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성진은 순간 말문이 막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스칸다 때랑 같은 일이 일어난 거네.’
제아무리 신성을 이용하더라도 세계를 넘나들 때엔 불확실성의 연속이었다.
종말 이후의 시간이 5년이나 지나 있었을 줄은 몰랐지만, 아마 헤이드룬의 데자뷰가 한국 서버의 접속을 차단한 부작용인 것 같았다.
성진은 데자뷰가 한국 서버의 접속을 차단한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신성이 부족했겠지.’
종말 이후는 물론이고 스칸다까지.
가상현실이란 오버테크놀로지는 기술의 발전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데자뷰의 신성으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즉, 운영되는 날이 늘어날수록 가상현실이 데자뷰의 신성력을 좀먹고 있는 것이다.
데자뷰라는 이름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수많은 문명 세계에서 여러 번 사용했던 그들의 이름이었다.
데자뷰란 것이 처음 생겨나기 전, 최후의 계획을 수립할 당시 데자뷰에 속한 이들의 신성 잔량 예상치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다.
그런데, 지금 최후를 앞둔 그들의 신성은 당초 계획보다 훨씬 못 미치는 양이었다.
이래서는 계획의 이행조차 불투명한 상황.
그런 이유로 서버를 폐쇄했을 것이다.
그 부작용으로 다시금 시간이 어긋난 것일 테고.
그나마 다행인 점은 5년이면 그렇게 많은 것이 무너지진 않았을 거란 점이다.
“얘기를…… 5년의 얘기를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야…… 당연하죠. 그래도 조건은 있습니다.”
“조건?”
“당신도 당신의 얘기를 해 주세요. 5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최후에 한 발짝 다가선 지금, 숨길 필요도 숨길 이유도 이젠 없었다.
물론 제대로 말해 줘 봐야 믿지 않을 테니 적당히 각색을 해야겠지만.
“알겠습니다.”
“일단 가시죠. 가면서 얘기합시다. 욱아, 쉘터로 바로 쏘자.”
“선배, 쉘터에 외부인 함부로 들이면…… 이 사람이 올빼미인지 아닌지도…….”
“그냥 가자. 그 악마들이 평택까지 직접 내려왔겠냐? 사칭일 수는 있어도 그놈들은 아닐 거야.”
“……알겠어요. 일단 쉘터로 갈게요.”
철컥.
그으으응.
차량이 해가 저물어가는 어스름 녘을 달렸다.
“쉘터에서 운용되는 차량은 이것뿐입니까?”
“어…… 이건 쉘터 차량이 아닙니다.”
“그럼요?”
“평택에 대해 잘 모르시는군요. 아, 아니. 5년이나 지났으니 알 리가 없겠죠. 차근차근 설명 드리죠.”
장욱이 조필성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함부로 이런 것까지 말해도 될까요? 대장이 알아서 할 텐데…….”
“어차피 도착하면 바로 알게 될 텐데 뭐 어때. 운전이나 잘해, 쨔샤.”
“네이, 네이.”
조필성이 성진에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저희가 혁명군이라는 조직에 몸담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그러셨죠. 혁명군이란 말은 어디에서 온 겁니까?”
“하하하…… 무엇을 위한 혁명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이군요.”
장욱이 굳이 끼어들었다.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쉿, 배운 사람들끼리의 대화에 끼어들지 말도록.”
“허, 참.”
“아무튼, 종말이 일어난 후 생존자들은 한동안 무기력했죠. 하루하루 살아가기 버거웠고 늘 생존의 위협에 시달렸잖습니까.”
“그랬었죠. 다들 숨어 지내거나 목숨을 부지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겼으니까.”
부산과 대구가 그러했고, 다른 곳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와중, 이런 상황을 깨부수는 일이 발생하죠.”
성진은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거네.
-ㄹㅇ 그거밖에 없지. ㅋㅋ
-이걸 우리 입으로 듣자니 찝찝한뎈ㅋㅋ
조필성이 성진을 보고 얘기했다.
“바로, 부산의 해방.”
“…….”
“부산이 해방된 것은 단순히 우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비가 내리듯이요.”
처음엔 다들 그랬을 것이다.
부산의 해방에 관한 일은 빨리 퍼져 나가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대구…… 그리고 대전까지 해방되자 사람들은 생각한 겁니다. 이거……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게 아닌가하고.”
“그랬군요.”
“기우제를 지내 비가 내리게 만드는 거죠. 모두가 그 흐름에 동참했습니다. 하나둘, 울산과 광주가 해방되고 그 주변의 다른 지역들도 함께 자유를 되찾자 그 파도를 타고 모두가 한데 묶였습니다.”
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혁명군의 전신이지요. 무장을 갖췄고, 이미 정부는 사라졌으니 군이라 불러도 상관없었으니까요.”
“…….”
“그리고…… 많은 이들이 사라졌습니다.”
“……등불을 말하는 거군요.”
“당신도요. 세종과 광주를 기점으로 각성자들이 전부 사라졌습니다. 혁명군이 보유한 전력 중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었기에 타격이 좀 있었습니다.”
양들을 이끌던 목자가 갑자기 사라졌다.
목자는 어떠한 말도 남기지 않았고 양들은 버려졌다.
양들은 겁이 많고, 집단행동을 하는 생물이다.
그대로 남겨졌다면, 양들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숨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혁명군이란 이름으로 여전히 싸우고 있는 듯했다.
‘어째서지?’
“당신들이 사라졌다고 우리가 무너질 것이라 생각했습니까?”
“상황이 어떻게 흘러간 겁니까?”
“김정우 박사님을 비롯하여 수뇌부가 사람들을 이끌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두려워했지만, 결국 그분들을 따랐죠.”
부산, 대구, 대전 등.
그곳의 주민들을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두려움만 품고 있던 그들이 걸음을 뗄 수 있도록 도운 건 성진이었다.
조필성은 성진이 사라진 후에도, 그들이 계속 걸었다고 했다.
“혁명군은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5년 전, 당신들이 사라지고 나서도 계속됐죠.”
다행이다.
성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얘기를 하다 보니 궁금한 게 생겨 조필성에게 바로 물었다.
“혁명군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몰라서 물으십니까? 당연히 종말의 극복이죠. 아, 그리고 인류의 해방도…….”
“누구와 싸우는 거죠?”
“원래는 종말이라는 형태 없는 악마와 싸웠는데, 최근에 다른 적이 생겼습니다.”
성진의 눈빛이 변했다.
‘다른 적이라면…….’
그들밖에는 없었다.
“사도라는 괴상한 녀석들인데, 이놈들이 어떤 놈들이냐면…….”
“그만! 선배, 어디까지 얘기할 거예요? 속옷 색깔까지 얘기하게요?”
“빨간색!”
“왜 그렇게 화려한 색을…… 아니, 그게 아니라 다 왔다고요. 이제 쉘터 내부로 진입하니까 알아야 하는 것만 말해요.”
“벌써? 이런, 정말이네. 올빼미, 첫 질문이 뭐였죠?”
“쉘터에서 운용되는 차량이 이것뿐이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아, 평택 쉘터는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혁명군의 전선이 길어진 탓에 보급로가 필요했고, 평택은 그 중심을 맡은 물류 허브 정도 되죠. 때문에 각 지방 차량들이 수시로 드나듭니다. 이 차량도 전주에서 올라온 차량입니다.”
평택 물류 허브.
전선이 어디까지 길어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꽤 체계적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쉘터가 이렇게 큰 거군요?”
“네, 아마 쉘터 중에 제일 클 수도 있어요.”
“최전방에 있는 쉘터들은 작은 편입니까?”
“그건 저도 가 보질 못해서…… 크진 않겠죠?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사도들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어서요.”
“자세한 얘기는…….”
“안에 가서 들으시죠. 저희야 일개 보급대원이고 평택 쉘터를 관리하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또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곳은 길이 복잡한 편이니 대원 1명을 붙잡고 찾아가시는 게 시간을 아끼는 방법일 겁니다.”
차량이 지하에 자리 잡고, 성진은 그곳에서 합당한 절차를 거쳐 평택 쉘터로 진입했다.
내부는 거대한 공항에 온 것처럼 그 규모만으로도 압도적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했다.
그으으응.
그아앙.
“적재 공간이 부족합니다. 인원이 좀 빠질 때까지 차량 잠시 외부에…….”
“요 며칠 폭풍이 계속 돼서…….”
내부는 실랑이하는 사람, 웃고 떠드는 사람, 업무를 보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그것을 지켜본 성진은 처음과 비교했을 때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다.
부산에서는 다들 구조를 기다리는 피난민처럼 창백하고 불쌍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는데,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안에 언제 끝나?”
“곧! 몇 대 쳐 내면 외부 차량…….”
성진이 가만히 이방인의 신세로 그 모습을 우두커니 보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바이저를 쓴 그는, 성진에게 경례했다.
“반갑습니다. 혹시…….”
“네, 쉘터를 관리하시는 분을 좀 뵙고 싶은데요.”
“정말 올빼미 님이 맞으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저 기억 못하십니까?”
“네?”
“아, 기억 못 하실 만 합니다. 저야 먼 발치에서만 접했으니까요. 그리고 시간도 시간이니…….”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대구에서 올빼미 님 덕에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 이름은 김태호고요.”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성진이 그를 기억할리 만무했다.
애초에 만난 적도 없었으니까.
성진의 안내를 맡은 이는, 대구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슈트를 입은 이였다.
가장 용기 없던 남자가 이제는 전선에 나와 자연스러운 경례를 선보였다.
시간의 마법이었다.
물론, 그것을 제대로 느끼는 이는 당사자인 김태호밖에 없었지만.
“이, 이렇게 뵙게 되니 기분이 이상하네요. 꼭 어제 일처럼 선명한데…….”
“그렇습니까?”
“아, 제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나 보네요. 이쪽으로…… 쉘터장님께서 올빼미 님이 오셨다는 소식에 벌써부터 손을 떨고 계십니다.”
“쉘터장님이요? 제가 아는 분입니까?”
“아마도.”
-누굴까?
-석찬이?
-인혁이?
-갸들은 너무 어리자너.
-5년이나 지났는데?
-5년 지나도 어린 건 똑같아.
-으휴! 그런 고정 관념! 옳지 않아! 어려도 남들보다 뛰어날 수 있다고!
-너는?
-난 부모님 용돈 받아!
성진이 김태호와 함께 걸었다.
승강기를 몇 개 지나고, 검문소 같은 곳도 몇 곳 지나치고 나서야 김태호가 헛기침을 했다.
“오셨습니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문 열어 드리고 둘만 있게 해 줘.”
“예!”
삐.
끼이이익.
문이 열리고 성진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성대한 환대가 이어졌다.
“으하하하, 정말 오랜만입니다! 살아계실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건강하게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정차현…… 단장님?”
“하하하! 기억하시나 보네요?”
“……그럼요.”
대구에서 만났던 이다.
자경단원들을 이끌기도 했고 모든 이들을 대표해 강화 장갑을 입고 요르문간드의 시선을 끌었던 이.
대단히 용기 있는 자였고, 걸출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서로 같은 질문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안 그렇습니까?”
“……그러게요.”
“등불이 돌아왔단 소식이 이곳에 전해졌을 때, 다들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 다른 기대를 품었습니다. 당신이…… 당신이 돌아오지는 않을까 하고.”
“제가 뭐라고요…….”
정차현은 못 본 사이에 늙었다.
세월의 흐름보다 어려운 상황이 그의 주름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심지어는 얼굴에 흉터도 있었다.
“흉터는…….”
“별거 아닙니다. 사소한 문제였죠. 그보다, 몰라서 물으십니까?”
“네?”
“당신이 이 모든 물결을 만들어 낸 사람입니다. 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져 파문을 만들어 놓고 모른 척하시면 곤란합니다.”
“…….”
“우리는 당신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코 쓱.
-스칸다였으면 대신 유세떨었을 텐데. ㅋㅋ 종말 이후는 ㄹㅇ 올빼미 혼자 조졌잖어.
-사실 스칸다도…….
성진이 머쓱해져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웃음이 꽤 자연스러웠다.
“이제 보니 웃는 것도 느셨군요. 전에는 딱딱한 냉동 참치 같았었는데.”
“……그렇게 되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아, 소회는 여기까지 하고 일 얘기를 좀 해 볼까요? 일 때문에 돌아오신 것 맞습니까? 등불은 돌아오자마자 전선에 나서겠다고 하던데…….”
“맞습니다.”
-등불 근데 왜 방송 안 켬?
-ㄹㅇ 찔리는 거 있어서 그런가? 각성자 집단이 등불이라는 사실에?
-어차피 수원에 가면 모든 걸 알지 않을까?
-올빼미는 왜 입 다물고 있는데!!!!
정차현이 계속해서 설명했다.
“그럴 거라 짐작했습니다. 상황을 설명하겠습니다. 일단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대구 쉘터의 자경단장이었던 정차현이 이제는 평택의 쉘터장이 되어 성진에게 말했다.
“평택은 현재 군수 물자의 중심입니다. 서울을 되찾기 위한 전선, 그로 향하는 물자들을 다른 곳으로부터 건네받아 전선 적재적소에 보급합니다. 이곳이 작동한 이래로 계속 그래왔죠. 한데…….”
“문제가 생겼군요?”
“네, 맞습니다. 음…… 아니, 문제가 생겼다고 추정 중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지방에서 올라온 물자들이 평택까지 전부 도착하는 건 아닙니다. 도중에 문제가 발생하면 차량을 버리고 도주할 일도 생기고, 중간에 낙오하는 경우도 생기죠. 지역을 수복하기는 했지만, 모든 길이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몬스터는 보통 한 지역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다.
대구만 해도 몬스터에게 지상을 빼앗기고 지하에 숨어 살았었으니까 말이다.
“이 때문에 운행 과정에서 물자가 소실되곤 하는데, 우리는 총 보급 예정량과 운행 과정에서 소실된 물자량을 비교해 소실율이라고 합니다. 즉, 100을 보급하려고 했는데 30만 보급되었다면 소실율은 70인 거죠.”
“네.”
“근 5년간 월 평균 소실율이 50을 넘은 적이 없는데, 최근 2달간 소실율이 80에 육박합니다.”
“20%만 제대로 건네졌다는 얘기군요.”
“맞습니다. 최근 잦은 폭풍 때문인지 사도들의 수작질 때문인지 전선과 통신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원인도 모릅니다. 제 생각으로는…… 운행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은데…….”
성진은 정차현이 무엇을 부탁하려는 것인지 단박에 간파했다.
“저보고 운행을 함께 가 달라고 말씀하시는 거군요.”
“맞습니다. 이번 운행에서 모든 차량이 수원을 통과할 겁니다. 어차피 수원으로 올라가실 계획 아니었습니까?”
“네. 제가 따라붙죠.”
“후우…… 다행입니다. 원래는 병력을 동원해 보급 행렬을 지키려고 했지만, 근 2달간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요.”
어차피 곧바로 떠나야 할 상황이었으니 정보라도 얻고 가야 했다.
“사도들의 수작이라는 게 무슨 소리입니까?”
“사도라는 존재들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비교적 최근에요. 뭐, 악마 추종자라거나 사이비 집단이라고 생각했는데 벌이는 일들이 기이합니다.”
“어떤 일을…….”
“최전선의 몇몇 보급 기지가 놈들에게 습격당했습니다. 괴상한 점은, 인원들을 살해하고 물자만 가져간 게 아니라 인원들도 데리고 사라졌다는 것이죠.”
“납치?”
“뭐, 굳이 따지자면. 그리고 사도의 습격에는 특징이 있는데, 습격 전에 몸에 기이한 문신을 한 정신이상자가 쉘터에 미리 방문한다더군요.”
“그리고요?”
“펑! 하고 터진답니다. 그리고 기괴한 몬스터가 되어 쉘터의 방벽을 때려 부수기까지 하고요.”
“…….”
정차현이 방금 얘기한 자들은 완성자의 부산물이 아닐까 싶었다.
온전한 완성자라면 이성도 있을 것이고 몸에 문신 같은 건 없을 테니까.
“그렇군요…….”
“아무튼, 사도라는 작자들이 우리의 적이라는 건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진입하기를 원하는 서울에 틀어박혀서 뭔 짓을 벌이고 있으니까요.”
“그들의 동태는…….”
“모릅니다, 전혀. 어떻게 서울로 진입했는지도 모르겠고.”
“…….”
“도움이 못 돼 미안합니다. 사실 전방에 비해 여기는 정보가 조금 부족해서…… 물자 보급 건만으로도 인원들이 갈려 나가는 곳이니까요.”
정차현과 사람들은 충분히 힘을 내고 있었다.
잠시나마 그의 힘이 되어 줘야 했다.
“괜찮습니다. 수원으로 향하는 보급 일정이 언제로 잡혀 있죠?”
“어…… 그게…….”
정차현은 곤란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며 담배를 찾았다.
성진을 곁눈질하던 그가 말했다.
“지금…… 준비하셔야 할 겁니다…….”
“네?”
“새벽 운행으로 예정되어 있어서요.”
“굳이?”
“아시다시피 사정이 곤궁해서요…….”
정차현은 담배를 입에 물고 불도 못 붙인 채로 성진의 눈치만 살폈다.
성진이 피식 웃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오래 머무를 생각도 없었으니……. 이번에 수원에 도착하면 통신 문제도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역시 은인입니다. 올빼미!”
성진이 자리를 떴다.
끼이이익.
잠시 후, 문이 다시 열렸다.
쉘터장인 정차현의 실무 보좌관이 자리를 피해 있다가 온 것이었다.
그는 젊지만 유능했고, 비록 경험은 부족했지만 정차현의 신임을 받았다.
“그냥 증원을 보내는 게 어떻습니까?”
“지금 이곳저곳에 딸려 보낼 병력이 얼마나 많은데. 증원은 최소치로 보낼 수밖에 없어.”
“아무리 그래도…… 이러다 이번 운행도 실패하면…….”
“그럴 리가 없어. 이런, 불이 없네. 불 좀 있나?”
“여기요. 그만큼 저자가 대단한 사람입니까?”
딸칵.
정차현이 볼을 홀쭉이며 담배를 빨았다.
그가 거친 눈길로 보좌관을 훑었다.
“자네가 어디서 왔더라?”
“울산요.”
“아, 그래서 모르지?”
“저 사람을 알아야 하는 겁니까?”
“그럼, 아! 그런데 억지로 알 필요는 없어. 곧 알게 될 거거든.”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보좌관의 어깨에 손을 턱하고 올린 정차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봤어.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나는 걸. 이번에도 그렇게 되겠지.”
“저는 도무지…….”
“자넨 자네 할 일을 해. 그러면 돼. 그러면…….”
정차현이 창밖으로 쉘터의 거주민들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뭔가 바뀌어 있을 거야.”
***
-오자마자 떠난다니 피눈물 난다. ㅋㅋ
-??? : 네? 야외 취침이라고요? ㅎㅎ
-영웅이여! 퀘스트를 받아 주십시오! 이 퀘스트는 시간제한이 있습니다!
-ㄹㅇ 일정 타이트한 거 보소. ㅋㅋ
성진은 TK-28과 호환되는 배터리를 수급했고, 야전 식량과 다른 필수품들을 보급했다.
운행 준비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진을 찾아온 이가 있었다.
“반갑습니다. 이번에 수원 보급 행렬을 책임지게 된 박영준이라고 합니다.”
“올빼밉니다.”
“하하하, 알지요.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편제가 어떻게 되죠?”
“대형이 15대, 중형 20대, 소형 4대 출발합니다.”
“많네요. 호위 인원은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소형 4대라고…….”
“그것밖에 안 갑니까?”
“차량은 넘치는데 병력은 부족한 형국입니다. 평택이 사실상 지방을 지휘하는 상황이라 인원을 추가적으로 꾸릴 수가 없어요. 운전병 수도 겨우 맞춘 거라…….”
한마디로 성진 하나 믿고 배짱 부려 편성한 것이다.
이제야 난처해하던 정차현의 표정이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하지만 그걸 지금에 와서 알아챈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성진은 미소를 지으며 박영준을 안심시켰다.
“할 일이 많겠네요. 알겠습니다. 대신, 소형 차량 1대에는 저와 운전병을 제외하고는…….”
“네, 이미 그렇게 편제되어 있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출발은 지금입니까?”
“네! 가시죠.”
그으으응.
그아아아앙.
대형 보급 트럭들이 라이트를 켜고 출발 신호를 기다렸다.
일대의 몬스터들이 깨어났을 것이다.
아무리 조심하더라도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출발.”
-1번 차량 출발합니다.
-2번 차량, 오늘도 안전 운행!
인이어에서 아직은 활기찬 대답이 들려왔다.
그아아아앙!
산발적인 폭풍 때문에 젖은 노면.
촤아아악!
젖은 노면을 무거운 차량들이 질주했다.
-후방에 미확인…….
-확인. 대열 유지.
성진이 수신호하자, 운전병이 차량을 맨 뒤로 붙였다.
끼아아아악!
일전에 보았던 고릴라를 닮은 몬스터들이었다.
성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창밖으로 소총을 내밀었다.
기이이잉.
투웅.
투두둥.
몇 발의 탄환.
펄스가 담긴 탄환이 몬스터의 살가죽을 찢고 추격 의지를 꺾었다.
끼이익!
일전처럼 몇 번의 사격으로 적들을 쫓아낸 성진에게 행렬의 책임자인 박영준이 말했다.
-생각보다는 겁이 많은 친구들이네요.
성진이 나직이 대답했다.
“그러게요.”
그는 창밖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흉물스럽게 부서진 건물,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도시.
“후우…….”
입김을 뿜은 성진이 수신호하자, 차량이 다시 앞으로 따라붙기 시작했다.
등불이 머무는 수원.
그곳으로 지금, 보급품을 실은 차량과 함께 성진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