….”

“일은 끝났어! 이제 여기서 빨리 나가야…….”

졸지에 성진의 의문이 담긴 눈빛을 감당하게 된 그들은 꾸물꾸물 망설이다가 최별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성진에게 말했다.

“우리를 놓아주세요.”

“……이유.”

“네?”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

최별과 다른 이들이 한 행동은 도둑질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것보다 더 엄중한 일이었다.

게이트 발생으로 인해 피난 권고가 내려진 곳에 침입한 것도 모자라서 그곳의 자료들을 외부로 유출하려 했으니까.

심지어, 그 자료들은 국가에서 귀중하게 생각하는 게이트 관련 연구소에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이곳은 재난 보호 기구와 긴밀한 협력 관계인 부산물 연구소와는 달리 독립된 조직으로 강부용의 관할도 아니었다.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제발 저희를 믿어 주세요! 조만간 따로 연락을 드릴게요!”

‘믿어?’

믿을 수 있을까.

이제껏 성진이 믿었던 사람은 신아름, 단 1명이었다.

성진의 성장 배경과 살아온 날들을 생각했을 때 다른 이들을 믿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성진은 임무 중에 다른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여태 상부의 지시는 최대한 이행하려 했고 그들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은 한 적이 없었다.

성진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왤까.’

스칸다에서의 기억들이, 그리고 종말 이후에서의 기억들이 그들을 믿고 싶게 만들었다.

삐익.

-어, 거의 다 왔어.

성진이 인이어를 잡았다.

***

잠시 후, 강부용이 전투복 차림으로 A섹터를 방문했다.

성진과 한승철이 대원들과 함께 그녀에게 경례했다.

“됐어, 무슨. 고생은 자기들이 다 했으면서.”

“오셨습니까.”

“그래, 둘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만 봐도 이 강부용은 든든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 그보다 아침부터 연구소 관련 일이 터져서 얼마나 노심초사한 줄 알아?”

“일은 다 해결된 겁니까?”

강부용의 전투복은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상태였고 땀 냄새도 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그녀 대신 전장을 뛰어다닌 것은 각성자들이었을 것이다.

성진은 그것을 고깝게 생각하지 않았다.

각자가 해야 하는 역할이 다를 뿐이었다.

“어떻게, A섹터는…….”

“네, 공간이 안정되었다고 판단했을 때부터 전력 차단 중지하고 연구원들에게 인계 대기 중입니다.”

“그래, 오고 있다고들 하더라고. 수고 많았어. 무슨 문제는 없었어?”

꿀꺽.

한승철이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침을 삼켰다.

그걸 놓칠 강부용이 아니었기에 그녀가 물었다.

“왜 그래, 1팀장? 무슨 일 있어? 꼭 잘못해서 혼나는 거 기다리는 사람처럼 왜 그래?”

“하, 하하…… 호, 혼나다니요.”

“일단 끝나고 팀원들이랑 다 같이 식사나 같이하자고. 각하께서 2세대 각성자인 팀장들에게 관심이 많아. 친히 나보고 잘 챙겨 주라는 식으로 얘기하셨어. 고로, 오늘 늦은 점심은 내가 예약한 곳으로 가자고.”

“팀원들도요?”

“그럼, 빼고 가는 것도 좀 그렇지? 아무튼, 준비들 하고 여기 인계하는 대로…… 응? 2팀장, 왜 그래? 무슨 할 말 있어 보이는데…… 나 뭐 말실수했나?”

강부용이 성진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말에 한승철이 식은땀을 흘리며 긴장했다.

여기서 성진이 다 털어 놓는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막막했다.

성진은 그런 그를 한번 쓱 훑어보고 강부용에게 말했다.

“조금…… 피곤하네요.”

“그, 그래? 식사는 그러면 복귀하고 주중에 할까?”

한승철이 성진의 말에 숨을 크게 내쉬었다.

강부용은 성진이 그렇게 얘기하자 그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성진은 최별과 그의 일행을 놓아주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무언가를 선택하고 있었다.

***

“오빠, 무슨 일 있었어?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찾아왔어?”

“그냥, 보고 싶어서.”

“어라? 진짜 무슨 일 있었나 본데……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닌데…….”

성진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신아름과 대화했다.

오늘은 특별한 일이 있었다.

원래의 성진이라면, 가상현실에 들어갔다 나온 성진이 아니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선택을 한 날이었다.

그래서 기분이 이상했다.

신아름의 얼굴을 보니 성진의 마음은 금세 풀어졌지만, 한편으로 불안감은 계속 가지고 있었다.

‘게이트가…….’

게이트 발생 예측이 너무 늦었다.

새벽에 알아차리고 오전에 작전에 들어갔으니 예측이라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이번엔 정부 산하 기관이었기에 망정이지 혹시라도 강남 한복판이나 번화가 주변이었다면 이렇게 곧바로 피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앞으로도 이렇다면 어쩌지?’

얼마 전부터 느끼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성진과 한승철이 게이트 발생을 감지하는 시점이 점점 뒤로 늦춰지고 있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오늘 있었던 일만 해도 조금만 늦었다면 피해가 있었을 텐데, 이보다 더 늦어 게이트 발생 직전에 알아챈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웃기는 점은 성진과 한승철이 미리 예견하는 것이 정부가 가진 최후의 수단이었다.

자신이 실패하면 정부가 실패하는 것이다.

그것은 곡 국가가 실패한다는 말과 동일시할 수 있었고 만일 그렇게 된다면 대한민국은 다시 혼란 상태에 접어들 것이다.

마음이 무거웠다.

신아름을 지키기 위해 잠시나마 국가에 몸을 의탁했지만, 역시 평생 신아름을 다치지 않게 지켜 준다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띵동.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

이제껏 성진의 집에 초인종을 누른 사람은 단 2명이었다.

신아름과 그녀의 어머니.

다른 이들은 성진의 집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고 알더라도 연락을 하고 찾아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왔을지는 뻔했다.

성진은 버튼을 눌러 현관을 보았다.

푸른 화면에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비해 허당이었던 사람.

국가 존속 기관의 1팀장, 한승철이었다.

-하하하, 열어 주세요! 2팀장님. 밤공기가 좀 쌀쌀하네요.

“…….”

-집에 계신 거 다 압니다. 저 이런 문 같은 거는 한 손으로 떼어 버릴 수 있어요. 물론 그랬다간 제 머리가 2팀장님 한 손에 떼어지겠지만.

‘열까?’

고민을 나눈다고 해결될까.

심지어 한승철과 연관된 사람들은 성진의 또 다른 고민이었다.

그들이 연구소에서 하던 행동은 무엇을 위한 행동이었을까.

불현듯,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몰라……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불법으로 게이트를 연구하던 그자들,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것은 자신이 제압했던 그자들이었다. 설마, 최별이 그런 사람들과 관련이 있기라도 한 것일까.

성진은 가만히 서서 생각하다, 한승철의 말에 현실로 돌아왔다.

-안 열어 주실 겁니까? 저도 나름 팀장입니다. 심지어 제가 선배라고요. 얼른…….

철컥.

문고리의 잠금이 풀리며 문이 열렸다.

“어? 지, 진짜 열어 주셨네? 아, 아무튼 일단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오세요.”

성진은 문을 열었다.

어쩌면 이 일련의 행위가 앞으로의 행보에 영향을 줄지도 몰랐지만, 그는 결국 문을 열었다.

최근 깨달은 것이 있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고.

홀로 국가 존립 기관을 선택했지만, 성진의 낙원을 향한 갈증을 해결할 순 없었다.

하지만, 함께라면 다르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생겼다.

한승철은 성진과 같은 건물에 살고 있었다.

그는 두루마리 휴지 번들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며 웃었다.

“늦었지만, 이사 온 거 축하합니다. 살기 좋은 곳이죠?”

“…….”

“슬리퍼 없나요?”

“네, 실내에서 슬리퍼는 신지 않습니다.”

“엇, 저도 그렇습니다! 하하하! 역시 통하는 면이 많네요.”

아직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지만, 한승철은 넉살 좋게 성진과의 대화를 주도했다.

아마 성진이 어떤 말을 해도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조명이 은은하게 손등을 비추는 홈 바에 걸터앉은 성진이 한승철에게 자리를 권했다.

누가 봐도 팀장끼리의 교류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연구실에서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그게…… 설명하자면 긴데…….”

“짧게, 최대한 짧게 설명해 보세요.”

“그래도 길지만, 최대한 짧게 핵심만 설명해 보겠습니다. 저…… 그런데 팀장님.”

“네.”

“저는 스마일 맨이라고 합니다.”

“…….”

“아, 활동명 말하는 겁니다. 미친 사람이 아닙니다. 팀장님 활동명은…… 설마 올…….”

“초모입니다.”

“이런! 어떻게 옆에 두고도 몰랐을까요? 하하하. 팬이었습니다.”

“팬? 나를 아십니까?”

“모를 리가 없잖습니까? 등불이 초모 님을 못 알아본다는 게 말이 안 되죠.”

“……등불?”

무언가 성진과 한승철 사이에 정보의 격차가 있었다.

도입부부터 성진이 모르는 얘기로 시작했다.

“모르고…… 계셨습니까?”

“뭘요?”

“2세대 각성자는 사실 전원이 등불입니다.”

“……그럴 수가.”

“놀랍게도 사실입니다. 저를 포함하여 그때 연구소에서 마주쳤던 사람들은 전원이 등불 소속이었습니다.”

등불이 2세대 각성자다.

‘어째서?’

찾아온 감정은 의문이 첫 번째였고 놀라움이 두 번째였다.

한승철은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성진을 보고 더 신이 나서 설명했다.

“2세대 각성자가 나타난 것은 한국뿐이에요. 거기다가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건 저희 둘뿐이죠.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적 없으신 가요?”

“이상하다니……. 아!”

한승철이 미소를 짓는 것과 반대로 성진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국존에서 접촉하던 2세대 각성자들이 하루아침에 연기처럼 사라진 점이나 그 후에 2세대 각성자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은 점.

이 모든 게 이상했다.

“2세대 각성자들은 설마 전부 모여 있는 겁니까?”

“정답입니다. 저를 빼고 전원이 똘똘 뭉쳐 뭔가를 하고 있죠.”

“어째서?”

일반인이 각성자가 되면 항상 그 힘으로 뭔가를 하려 했다.

이를테면 성진처럼 국가에 소속되어 능력을 제공하고 지원을 받는다든지 하는 것처럼.

그런데 등불은 각성자가 되어도 오히려 음지로 숨었다.

‘무슨 이유지?’

성진이 물었다.

“어째서 숨은 거죠?”

“하하하…… 그게 사정이 좀 있어서. 물론, 저처럼 철모르고 튀게 행동해서 걸렸던 친구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사태를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하긴.”

하루아침에 게임을 즐기던 일반인이 각성자가 되었다.

가장 먼저 만끽한 것은 전능함일 것이고 뒤를 따르는 것은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한승철은 그것을 말하고자 했다.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아니, 생각할 수밖에 없었죠. 이 게임은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우리가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

“초모 님은 알고 계셨죠? 게임과 현실이 다르지 않다는 걸?”

“짐작만 하고 있었습니다.”

“데자뷰와는 어떤 관계죠?”

“어떤 관계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저…… 그들이 서버가 문을 닫은 이후에도 저를 한 번 찾아왔다는 것…….”

“무슨 얘기를 나눴죠? 아니, 데자뷰는 무슨 얘기를 하던가요?”

이 부분은 계약한 내용이 아니었기에 말을 해도 상관은 없었다.

엄청나게 중요한 내용도 아니었으니.

“헬이라는 여자가…… 찾아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맞았어……. 석판에 적힌 말이 맞았어!”

“그게 무슨 소립니까? 석판이라니?”

“초, 초모님. 이 부분은 제가 설명할 만한 부분이 아닌 것 같아요. 저도 온전히 이해한 것이 아니라……. 조만간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무슨…… 그보다 두려워서 숨은 거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죠. 다른 세계에서 검을 휘두르며 용사가 되는 것은 분명 멋있는 일이죠. 하지만 그게 현실이 되어 다치고 죽는 일이 생긴다면, 그건 아직도 우리에게 낭만적인 일일까요?”

“……무서운 일이겠죠.”

성진과는 달리 이런 일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목숨을 걸고 뭔가를 하기엔 각오도,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

“전력으로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정부가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기도 전에. 물론 도중에 먼저 행동한 이들도 있긴 했지만, 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결국 저희와 합류했죠. 원래 사람은 비슷한 사람과 함께하기를 원하잖아요?”

각성자는 일반 사람들과 종 자체가 다르다.

신인류라고까지 불리는 자들이었고 그런 사람들이 일반인과 섞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이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어쩌면 자신과 똑같은 각성자들의 곁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2세대 각성자는 아예 처음 탄생한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모여서 뭘…… 아니, 연구소에서 무엇을 했는지부터 시작하죠. 연구소에서 뭘 하고 있던 겁니까?”

“얘기가 길어지네요. 음…… 어차피 제가 전부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건 아니니 이건 어떻습니까?”

“어떤…….”

“저희를 만나러 오시죠. 날짜와 장소는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그곳에 가면…….”

“초모 님의 의문은 대부분 풀릴 겁니다. 어떠한 해도 입히지 않는다고 약속하죠.”

“……알겠습니다.”

뭔가 엄청난 일에 휘말린 것 같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성진은 이제 상대가 등불이라는 것에 조금은 안심했고 경계도 많이 누그러졌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성진에게 이때를 노린 한승철이 말했다.

“다만…… 먼저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라고요?”

“네, 아주 중요한 것이죠. 우선, 이것을 봐주세요.”

“……이건?”

“네, 트렁크죠.”

한승철이 꺼낸 것은 남성용 사각 속옷이었다.

새것인지 아니면 열심히 세탁한 것인지 사용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는 진중한 어조로 성진에게 말했다.

“여기에 사인 부탁드립니다.”

“…….”

“팬이었습니다.”

“사인 같은 거 없는데…….”

“대충 써 주시면 됩니다. 그냥 일반적으로 하시는 사인이요, 네.”

성진이 매직을 찾아 사각 속옷의 귀퉁이에 사인을 했다.

“네, 거기 TO. 승철 적어 주시고 ‘승철TV 응원합니다’만 네, 네. 그렇게요. 중고나라에 안 올릴 겁니다. 믿으셔도 돼요. 아, 그리고 혹시 나중에 합동 방송은……. 네? 이제 나가라고요? 벌써요? 저녁은 드셨나요?”

***

성진은 아직 사막을 걷고 있었다.

그런 그를 해갈해 줄 무리가 오늘, 비밀스러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진은 황 기사가 따라붙으려던 것을 제지하고 홀로 차에 올랐다.

그으응.

황 기사가 운전할 때는 배기음조차 들리지 않던 차량이 성진이 운전대를 잡자 난폭하게 변했다.

끼이이.

주차장을 빠져나간 차량이 도로를 맹렬히 질주했다.

-영등포 쪽에…….

성진은 미리 전달받은 장소로 향하려 했다.

‘……음?’

그런데 차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성진은 곧 꼬리가 따라붙었다는 걸 눈치챘다.

‘누구지? 강부용? 한승철?’

대체 누가 자신을 감시하는 것일까.

당장에 별일이 일어나진 않겠지만, 기분이 나빴다.

영등포로 성진의 차량이 진입했다.

성진이 갑자기 속력을 높이자 따라붙던 검은 세단이 덩달아 타올랐다.

‘이런…… 아무래도…… 어?’

성진이 차량을 떼어 놓기가 쉽지 않음을 느끼고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찰나, 그가 급하게 우회전을 하자 왼쪽 차선에 있던 차량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빠아앙!

빵! 빵!

“너 뭐야! 이…….”

졸지에 성진을 바짝 쫓던 차량은 진로가 막혀 성진을 놓쳤다.

성진은 기분 좋게 사거리를 벗어났다.

미행 차량의 진로를 막은 운전자는 웃으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예, 예. 따돌린 것 같습니다. 지금 가고 있고요.”

“내려! 내리라고, 너!”

-수고했습니다.

“일단 지금 좀 바빠서, 이따 합류하겠습니다.”

그들이 그러든 말든, 성진은 약속 장소에 다다라 미행이 끝났다는 것을 확인하고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지하 주차장의 조그만 문을 통해 들어가자 비밀번호 패널이 나왔고, 그 앞에서 조금 기다리니 사람이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초, 초모 님.”

“……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삑삑삑.

성진은 비밀번호를 차근차근 누른 상대를 본 적은 없지만, 상대는 자신을 알고 있는 듯했다.

철컹.

조명이 어두컴컴한 승강기가 밑으로 향했다.

건물 표기에는 지하 1층이 끝으로 나와 있었는데 승강기는 그보다 아래로 내려갔다.

띵.

“도착했습니다, 초모 님.”

“…….”

스윽.

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어서 와요.”

붉은 기운의 최별.

그녀는 여전히 당차 보였다.

“형님!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캐릭터와 똑같은 송하린.

여기서 그녀를 보게 될 줄은 몰랐기에 성진은 조금 놀랐다.

그리고 나이 든 노년의 신사가 중절모를 벗고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최재국이라고 합니다.”

“저희 아버지세요.”

“안녕하십니까.”

뜬금없이 튀어나온 최별의 아버지란 말에 성진이 조금 당황했다.

등불과 최별의 아버지가 무슨 관련이 있다고 한 자리에 있는 것일까.

최재국은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환대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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