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49)

[꺄아아! 힘을 이 정도로 써 본 건 난생처음이야!]

힘을 모두 소진해 다시 손바닥만 해진 이즈가 이나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어휴, 하고 한숨을 내쉰 이나가 공중에 떠 있는 이즈를 덥석 잡았다.

“흥분 좀 가라앉혀.”

[넹.]

다시 놓아주자 이즈는 히죽히죽 웃으며 이나의 곁에 떠 있었다. 이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다 끝난 거 맞지? 몬스터 기운은 안 느껴지지?”

[응!]

“그래. 그럼 돌아가자. 어느 쪽으로 가야 해?”

[이쪽!]

리카가 앞장서자 이나가 새 뒤꽁무니를 따라갔다. 머지않아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나는 일부러 그들을 피해 사람이 없는 곳으로 내려갔다. 마침내 산에서 벗어나 길을 밟고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가자 익숙한 부름이 들려왔다.

“이나 씨!”

“팀장님.”

회사 팀장이 눈을 크게 뜨고 그녀에게 달려왔다. 왜 이렇게 놀랐나 싶어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가 물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꼴이에요!”

“……제 꼴이 왜요?”

“산 근처에 있었던 거예요? 얼굴이 까맣잖아요!”

움찔한 이나는 주머니에서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비춰 보았다.

‘아이고야.’

제 꼴을 본 이나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산불이 일어난 곳 한가운데 있었던 탓인지 얼굴에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이즈가 내린 비 탓에 흘러내려 해괴망측하게 얼굴에 묻어 있는 것이었다.

‘나 이러고 돌아다닌 거야?’

이나가 젖은 옷소매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말했다.

“괜찮아요. 다친 곳은 없어요.”

“괜찮지 않습니다.”

그때 그녀의 몸 위를 무언가가 덮었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온 서준이 제 겉옷을 그녀의 몸 위에 걸쳐 주고 있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무섭게 말했다.

“산불이 일어난 곳 근처에 가다니. 미친 겁니까?”

“가고 싶어서 간 거 아니거든요? 그냥 산책하고 있는데 갑자기 불이 난 거라고요.”

“제가 일 외에 바깥을 돌아다니는 건 자중해 달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몬스터라도 맞닥뜨렸음 어쩌려고 그러셨습니까?”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헌터들을 시켜 조사해 볼 테니 걱정 말라면서요?”

이나가 지지 않고 따지자 서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못 말리는 분이네요, 이나 씨는.”

마치 아이를 다루는 듯한 말투에 이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남이사네요.”

팀장은 기 싸움 하는 두 사람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그를 구원한 것은 때마침 나타난 협회의 헌터였다.

“본부장님, 잠시 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담백하게 대답한 서준이 이나를 보며 말했다.

“남은 시간 동안은 어디 가지 말고 호텔에 있으세요.”

“네에, 네.”

이나가 설렁설렁 대답하자 서준이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멀어지는 그를 이나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잠시 후 가만히 있던 팀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이나 씨.”

“걱정 끼쳐 드렸네요.”

“엄청요. 모두 대피할 때 이나 씨 혼자 안 나와서 얼마나 놀랐다고요.”

“죄송해요.”

“무사하니 됐어요. 불도 꺼졌으니 호텔로 다시 돌아가죠.”

“네.”

이나는 그를 따라가다가 멈칫했다.

“아. 옷.”

서준이 걸쳐 준 겉옷이 아직도 그녀의 어깨 위를 덮고 있었다.

그것을 빤히 보던 이나는 슬쩍 옷 라벨을 확인해 보았다.

‘어디 얼마나 비싼 옷인지 보자.’

헌터 협회 본부장씩이나 되시니 분명 비싼 옷이겠지, 라는 생각으로 목 뒤쪽 라벨을 확인한 이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나 씨?”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나는 엉거주춤하게 팀장을 따라갔다. 그녀는 단호하게 생각했다.

‘난 못 본 거다.’

그러니 옷이 찢어지거나 망가져도 난 모르는 일이다.

호텔로 향하는 동안 이나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

호텔로 돌아오고, 이나는 다음 날 오후까지 늘어지게 자고 싶었지만 알람은 이른 새벽에 울렸다.

흐느적거리는 팔로 알람을 끈 이나가 하품을 크게 내뱉었다.

“하암……. 이게 무슨 생고생이람.”

[이나 일어났다!]

[오늘은 일찍 일어났네?]

“그야 할 일이 많으니까.”

잠을 깨려는 듯 한참 동안 눈을 끔뻑이던 이나가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욕실로 들어간 이나는 한층 또렷해진 눈빛으로 욕실을 나왔다.

옷을 갈아입고 캡 모자를 쓴 그녀는 정령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이나야, 우리 어디 가?]

“일단 공장.”

가장 먼저 공장으로 향하자 아무도 없어 휑했다.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나는 어제 낮에 팀장과 들렀던 곳으로 갔다. 그러고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와르르 꺼냈다.

어제 맞닥뜨린 몬스터가 훔쳐 갔던 마도구들이었다.

“이러면 누가 되돌려 놨는지 의심은 되어도 일은 좀 수월해지겠지.”

문 옆에 세워 둔 마도구 꾸러미를 보며 이나는 뿌듯하게 웃었다. 그리고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어제 산불이 일어났던 산속이었다.

이르다 못해 어두운 새벽이라 그런지 통제가 허술했다. 이나는 손쉽게 산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어제처럼 헉헉거리며 한참 등산하던 이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다행히 아직 남아 있네.”

이나의 시선을 따라간 정령들이 외쳤다.

[어제 본 몬스터다!]

[몬스터는 왜?]

“왜긴. 우리라는 꼬리를 보이지 않게 싹둑 잘라 내야지.”

즉, 증거를 인멸하러 왔다는 소리였다.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이나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응? 저건…….”

***

이나는 호텔로 돌아왔다. 돌아오니 딱 이른 아침이 되어 있었다.

객실로 올라가 다시 잠을 청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 호텔 로비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유이나 씨.”

무심코 고개를 돌린 이나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쪽이 왜 여깄어요? 여기 묵어요?”

“아뇨. 제가 예약한 호텔은 다른 곳입니다. 이나 씨가 여기 있다고 해서 와 봤습니다.”

어깨를 으쓱한 서준이 자신이 앉아 있는 자리 맞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할 얘기가 있으니 잠시 시간 좀 내주시죠.”

“……기다려요. 그쪽이 어제 저한테 준 옷을 가져올 테니까.”

이나는 몸을 홱 돌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잠시 후, 서준의 겉옷을 들고나온 이나가 그것을 서준에게 건넸다.

“자요.”

“고맙습니다. 나름 아끼는 옷이거든요.”

“그럴 것 같더라고요.”

그 정도 브랜드면 이나는 너무 아껴서 입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어제의 식겁했던 심정이 떠올라 이나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리고 서준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할 얘기가 뭔가요?”

“다친 곳은 없습니까?”

이나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반면 서준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다.

잠시 할 말을 잃었던 이나가 그에게 물었다.

“그거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 외에도 물어볼 건 많습니다. 어제 그 늦은 시간에 산엔 왜 간 건지, 라든가 말이죠.”

“일단 전 다친 곳은 한 군데도 없어요. 산불에 휘말리긴 했는데 전 산 안쪽이 아닌 산기슭에 있었거든요. 때마침 비도 오고 해서 얼굴만 좀 까매지고 말았죠.”

어깨를 으쓱한 이나가 이어서 말했다.

“산에 간 건 산책하러 나간 것뿐이었어요.”

“그 야밤에요? 낮에 무언가와 눈이 마주친 것 같다면서, 몬스터는 아닐까 의심하던 분이 말입니까?”

“사람이 사는 곳 근처였어요. 아무리 몬스터라도 그런 곳에 함부로 튀어나오진 않겠다 싶었죠. 게다가 헌터님들이 속초에 와 있었잖아요. 든든한 분들이 계신데 뭐가 무섭겠어요. 물론 산불은 예상에 없었지만.”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사실 이나 본인이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또 뭐라 구체적으로 지적하기엔 애매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본인이 그렇다는데.

그것을 서준도 느꼈는지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그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녀에게 양해를 구한 서준이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갔다.

“무슨 일입니까?”

얌전히 있던 서준이 무언가를 듣더니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정말입니까?”

통화 내용이 대충 예상이 갔지만 이나는 모르는 척했다.

그리고 잠시 후 통화를 끊은 서준에게 물었다.

“왜요? 무슨 일이래요?”

“……공장의 사라진 마도구들이 전부 돌아왔다고 하는군요.”

“정말요? 그거 다행이네요.”

이나가 모르는 척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서준이 물었다.

“혹시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있겠어요?”

“그렇겠군요.”

금방 납득한 서준이 겉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른 시간에 미안하군요.”

“알면 얼른 가세요.”

이나가 손을 휘휘 흔들자 서준이 픽 웃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아. 그런데 이 이른 시간에 어딜 갔다 왔어요?”

뜨끔한 이나가 부러 미간을 좁혔다.

“제가 그런 사적인 것까지 답해야 해요?”

“사적인 거였나요?”

“엄청요.”

고개를 갸웃한 서준이 재차 사과를 전하고 호텔을 나갔다.

잠깐 대화한 것뿐인데 이나는 벌써 지쳐 버렸다.

“후우. 피곤해.”

[이나야, 얼른 올라가자, 얼른!]

“알았다, 알았어.”

이나는 어쩐지 흥분한 정령들을 데리고 객실로 올라갔다.

문을 닫고 잠그기까지 하자 그제야 정령들이 실체화해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나야, 얼른, 얼른!]

“진정해, 이것들아.”

이나는 제게 달라붙는 정령들을 검지로 꾸욱 밀어낸 뒤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을 본 정령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친구다!]

[친구야!]

“어휴. 이런 것들이 하나 더 늘어나다니.”

이나는 벌써부터 질린다는 얼굴로 손에 든 알을 바라보았다.

붉은색을 띠는 알은 다름 아닌 정령의 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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