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령의 알은 불과 세 시간 전에 산에서 얻은 것이었다.
“저거 정령의 알 아냐?”
이나는 몬스터의 시체 밑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을 때 몬스터가 함께 가지고 나온 것 같았다.
사실 그대로 둘 수도 있었지만.
[꺄아악! 친구다!]
[이나야, 얼른 데려가자!]
정령들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그녀가 가져와야 했다.
결국 이나는 짐을 덜러 갔다가 되레 얻어 와야 했다.
이나는 손에 든 알을 유심히 살피며 중얼거렸다.
“색과 느껴지는 기운을 보면…… 불의 정령인가?”
[불? 어제 활활 타오르던 그거?]
[뜨거운 친구려나?]
정령들이 기대 어린 눈으로 이나를 쳐다보았다. 내키진 않았지만 이나는 결국 알을 부화시키기로 했다.
알을 바라보며 몸 안에 있는 정령의 힘을 주입하자.
화르륵-
알이 불타올라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알을 손에 쥐고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뜨겁진 않았다. 이나와 정령들은 새 식구가 깨어나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우음……!]
잠시 후, 이나의 손 위에서 기지개를 켠 붉은 도마뱀이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이나가 대뜸 말했다.
“파인.”
[파인?]
도마뱀이 고개를 갸웃하자 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파인이야.”
[파인……. 파인!]
마음에 드는 듯 파인의 꼬리에 붙은 불이 화르륵 타올랐다.
얌전히 곁에서 친구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이즈와 리카가 냅다 달려들었다.
[안녕! 난 이즈야. 물의 정령!]
[난 바람의 정령 리카야!]
[난 파인! 파인이야! 방금 내 계약자가 지어 줬어!]
이나는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그녀를 계약자라고 생각하는 파인에게 이곳의 규칙을 알려 줄 시간이었다.
***
사라진 마도구가 돌아오고 공장이 안정을 되찾아 이나는 그날 바로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뜻밖의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휴가요? 또요?”
[산불에 휘말렸잖아요. 던전 브레이크는 아니지만 그만큼 위험했던 상황인지라 대표님께서 배려해 주셨어요.]
이나는 뺨을 긁적였다. 좋기야 하지만 너무 연달아 쉬려니 괜히 미안했다.
그래도 쉬라는데 안 쉴 순 없지.
“네. 알겠습니다. 팀장님도 푹 쉬세요.”
전화를 끊은 이나의 몸이 소파에 녹아내렸다.
그녀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파인이 물었다.
[이나야, 휴가가 뭐야?]
“쉬는 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와아! 이나 또 쉰다!]
정령들이 시끌벅적하게 환호했다. 이나는 그러려니 하다가 부엌으로 향했다.
“느긋하게 아침이나 먹어 볼까?”
이나는 냉장고에서 이한이 만들어 준 반찬들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옆에서 그것들을 빤히 보던 파인이 말했다.
[이나는 이렇게 차가운 걸 먹는구나.]
“그건 원래 차갑게 먹는 반찬이야.”
아무리 그래도 김치를 뜨겁게 먹을 순 없었다.
이나가 다른 건 없나 냉장고를 뒤적거리는데 서로를 보던 정령들이 대뜸 외쳤다.
[우리가 따뜻한 밥 해 줄게!]
“뭐?”
이나는 멈칫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한 말이 진심인지 이즈가 눈을 빛냈다.
[나 TV에서 봤어! 우리가 요리해 줄게, 이나야!]
“아니. 괜찮은데.”
이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녀도 잘 못하는 요리를 맛도 못 느끼는 정령들이 할 수 있을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정령들은 이나의 등을 거실로 밀어내며 말했다.
[우리가 해 줄게! 그러니까 이나는 거실에 얌전히 있어!]
“아니, 괜찮다니까? 나 그냥 반찬 꺼내 먹으면…….”
[싫어! 해 줄 거야!]
도저히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이나는 포기하고 다시 소파에 풀썩 앉았다.
‘부엌이 난리가 나겠네.’
뭐, 어차피 치우는 것도 쟤들이 하겠지만.
그래서 이나는 마음을 편히 먹었다. 그러는 사이 부엌에서 정령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걸 넣으면 돼! TV에서 이걸 넣으면 된댔어!]
[많이 넣으면 더 맛있어지겠지?]
[이나 배고프니까 많이 하자! 많이!]
‘……괜찮은 건가.’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러다 소금밥이라도 먹게 되는 건 아닐는지.
이나는 불안한 마음에 몇 번이나 부엌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녀를 발견한 리카가 매번 바람으로 그녀를 다시 소파에 착석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래. 일단 먹자. 먹고 못 먹겠다고 솔직히 말하면 쟤들도 이제 이런 짓 안 하겠지.’
이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사이 요리가 완성이 되었는지 정령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이나야! 밥 다 했어!]
“간다, 가.”
부엌으로 가서 식탁에 앉자 정령들이 자기네들끼리 만든 음식을 그녀의 앞에 대령했다.
“뭐야. 그냥 김치볶음밥이잖아.”
[응! 그런 이름이랬어.]
[먹어 봐, 이나야!]
양은 좀 많았지만 겉보기엔 평범했다. 하지만 이나는 긴장을 놓지 않았다.
이나는 속으로 하나, 둘, 셋, 세는 순간 김치볶음밥을 한 숟갈 떠서 입 안에 집어넣었다. 정령들이 그런 이나를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어때?]
“……어.”
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솔직하게 말했다.
“생각보다 괜찮네?”
[정말?]
[와아! 성공!]
다신 이런 짓 못 하게 맛없다고 말하려던 이나는 당황했다. 조금 짭조름하긴 했지만 정말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볶음밥을 한 숟갈 더 떠먹은 이나가 정령들에게 물었다.
“불은 어떻게 한 거야? 너희 가스레인지 켤 줄 알아?”
[파인의 불을 이용했어!]
“아.”
납득한 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의 정령이 곁에 있는데 굳이 가스레인지를 켤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 종종 이용해도 되겠는데?’
생각보다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잘 먹는 이나를 보며 정령들도 뿌듯하게 웃었다.
띠링!
“음?”
때마침 메시지가 와서 이나는 볶음밥을 우물거리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누구야?]
“…….”
이나는 말없이 핸드폰 화면을 꾹꾹 눌러 답장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숟갈을 떠먹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출해야겠다.”
[어디 가는데?]
“주말에 아이템을 거래하기로 했던 사람이 좀 일찍 만날 수는 없냐고 하네.”
이나가 정령들을 보며 씩 웃었다.
“너희가 먹은 마정석 벌러 가자.”
***
사람들이 더운 날 모자와 마스크를 쓴 이나를 힐끗 보며 지나쳤다. 그럴수록 이나는 모자를 더욱 푹 눌러쓸 뿐이었다.
“아오. 더워.”
마스크를 잠시 밑으로 내린 이나가 짜증을 내뱉었다. 가뜩이나 더운 걸 싫어하는데 모자에 마스크까지 쓰려니 미칠 지경이었다.
이나가 이렇게 중무장하고 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혹시나 그녀를 아는 사람이 아이템을 거래하는 그녀를 볼까 봐 걱정된 탓이었다.
[이나 더워?]
“어. 더워 죽겠다.”
[이나 죽으면 안 돼! 내가 바람 일으켜 줄게!]
리카가 제 능력을 이용해 이나를 향해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자 좀 나았다.
“아, 시원해. 리카, 좀 더 세게.”
[알았어!]
리카가 열심히 날개를 파닥거렸다. 주변이 한층 더 시원해지자 이나는 만족스러워하는 미소를 머금고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 액정 위로 나타난 시간을 보며 이나가 중얼거렸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마침 누군가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저어…… 혹시 헌터 나라…….”
“아, 네.”
아이템 거래 사이트인 헌터 나라가 언급되자 이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거래 상대방을 제대로 본 이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헌터……는 아닌 것 같은데.’
거래를 하러 온 사람은 평범한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것도 어쩐지 초췌해 보이는.
헌터라기보다는 궂은일을 하는 가장의 모습이 엿보였다.
‘그렇다고 재벌도 아닌 것 같고…….’
이나의 속마음이 눈빛에 드러났는지 거래하러 온 아저씨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돈…… 아니, 마정석으로 거래하기로 하셨죠. 준비는 다 해 놨습니다.”
“아, 네.”
마정석을 준비해 놓았다고 하니 이나의 의심도 풀렸다. 하지만 여전히 찝찝한 구석은 남아 있었다.
이나는 인벤토리에서 거래하기로 한 물건, ‘얼음 골렘의 핵’을 꺼내 내밀었다.
“이게 ‘얼음 골렘의 핵’이에요.”
“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고?
이나는 아저씨의 표정을 살폈다. 일반인이면서 정말로 알고 있는 듯 그는 익숙하게 핵을 받아 들었다.
다만 눈빛에 뭔지 모를 어두운 감정과 희망이라는 상반된 감정이 뒤섞여 드러났다.
핵을 가져온 가방에 넣은 그는 마정석 주머니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여기, 글에 적혀 있던 대로 3억 상당의 마정석입니다.”
이나는 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해 보았다. 손바닥만 한 마정석 세 개가 안에 들어 있었다.
‘아이템 정보.’
띠링!
속으로 읊조리자 시스템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마정석(C)
내용: C급의 마정석입니다. 담겨 있는 에너지는 여러 분야에 풍부하게 쓰일 것입니다.⌟
마정석의 등급과 크기를 계산해 값을 대략적으로 계산한 이나가 주머니를 다시 잘 묶었다.
“네. 금액 확인했습니다. 거래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저는 이만…….”
“아, 저기……!”
“네?”
시원하게 집으로 돌아가려던 이나는 아저씨가 붙잡자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어쩐지 망설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헌터님…… 맞으시죠.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부탁이요?”
헌터가 아니라고 대답하려던 이나는 이어진 말에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아저씨는 가방에서 주머니를 더 꺼냈다. 곱게 묶여 있던 그것을 열자 이나가 받은 것보다 더 크고 많은 마정석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나에게는 마정석보다 잘게 떨리는 그의 손이 더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의뢰를 하고 싶습니다.”
아저씨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그에 이나가 당황할 새도 없이 그가 이어서 말했다.
“제 딸을…… 제발 도와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