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이 되셨다면 이건 놓아주셨으면 좋겠군요.”
서준이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제야 백도하가 멱살을 쥔 손을 놓았다.
“미안하게 됐다.”
“아셨으니 됐습니다.”
‘이렇게 끝난다고?’
황당해진 이나가 허,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사이 백도하가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이제 돌아가자, 아란! ……아란?”
백도하가 몸을 홱 돌렸다. 그의 파트너 아란이 곁에 없었다.
이윽고 아란을 찾은 그의 눈이 휘둥그레 변했다.
“아란? 너 거기서 뭐 해?”
아란은 이나의 앞에 오더니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탓에 제게 쏠린 두 시선에 이나는 난감해졌다.
‘뭐지?’
이나가 의문을 품는 사이, 아란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와 냄새를 맡았다. 그러곤 그녀의 배에 얼굴을 비볐다.
“그르르릉…….”
“뭐…… 쓰다듬어 달라고?”
“크릉!”
이나는 망설이다가 아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꽤 기분 좋은지 백호의 꼬리가 흔들렸다.
아란이 이제는 바닥에 누운 채 배를 드러냈다.
“아, 아이고오. 예쁘다아…….”
가만히 두기도 뭐했기에 이나는 어색한 손길로 아란의 배를 마구 문질렀다.
그 모습을 서준과 백도하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말을 꽤 잘 듣는 반려범이었군요.”
“그럴 리가 있겠냐? 얘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절대 안 따른다고.”
백도하의 시선이 마침내 이나에게 닿았다.
“너, 대체 뭐야? 뭔데 우리 아란이 이렇게 잘 따라?”
“……글쎄요?”
사실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 아란은 그녀에게서 정령의 힘을 느끼고 친근함에 다가온 것일 터였다.
자연은 아란에게도 친근한 곳일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기에 이나는 대신 백도하의 시선을 모른 척했다.
“허.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결국 도하가 직접 아란에게 다가왔다.
“야, 아란! 가자니까!”
“끼으웅…….”
아란은 이제 시무룩한 울음소리를 내며 가기 싫다고 떼를 썼다. 이나의 뒤에 숨으며.
입을 떡 벌린 도하의 이글거리는 시선이 이나에게 닿았지만 이나는 억울할 뿐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아무튼 그녀도 곤란하게 됐다. 이대론 집에 못 돌아가니까.
결국 이나는 아란을 잘 달래 봐야 했다.
“저…… 아란, 이제 주인…….”
“주인이 아니라 파트너.”
“……파트너 따라가야지.”
아란은 그녀를 올려다보더니 결국 꼬리를 추욱 늘어뜨리며 도하에게 향했다.
그 모습이 왠지 안쓰러워 이나가 말을 덧붙였다.
“다음에 또 봐.”
그 말에 아란이 이나를 홱 돌아보았다. 어쩐지 기대 어린 눈빛을 하며.
[언제 또 보냐는데?]
그녀의 어깨에 앉아 있던 정령 이즈가 말했다.
정령은 동물과 소통할 수 있으니 그러려니 넘어갔지만 대답은 고민스러웠다.
“내일? 모레?”
“크릉!”
[내일 보재!]
“……그래. 그럼 내일.”
아란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이는 그녀를 서준과 도하가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왠지 미친 사람이 된 것 같아 이나는 뺨을 긁적였다.
대신 아란은 기쁜 듯 꼬리를 흔들더니 도하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도하가 이나에게 다가왔다.
‘아니, 왜 이번엔 네가 오는데?’
이나가 주춤했지만 도하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자.”
“……이게 뭐예요?”
“길드의 증표. 이걸 보여 주면 청호 길드 안에 들어올 수 있어.”
“그런데 이걸 왜 저한테…….”
“아란 보러 온다며?”
도하가 눈살을 찌푸리며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이나도 따라서 얼굴이 찌푸려지려 했지만 티 내지 않고 얌전히 증표를 받아 들었다.
“……일단 받아 둘게요.”
“그래.”
도하가 아란의 위에 올라타 돌아가기 전에 그녀를 힐끗 돌아보았다.
“……신기한 녀석.”
그러곤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이나는 서준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보니 유이나 씨도 특별한 사람이군요.”
그런 거 되고 싶지 않은데요.
이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대신 도하가 그녀에게 준 길드의 증표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진짜 가야 하나?’
마음 같아선 튀고 싶었지만 이미 아란에게 간다고 해 버렸다. 그것도 내일.
이나는 한숨이 나오는 것을 굳이 막지 않았다.
어쩐지 귀찮은 일만 잔뜩 생기는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착잡했다.
***
이나는 다음 날 결국 정말로 청호 길드로 가야 했다. 초대했는데 안 갔다간 찾으러 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의 두 정령, 이즈와 리카도 함께였다.
[여기가 어제 그 호랑이가 있는 곳이야?]
[호랑이 보고 싶어!]
이나는 정령들의 외침을 뒤로하고 경비원에게 청호 길드의 증표를 내밀었다. 그러자 경비원이 곧바로 문을 열어 주었다.
‘생각보다 꽤 크네.’
청호 길드는 건물만큼이나 내부도 꽤 넓었다. 특히 널찍하게 띄워 놓은 자리나 곳곳에 정원처럼 나무와 식물이 가득한 게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백도하가 아란을 위해 신경을 많이 쓴 모양이었다.
건물 내부에서도 느낄 수 있는 풀 냄새에 이나가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는 사이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야, 아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멀리서 눈을 부릅뜬 도하가 보였다.
그리고 아란이 그에게서 벗어나 이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잠깐, 저렇게 달려오면……!’
이나는 주춤했다. 아란이 달려오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이대로라면 몸이 날아가 벽에 처박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건 안 돼!’
이나는 반사적으로 한 손을 뻗어 외쳤다.
“멈춰!”
놀랍게도 아란은 순식간에 뜀박질을 멈추고 이나 앞에 섰다.
고개를 갸웃하는 아란을 보며 이나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앉아.”
진짜로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아란이 제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도하와 그의 직원들은 멍하니 쳐다보았다.
“세상에.”
“저 아란이 길드장님 말고 따르는 사람이 있다니.”
왠지 주목을 받는 것 같아 머쓱한 마음에 이나는 모자를 더 꾹 눌러썼다. 그러는 사이 도하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다시 봐도 신기하네. 아란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따르는 건 처음 봐.”
“그런가요.”
“너 혹시 각성자야?”
이나는 정색하며 대답했다.
“아뇨.”
“아님 말고.”
어깨를 으쓱한 도하가 뒤로 홱 돌며 말했다.
“따라와.”
“어디 가는데요?”
“계속 주목받고 싶으면 여기 있든지.”
짧은 새 그녀의 성향을 파악한 것인지 그가 픽 웃었다. 결국 이나는 그와 그의 비서를 따라갔다.
[와! 여기 식물이 굉장히 많아!]
[이나야, 우리 여기 둘러봐도 돼?]
정령들이 신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던 이나가 몰래 고개를 끄덕이자 정령들은 신이 나서 어딘가로 날아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나는 그녀를 안내하는 두 사람과 함께 길드장실로 들어갔다. 그제서야 그녀에게 쏠리던 시선들이 사라졌다.
이나가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자 도하가 푸핫, 웃었다.
“진짜 각성자는 아닌가 보네. 겨우 그런 시선도 감당하지 못하는 걸 보면.”
“아니라니까요.”
양심이 콕콕 아파 왔지만 거짓말은 술술 나왔다.
이나는 제 옆구리에 얼굴을 비비는 아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럼 저는 이제 뭘 하면 돼요?”
“뭐 하긴? 그냥 지금처럼 아란이랑 놀아 주면 돼. 아란 보러 온 거잖아.”
그렇긴 하지만 굉장히 신경 쓰였다. 그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할 일 없으세요?”
“할 일? 많지.”
“그럼 볼일 보세요. 저는 아란이랑 놀고 있을 테니까.”
그의 눈빛이 황당하다는 듯 변했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그의 비서가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길드장님. 지금 길드장님께서 하셔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제가 다 정리해 놓았으니 확인을 해 주시죠.”
“윽…….”
그가 가리킨 서류 더미들을 보며 도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이 왠지 우스워 픽 웃음을 흘리자 도하가 그녀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지금 날 비웃은 거야?”
“그냥 웃은 건데요.”
웃음을 지운 이나가 아란이랑 놀아 주는 척 고개를 돌리자 뒤통수로 무시무시한 시선이 꽂혔다.
그리고 다시 비서의 말이 날아들었다.
“길드장님.”
“좀만 더 쉬자. 나 던전 공략하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됐거든?”
도하가 애절하게 빌다시피 말했지만 비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에 그의 얼굴이 울상이 되려는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길드장님.”
“아, 이번엔 또 뭐야?”
도하가 짜증을 내는데 문이 열렸다. 청호 길드원 한 명이 문틈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어…… 손님이 오셨는데요.”
“돌려보내.”
“그게…….”
“제가 말하겠습니다.”
낯익은 목소리에 이나가 고개를 들었다. 한 남자가 길드원을 지나쳐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순간 이나와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나를 본 그의 눈이 커졌다.
“당신은…….”
“이야. 천조 길드장께서 여긴 웬일이시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천조 길드장, 시현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녀를 보고 당황하던 눈빛은 사라지고 귀찮다는 듯한 시선이 도하에게 꽂혔다.
“청호 길드장.”
“왜? 드디어 나랑 싸울 맘이 들었어?”
도하가 인벤토리에서 언월도를 꺼내며 물었다. 그가 시현을 라이벌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하게 퍼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시현은 그저 귀찮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것 때문에 온 게 아냐.”
“그럼 뭔데? 그거 아니면 너랑 할 얘기 없어.”
“곧 있을 남양주시 A급 던전 공략에 관해 할 말이 있어서 왔다.”
“남양주? 그거 일주일 후에 우리 쪽에서 공략하기로 한 던전이잖아.”
“그 던전, 우리 길드에서 대신 공략했으면 하는데.”
도하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그 대신 가만히 있던 그의 비서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그건 곤란합니다. 그 던전 보스인 켄타우로스의 뿔이 귀하다는 걸 천조 길드장님께서도 알고 계실 텐데요.”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 뿔이 필요해서 이렇게 양도해 달라고 찾아온 겁니다. 양도해 주신다면 값은 철저히 치르겠습니다. 아빌라 약초 50묶음은 어떠십니까.”
거듭 안 된다고 말하려던 비서가 멈칫했다.
아빌라 약초는 타박상 같은 외부의 상처에 탁월한 효과를 보였다. 검이나 창을 다루는 전방 포지션의 헌터들이 많은 청호 길드로서는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다.
비서가 고민하고 있는 그때 도하가 말했다.
“그딴 거 필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