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은 이가 절로 갈렸다. 자신을 향한 한심함 때문이었다.
그때 멀리서 그토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이나야!”
자신을 바래다준 헌터에게 공손히 인사한 이나가 이한에게 달려왔다.
이한은 이나를 보자마자 와락 껴안았다.
“괜찮아? 다친 곳은 없고?”
“응. 괜찮아. 걱정 많이 했나 보네.”
“그걸 말이라고!”
그녀를 껴안은 이한의 팔이 잘게 떨렸다. 그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었는지 눈치챈 이나가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지금 누가 누굴 위로하는 거야.”
이한이 허탈하게 웃으며 이나를 놓아주었다. 그래도 안심이 되었는지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진짜 괜찮았어. 이시현 헌터가 구해 줬거든.”
“이시현 헌터가?”
“응. 캬. TV가 실물을 못 담더라.”
긴장을 풀어 보기 위해 이나가 진심을 반, 장난을 반 담아 말했다.
그런데 이한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오빠?”
“……아무것도 아니야. 그나저나 많이 놀랐을 텐데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우리 집이 바로 근처……지만 못 가겠구나.”
던전 브레이크가 바로 앞에서 터져 버렸으니.
이나는 머쓱하게 뺨을 긁적이며 이한이 잡은 택시에 탔다. 두 사람이 탄 택시는 곧바로 이한의 집으로 향했다.
***
“……그렇게 돼서 당분간 휴가를 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래요. 많이 놀랐을 텐데, 대표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까 푹 쉬다 와요, 이나 씨.]
“네. 감사합니다, 팀장님.”
이나가 통화를 끊자 이한이 다가왔다.
“회사에서 뭐래?”
“푹 쉬다 오래.”
“다행이네.”
이한이 빙긋 웃으며 커피 잔을 건넸다. 이나는 잔을 받아 들며 어젯밤 일을 회상했다.
새로 생긴 법에 따라 던전 브레이크에 휘말린 일반인들은 안정 휴가라는 걸 낼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놀란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직장에 내는 휴가였다.
던전 브레이크의 후유증이 깊은 사람들이 간혹 있기 때문이었다.
‘나야 멀쩡하긴 하지만, 쉴 수 있음 좋지.’
아무리 좋은 직장이라지만 쉬고 싶은 건 매한가지였다.
커피를 호록 마시고 있는데 문득 이한이 너무 여유로운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나가 가만히 쳐다보자 이한이 웃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봐?”
“오빠 출근 안 해?”
“오전 반차 냈어.”
“왜?”
“나도 널 잃을 뻔했으니 놀란 마음 좀 추슬러야지.”
이나가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았지만 이미 낸 반차인 듯 이한은 여유로웠다.
“직장인의 소중한 반차를 나랑 시간 보내는 데 써도 돼?”
“이나야.”
“응?”
“나한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건 너야.”
“갑자기 무슨 소리래.”
“너랑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다는 소리지.”
진지하고 단호한 어투에 이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가끔 보면 날 너무 과보호한다니까.’
이한의 팀원들이 들었으면 과보호가 아니라 과사랑이라고 외쳤겠지만 이나는 그냥 그렇게 넘겼다.
‘하긴. 가끔은 이런 것도 좋지.’
오랜만에 가족과 보내는 시간에 이나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한도 그런 이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오빠가 건네는 간식을 받아먹으며 이나는 생각했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기진 않겠지.’
***
“다행히 사상자는 없군요. 모두 천조 길드에서 발 빠르게 나서 주신 덕분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시현은 정중하게 대답한 뒤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던 현장을 주욱 둘러보았다.
헌터 협회에서 나온 사람들이 사건 현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몬스터 시체를 수거하고 부서진 건물들을 수리하는 등 모두 바삐 움직였다.
그와 그의 길드원들이 할 일은 더 이상 없었다.
“모두 수고했다. 이만 돌아가도 돼.”
“넵.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길드장님.”
길드원들이 그에게 인사하고 각자의 일터와 집으로 돌아갔다. 몇몇은 뒤풀이라도 할 요량인지 손가락으로 술을 마시자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나도 길드로…….’
시현은 길드장으로서 할 일이 많았기에 집보단 길드를 택했다. 그는 곧바로 발걸음을 뗐다.
그런데 그의 걸음을 붙잡는 소리가 들렸다.
“어라? 이 몬스터는 좀 이상한데?”
시현이 고개를 돌렸다. 몬스터 시체를 조사하던 수사원이 한 시체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다른 수사원이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왜 그래?”
“이 몬스터 시체, 검에 베였는데 질식사했어.”
“엥? 확실해?”
“내가 이 일을 몇 년이나 했는데 그런 걸 헷갈리겠냐.”
시체를 살피던 수사원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제 동료를 쳐다보았다.
그때 시현이 다가가 그에게 물었다.
“질식사라고요?”
“아, 천조 길드장님. 아직 안 가셨어요?”
“이제 막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보다 이 몬스터가 질식사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아, 네. 보시면 검에 베인 흔적이 있지만 목에 있는 상처도 그렇고, 사인은 질식사입니다. 제가 볼 땐 검에 베이기 전에 이미 질식사로 죽은 상태였던 것 같아요.”
시현은 몬스터 시체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가 베었던 몬스터였다.
“천조 길드의 마법사가 해치운 모양이죠?”
“……아뇨. 이번에 마법사는 출동하지 않았습니다.”
“어……. 그럼 지나가던 다른 헌터가 해치웠나 보네요.”
수사원들은 별로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이었다. 반면 시현은 몬스터 시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당시 주변에 헌터는 나 하나였어.’
게이트 바로 앞이라 더더욱 그랬다. 그것만큼은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럼 대체 누가……?’
미간을 좁히던 시현이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혼자가 아니었어.”
“네?”
“길드장님?”
수사원들이 의아해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시현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은 뒤 자리를 피했다.
헌터는 아니지만 있었다. 그 말고 다른 사람이.
‘그 사람…….’
몬스터에게 끌려가던 그 사람. 그가 구한 사람.
‘저항도 못 하고 끌려가기에 아닌 줄 알았는데, 각성자였나?’
그의 길드원을 따라 현장 밖으로 나가던 모습이 언뜻 떠올랐다. 얼굴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찾아봐야겠는걸.”
각성자가 아니면 모를까, 각성자인데 아닌 척을 하고 있는 거라면 곤란했다. 그건 불법이었다.
시현은 이나의 흐릿한 얼굴을 떠올리려 애쓰며 현장을 벗어났다.
***
이한은 출근 시간이 됐는데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이나가 등을 떠밀고 나서야 터덜터덜 협회로 갔다.
정령을 시켜 설거지를 마친 이나는 소파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나 오늘은 안 나가?]
“어. 당분간 휴가야.”
[휴가가 뭐야?]
“쉬는 거.”
[그럼 집에 계속 있는 거야? 우리랑 있는 거야?]
“뭐…… 그렇지.”
[와아! 신난다!]
두 정령이 이나의 위에서 빙글빙글 날아다녔다.
‘누워서 보니까 꼭 모빌 같네.’
이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편한 자세로 고쳐 누웠다.
그 상태로 핸드폰이나 하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아.”
[왜 그래?]
정령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나는 미간을 좁히며 상체를 일으켰다.
“깜빡했네. 에어컨을 그대로 틀어 놓고 나왔어.”
[에어컨? 그 차가운 바람이 솔솔 나오는 그거?]
“어. 그거 계속 켜 놓으면 전기세 엄청 나올 텐데.”
한참 고민하던 이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를 시키기엔 리모콘 조작법도 모르고……. 안 되겠다. 너희들 잠깐 여기서 기다려. 에어컨만 끄고 나올 테니까 사고 치지 말고…….”
거기까지 말하던 이나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정정했다.
“아니다. 같이 가자.”
[우리도 가는 거야?]
“그럴 일은 없겠지만, 어제처럼 던전이 터지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그땐 너희가…… 도움이 되기도 했고.”
이나가 멋쩍어하는 얼굴로 뺨을 긁적이자 두 정령이 그녀에게 날아왔다.
[응! 같이 갈래!]
[나도, 나도!]
“좋아. 가자.”
잠깐 다녀올 생각으로 이나는 캡 모자만 대충 쓰고 밖으로 나왔다.
택시를 타고 집 앞에 도착했지만, 이나는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망할. 하필 우리 집까지 바리케이드를 쳐 놓냐.”
바리케이드 앞에 경찰들이 서서 그녀처럼 들어가려고 하는 이가 있으면 즉시 막고 있었다.
이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내 돈…….”
[왜 집에 안 들어가?]
“경찰들이 막고 있잖아.”
[몰래 들어가면 안 되는 거야?]
“몰래?”
솔깃한 말에 이나가 고개를 돌렸다.
리카가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투명화한 모습이었지만 정령사인 이나의 눈에는 잘 보였다.
리카를 물끄러미 보던 이나가 아,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녀의 입가에 악동 같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네. 몰래 들어가면 되잖아?”
이나는 곧바로 옆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집 바로 옆이면서 바리케이드 범위 바깥의 건물이었다.
맞은편에 보이는 그녀의 집 건물 옥상을 보며 이나가 리카를 불렀다.
“리카, 나를 저기까지 옮겨 줄 수 있어?”
리카는 바람의 정령이었다. 리카의 바람의 힘만 잘 이용하면 그녀의 집으로 이동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었다.
그런데 리카는 조금 곤란한 듯 우물쭈물했다.
[으음……. 그게…….]
“왜? 못 해?”
[지금 힘으로는 못 할 것 같아. 날아가다 힘이 떨어져서 추락할 거야.]
그건 곤란했다. 이 높은 건물에서 떨어지면 분명 죽을 터였다.
리카와 함께 사람이 바글바글한 건물 밑을 보던 이나가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질렀다.
“못 하는 이유가 뭔데? 역시 마나가 없어서인가?”
[으응…….]
“그럼 내 마나 써.”
[으응?]
고개를 갸웃하던 리카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럼 계약하는 거야?]
“그럴 리가. 마나만 가져다 쓰라고.”
계약자가 아니더라도 정령과 접촉한 상태면 얼마든지 마나를 줄 수 있었다. 이나는 그 점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이나의 말에 리카는 힘없는 날갯짓으로 그녀의 어깨 위에 올라타며 대답했다.
[알았어…….]
“대신 잘하면 전에 약속했던 초콜릿 줄게.”
물론 먹고 실망해서 다시는 안 먹겠다 할지도 모르지만.
뒷말은 일부러 생략했다. 그러자 리카도 이즈도 표정이 밝아졌다.
[약속이야!]
“그래. 약속.”
이나는 양심이 조금 아파 왔지만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