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길드장님…….”
“나와 대결해 준다면 던전은 그냥 넘길게.”
비서가 입을 떡 벌렸다. 시현도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값만 지불하면 되는 일 아닌가?”
“그런 거 필요 없다니까? 나랑 대결해 주기만 하면 돼. 하지만 그 전엔 던전 안 넘겨.”
비서가 안절부절못하며 시현의 눈치를 보았다.
순식간에 살벌해진 분위기에 이나도 침을 꿀꺽 삼켰다.
‘집에 가고 싶다…….’
이 와중에 아란이 눈치 없이 치근덕대서 이나가 목덜미를 긁어 주었다.
그녀의 바람이 전해진 건지 때마침 문이 쾅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들어온 길드원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길드장님!”
“나 지금 바빠. 나중에.”
“그치만 큰일 났는데요!”
“뭔데?”
도하가 갑자기 난입한 방해꾼에 짜증스워하며 물었다. 그러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길드원이 외쳤다.
“마정석 창고에 있던 마정석이 모두 사라졌어요!”
“뭐?”
“그게 무슨……!”
도하와 그의 비서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길드원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길드원은 그런 두 사람이 되레 답답한 듯 손짓했다.
“얼른 와 보세요! 진짜라니까요!”
“하! 진짜……!”
도하가 비서를 데리고 그를 따라 사라졌다.
그리고 방 안엔 이나와 시현만 남게 되었다.
“…….”
“…….”
아까부터 가만히 있던 이나는 뻘쭘한 마음에 아란의 털만 만지작거렸다. 아란은 기분 좋은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런 그녀를 보던 시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어…….”
“하실 말씀이라도?”
“구면이죠? 저희.”
이나는 동그래진 눈을 깜빡였다. 설마 시현이 그녀를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이게 뭐야아아악!”
멀리서 도하의 절규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이나가 바깥을 쳐다보는데 시현이 그녀를 지나치며 작게 말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죠.”
“네?”
다시? 왜?
이나가 의문을 품었지만 시현은 이미 도하가 있는 곳으로 가 버린 뒤였다.
망설이던 이나도 아란을 데리고 그쪽으로 가 보았다.
창고로 보이는 곳 앞에 청호 길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나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안쪽을 보았다.
그리고 굳어 버렸다.
“이, 이, 이게 왜 이렇게 됐어? 응? 김 비서! 말해 봐!”
“저도 잘…….”
창고는 텅 비어 있었다. 무언가가 있었던 흔적이 보였지만 지금은 그랬다.
하지만 그녀를 놀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흐아……. 배불러!]
[몸에서 힘이 넘쳐!]
창고 안에는 이즈와 리카가 두둥실 떠 있었다.
그것도 매우 포만감 가득한 얼굴로.
***
[후에에엥…….]
[히잉…….]
“팔 똑바로 들어! 리카 너도 날개 똑바로 안 올려?”
이나의 호통에 두 정령은 움찔하며 각자 팔과 날개를 일자로 들어 올렸다.
이나는 부글부글 끓는 분노를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니들이 아주 미쳤지. 그게 뭔 줄 알고 함부로 먹어! 그것도 남의 물건을!”
지금 청호 길드는 발칵 뒤집어졌다. 마정석 창고에 있어야 할 마정석들이 전부 사라진 탓이었다.
그리고 그 범인은 다름 아닌 그녀의 정령들이었다.
이나의 계속되는 호통에 이즈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그, 그게…… 보니까 전에 그 초콜릿과 달리 먹으면 엄청 힘이 날 것 같은 거야. 그래서 하나만 먹는다는 게 그만……. 헤헤…….]
“지금 웃음이 나와?”
[……죄송합니다.]
“하아…….”
이나가 한숨을 푹 내쉬며 소파에 무너지듯 앉았다. 눈치를 보던 이즈와 리카가 그녀의 양옆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손바닥만 하던 정령들은 많은 마정석 섭취로 인해 그녀의 몸만큼이나 커져 있었다.
이즈가 이나의 팔에 팔짱을 끼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나야, 그래도 나 지금 엄청 힘이 넘쳐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빨래해 줄까? 아니면 설거지?]
[나, 나도 청소할 수 있어!]
이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두 정령을 번갈아 보았다.
“지금 그게 문제인 줄 알아? 너희가 친 사고가 그렇게 간단한 줄……. 아니다. 말을 말자.”
이즈와 리카가 시무룩해졌다. 그 사이에서 이나는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리를 문질렀다.
남양주시 A급 던전 보스인 켄타우로스를 해치우려면 마정석이 필요했다.
하지만 마정석을 몽땅 잃은 청호 길드가 켄타우로스를 해치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청호 길드는 시현이 있는 천조 길드에 던전 공략권을 양도했다.
대신 마정석이 가득 나오는 다른 던전에 대한 공략권을 양도받았다.
A급 던전을 넘기는 대신 사라진 마정석을 메꾸기 위해 B급 던전을 가져왔으니 청호 길드가 진 손해는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원인이 그녀에게 있었기에 이나는 지금 도하에게 미안해 죽을 지경이었다.
“확 너희 배를 갈라 버려?”
[히익……!]
[그건 안 돼!]
그녀의 곁에 붙어 있던 정령들이 잽싸게 멀어졌다.
이나가 가만히 노려보자 이즈가 숨겨지지도 않는 몸을 의자 뒤에 숨기며 말했다.
[차라리 우리가 마정석을 가져올게!]
“어떻게?”
[그 던전이라는 곳에 우리가 들어가면 어떨까?]
“너희의 뭘 믿고 던전에 너희끼리 들여보내?”
정령들이 시무룩해졌다. 그런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나가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방법이야.”
[응?]
[정말?]
“그래.”
이나는 오늘 아침에 쓰고 나갔던 캡 모자를 다시 눌러쓰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이 너희에게만 있는 건 아니니까.”
애초에 정령들을 그녀 곁에 딱 붙어 있게 했다면 이럴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아직 교육이 덜 된 애들을 풀어놓은 그녀 탓도 없진 않았다.
“그러니 빚을 갚자.”
[어떻게?]
“어떻게 하긴. 너희가 마정석을 먹었으니 같은 마정석으로 돌려줘야지.”
마스크를 꺼내 쓰며 이나가 말을 이었다.
“던전 공략을 해서라도.”
***
청호 길드가 잃은 마정석 등급과 양이 얼마나 되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이나는 길드에서 나오기 전에 대충 청호 길드가 입은 손해액을 들었다.
‘대충 500억쯤 된댔나.’
그 김 비서라는 사람이 곧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보고했기에 잊을 수가 없었다.
500억이라니. 그녀가 평생 월급을 모아도 얻지 못할 금액이었다.
하지만 던전에 들어가 마정석을 모은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A급 마정석 손바닥만 한 게 대충 50억쯤 된댔지.’
뉴스를 보며 들은 얘기로 대충 금액을 지레짐작하던 이나가 식은땀을 흘렸다.
“투 잡 뛰어야겠네.”
낮엔 회사 일, 밤엔 헌터 일을 하면서 말이다.
물론 이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켜선 안 되었다. 특히 그녀의 오빠인 이한이 알았다간 뒷목 잡고 쓰러질지도 몰랐다.
‘던전에 들어갈 때는 최대한 얼굴을 가려야지.’
그것이 모자는 물론 마스크까지 쓰고 나온 이유였다.
이나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정령들이 무언가를 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저게 그 게이트야?]
“맞아.”
그들의 앞에 푸른색으로 빛나는 포털 같은 것이 있었다.
게이트. 던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저게 붉은색으로 변하면 위험했다. 몬스터가 게이트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 거라는 뜻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이나는 게이트로 향하기 직전 그녀의 앞을 막는 높고 투명한 벽을 올려다보았다.
이것은 마법으로 만든 결계였다. 일반인이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각성자만 들어올 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물론.
“생각보다 아무 느낌 없네.”
이나는 각성자였기에 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
[꺄하하! 이것 봐라!]
[꺄르륵!]
정령들이 결계를 이리저리 통과하면서 재밌게 놀았다.
이나는 어휴,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게이트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를 환영하듯 게이트에서 푸른 빛이 넘실거렸다. 정말 반갑지 않은 모습이었다.
‘내가 게이트에 스스로 들어갈 날이 올 줄이야.’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필수는 아니지만, 보통 던전을 공략하려면 협회에 먼저 알려야 했다. 그러려면 공략하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어디 소속인지도 말해야 하고 말이다.
모두 불필요한 희생과 분쟁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이나는 그럴 수가 없으니 지금처럼 몰래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인생이란 대체 뭘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이나가 정령들을 불렀다.
“그만 놀고 이리 와.”
[네에!]
정령들이 그녀의 양옆으로 다가왔다. 이나는 정령들을 힐끗 보며 물었다.
“아까 연습한 거, 잘 기억하고 있지?”
[응!]
[물론이지!]
정령들이 고개를 앞뒤로 주억거렸다.
이곳으로 오기 전, 그들은 간단히 연습을 했다. 몬스터를 공격하는 방법, 그리고 비상 상황을 대비한 방어법과 대피 방법을 말이다.
정령들이 자신만만하게 외치자 조금 긴장되던 마음이 누그러졌다.
리카가 반짝이는 눈으로 게이트를 보며 물었다.
[이건 몇 급이야?]
“F급. 가장 낮은 급의 던전이야.”
얼른 빚을 갚겠답시고 높은 등급의 던전에 들어가기엔 위험 부담이 컸다. 그래서 일단은 가장 낮은 F급부터 들어가 볼 생각이었다.
이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나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리카가 옆에서 말했기 때문이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
“좋아.”
정령이 여러모로 쓸모가 많네.
……물론 그만큼 사고도 많이 치지만.
이나는 복잡한 마음을 누르고 게이트에 발을 디뎠다.
동시에 몸이 어딘가로 이동하는 느낌이 들었고.
“오.”
시야가 바뀌었다.
이나는 마스크를 내리며 순식간에 숲으로 변한 풍경을 신기해하는 눈으로 둘러보았다.
“……풀 냄새까지. 꼭 진짜 같네. 아니지. 진짜가 맞나?”
이나가 주변을 둘러보며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끼웅?”
“……토끼?”
분홍색 토끼가 수풀 속에서 깡총 튀어나왔다.
고개를 갸웃하며 토끼를 가만히 보던 이나가 물의 정령 이즈를 불렀다.
“이즈.”
[꺄아! 귀여워! 응? 이나야, 왜?]
이나는 손가락으로 토끼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익사시켜 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