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7 제 60 장 - 서북풍(西北風) =========================================================================
그렇다고 소울은 절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의 예언대로라면 자신은 이미 죽었어야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맞아 떨어지는 예언 속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살아있었다.
이 말은 완벽했던 그녀의 예언이 이미 완벽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과 같았다.
그녀의 예언은 소울로 인해 이미 한번 깨져버렸다.
그렇다면 두 번이라고 깨지지 못할까?
2018년 1월31일까지 아직 충분한 시간이 있다.
우주의 상위 지성체라는 자들이 행성파괴무기로 지구를 한방에 날려버리는 짓 따위만 하지 않는다면, 그 사이에 얼마든지 소울넷에 보고를 하거나, 아니면 다른 그 어떤 방법을 찾아서라도 극적인 반전을 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소울은 속으로 대충 마음을 정리하자 유정아를 향해 ‘능력 & 잠재능력 확인’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자 곧바로 그녀의 머리 위로 말풍선 같이 생긴 것이 하나 떠올랐다.
[능력 & 잠재능력 확인 대상: 유정아
능력: 1. 뇌 활성화 2. 연금술사(S)]
그는 절로 입이 딱 벌어졌다.
놀랍게도 유정아가 ‘연금술사’ 라는 S급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뇌 활성화’라는 들어본 적도 없는 희귀 능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S급 능력자를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구나.’
태어나서 처음 보는 S급 능력자였다. 그리고 그 능력자가 지금 자신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소울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손에 넣기라도 한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이 자국의 S급 능력자를 전략무기처럼 취급해서 그들에 대한 정보 일체를 극비로 하고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미국 정부는 유정아가 S급 능력자인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면 절대 자국의 S급 능력자를 본국이 아닌 해외로 떠돌게 놓아두지 않았을 것이다.
‘가만 그럼 앞으로 정아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 거지?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사랑보다는 멀고 우정보다는 가까운 사이로 있어야 하나?’
두 사람 모두 서로의 몸에 끌리고 있다는 것은 인정했으니 지금처럼 육체적인 관계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믿을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건 것은 소울 자신이었고, 유정아는 그에 화답하여 자신의 가장 큰 비밀을 털어놓았다.
결국 소울이 그녀의 비밀을 듣고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두 사람의 관계가 재설정 될 것이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엘리스의 몸에 빙의한 우주의 상위 지성체라는 자들의 음모를 내가 막아야 한다는 건데……. 지구에 차원의 균열을 만들어 낸 것이 저들이라면 지구의 멸망을 이끌어내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야. 결국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유정아와 한 배를 타야한다는 말이 되는군.’
유정아가 S급 능력자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소울은 강한 소유욕을 느꼈다.
못 먹어도 ‘고(go)’ 라고, 진실을 몰랐으면 모를까 이미 알게 된 이상 유정아를 절대 다른 놈에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
그동안 보여준 유정아의 능력만으로도 ‘저게 사람인가?’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그녀가 S급의 능력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면 아마 전략무기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일들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이제 다 울었어?”
“응, 자기한테 이렇게 다 얘기하고 나니까 속이 후련해졌어.”
“다행이네. 이제 이런 엄청난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으니 우린 어쩔 수 없이 한 배를 타야겠지?”
“아마도 그래야겠지. 하지만 난 절대 자기 앞길을 막고 싶지는 않아. 그러니까 나 신경 쓰지 말고 사귀고 싶은 여자 있으면 사귀어도 돼.”
“그 말 진심이야?”
“응, 진심이야.”
진심이라고 말했지만 절대 진심이 아닌 것을 믿어달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펑펑 울고 난 유정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니 그녀의 정체를 알고 나자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녀의 비밀과 사정을 몰랐을 때는 단순히 사이코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비밀의 무게에 눌려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가여운 여자였다.
그래서일까? 소울의 눈에 보이는 유정아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순수한 영혼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미녀로 보였다.
“우린 이제 파트너인가?”
“응, 파트너 맞아.”
지금 이 순간, 소울이 생각하는 파트너의 의미와 유정아가 생각하는 파트너의 의미가 조금 달랐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제 평생 비밀을 공유해야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게 됐다.
“파트너로 부탁하는 거야.”
“부탁?”
소울이 대뜸 부탁을 한다고 하자 유정아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의문 부호가 가득한 눈동자로 그를 쳐다봤다.
“서머너즈 길드의 고문 역할 제대로 해줬으면 좋겠어?”
“고문 역할을?”
“돈은 벌만큼 벌었으니 이제부터는 나와 같이 엘리스의 몸에 빙의한 우주의 상위 지성체들의 지구 멸망 음모를 막아보자는 말이야.”
“아! 그러니까 나보고 이제 연구 좀 그만하고 서머너즈 길드가 커지는 것을 도와달라는 말이구나.”
“맞아. 정확해! 그리고 그게 아마 정아에게도 최선이 될 거야.”
유정아는 소울의 말에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지금 수백 가지 경우의 수를 계산하며 자신이 해야 할 행동과 우선순위를 정리하고 있었다.
“연구를 아예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야. 더 이상 돈을 쫓는 연구만 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살려서 지구를 지킬 수 있는 연구를 하라는 소리야.”
“자기가 그런 소리를 하니까 어째 안 어울린다.”
“케엑!”
소울은 그녀의 말에 순간 사래가 걸려버렸다. 기껏 그녀를 생각해서 얘기해줬더니 갑자기 봉창 두들기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유정아는 일어나서 켁켁 거리는 소울의 등을 몇 번 두들겨 줬다.
하얀 가슴이 눈앞에서 아른거리자 소울은 그녀의 몸을 잡아 눕히고는 자신의 눈을 보게 했다.
“정아처럼 머리가 좋은 사람이 내가 말하는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을 리가 없어. 잘 생각해봐! 저들의 음모를 막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두면 무슨 일이 생길지를……. 결국 지구가 멸망하고 말거야.”
“자기는 어떻게 내 말을 이렇게 100% 믿어줄 수 있는 거지?”
유정아가 날카로운 질문을 하자 소울은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하지만 소울넷 때문이라고는 절대 얘기할 수 없었다.
“직감이지. 그동안 정아와 살을 섞은 게 얼만데 농담과 진담을 구별하지 못하겠어.”
“그런가?”
“설마 지금까지 한 얘기가 전부 지어낸 얘기라고 말한다면 나 정말 실망할지도 몰라.”
“아, 아니야. 절대 그런 것은 아니야.”
눈치라면 소울도 지지 않는다. 그는 곧바로 역공을 시작해서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럼 돌아가신 양부모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봐! 지금까지 한 말이 모두 진실이라고 말이야.”
“뭐라고?”
좀 지나친 면은 없지 않았지만 이 정도는 해야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아 그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밀어붙였다.
“왜? 못하겠어?”
“…….”
“뭐야 이거? 지금까지 나 혼자 병신 짓 한 거야?”
유정아의 눈빛이 싸늘해지고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한손을 치켜들고 소울을 노려봤다.
“왜? 내 뺨이라도 치게? 내가 뭘 잘못했는데?”
소울의 말에 유정아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손을 내렸다.
“휴우, 아니다. 자기는 잘못 없어. 하지만 다시는 내 앞에서 양부모를 모욕하지 행동은 하지 말아줘.”
“양부모의 이름을 걸고 네가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맹세하라는 것이 너의 양부모를 모욕한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맹세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걸고 하는 거야. 그런 너는 나한테 푸티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라고 하지 않았어?”
한때 인터넷에서 키보드 배틀로 꽤나 이름을 날린 적이 있는 소울이었다.
물리, 수학, 과학 같은 지식을 논하라면 모를까 논리를 비틀고 궤변을 늘어놓으며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어 멘탈을 부셔버리는 짓이라면 이가 갈리도록 해봤다.
천재적인 두뇌와 아름다운 외모로 사람들이 떠받치고 우러러 보는 시선에 익숙한 유정아와 하는 말장난이라면 소울은 절대로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몇 마디 말이 더 왔다가자 유정아는 곧 자신이 소울의 따귀를 때릴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말이 안 되는 소울의 억지와 빈틈도 그냥 넘어가주고 말았다. 아니 오히려 사과까지 했다.
“자기가 양부모 이야기를 갑자기 꺼내서 내가 좀 예민해졌던 것 같아. 미안해. 사과할게.”
“그 사과 받아들이지.”
“오늘 내가 자기에게 한 말 모두 벤과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걸고 진실임을 맹세해! 그러니까 이제 다시는 의심하지 말아줘!”
유정아는 간절한 표정으로 소울을 쳐다봤다. 소울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의심 같은 것은 아예 하지도 않았어. 그건 정아가 하려고 했지. 난 정아 말을 그대로 믿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했을 뿐이야.”
“그렇구나. 그럼 더욱 미안하게 됐네?”
“미안하다는 말은 더 이상 하지 말자. 이미 우리는 한 배를 탄 파트너야. 미안하다는 말 보다 앞으로 어떻게 이 사태를 해결해 나가느냐에 더욱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자기 말이 전부 맞아. 난 그동안 겁쟁이였어. 어떻게 해야 그들을 막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해서 히스테리만 부렸고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고 안하무인으로 깔아뭉갰지. 하지만 자기 말을 듣고 보니 이제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 같아.”
유정아는 소울의 몇 마디 말에 큰 깨달음을 얻었는지 머릿속으로 어떻게 하면 그들의 음모를 분쇄할지 할 수 있는지 모든 방법을 다 계산해보고 있는 중이었다.
소울은 유정아가 자신이 그녀의 말을 100% 믿는 것에 대한 의심을 거두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그녀를 이용할 방법을 생각했다.
“내 생각엔 엘리사의 몸에 빙의를 한 자들은 분명히 차원의 균열을 이용해서 뭔가 계속 일을 꾸밀 거야. 몇 번의 몬스터 웨이브를 통해 이미 그들은 차원의 균열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테니까 말이야.”
“엘리스의 몸에 빙의를 한 자들이라는 말 대신 그냥 ‘엘리언’ 이라고 부르자. 그게 비밀을 유지하는데 더 효과적이겠어.”
“엘리언? 에일리언? 말이 아주 비슷하네. 좋아. 그렇게 하자.”
엘리스의 몸에 빙의한 자라는 의미로 엘리언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에일리언이라는 말이 외계인을 뜻하니 그렇게 중의적으로 엘리언을 해석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들이 왜 지구를 노리는 거지?”
“그건 모르지. 그걸 알았다면 이런 고민 자체를 할 필요가 없잖아.”
“그래도 그들이 왜 지구를 노리는 지는 꼭 알아 내야해.”
“맞아. 그건 나도 동의해. 하지만 당장 그것을 알 방법을 모르니,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면 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그게 뭔데?”
“서머너즈 길드를 키워서 실제적인 힘을 가지는 것이지.”
“서머너즈 길드를 키워서 힘을 가진다고?”
유정아는 소울이 한 서머너즈 길드를 키운다는 의미를 여러 가지로 해석해보고 있었다.
“당연하지. 하지만 그 구체적인 방법을 의논하려면 먼저 정아가 서머너즈 길드의 고문직을 제대로 수행해야해. 당연히 나와 서머너즈에 충성맹세도 해야 하고. 그래야 안심하고 모든 계획을 공유할 수 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이 왜 안 돼? 내가 정아보고 지금 평생 충성하라고 했어? 엘리사의 몸에 빙의한 자들의 음모를 부술 때까지만 임시로 서머너즈 길드에 적을 두고 같이 힘을 합치자는 얘기잖아. 한 배를 탔다는 말은 그냥 입으로만 하는 말이었어? 아니면 내가 정아의 연구소의 부소장이라도 할까?”
그가 자신의 연구소의 부소장을 맡아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유정아는 소울의 말을 듣고 보니 서머너즈 길드를 도와 실제적인 힘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최근에 북한에 337 길드가 배치되었고 그 와중에 서머너즈 길드도 한 자리 차지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뭔가 구체적인 계획이 있다고 하니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 혼자 그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 치는 격이야. 한 손보다는 두 손이 낫겠지.’
그녀는 소울의 빛나는 눈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좋아. 이미 나는 서머너즈 길드의 고문이니 새삼스럽게 충성맹세를 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맞아. 그러니까 당장 지금 나한테 해봐. 나와 서머너즈 길드에 충성하고, 배반하거나 해가 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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