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는 일단 아저씨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와 공원 벤치에 앉았다.
얌전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나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나는 아저씨를 힐끗 보았다. 그는 양손으로 무척이나 피로해 보이는 얼굴을 덮고 있었다.
“딸이 지금 병상에 누워 있는데, 병을 고치려면 얼음 골렘의 핵이 필요하다고요?”
“그렇습니다.”
아저씨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제 딸은 3년 전 던전 브레이크에 휘말렸습니다. 그때 몬스터에게 공격당했는데, 그 탓에 열병을 얻어 여태 병상에 누워 있습니다.”
“으음.”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몰라 이나가 그저 침음만 흘리자 그가 이어서 말했다.
“헌터를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병동에 입원했는데, 의사의 말로는 ‘얼음 골렘의 핵’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것도 일시적으로 증상을 완화시켜 줄 뿐, 근본적인 치료법은 되지 못한다고…….”
“치료할 방법이 없는 건가요?”
“한 가지 있긴 한데…….”
아저씨의 시선이 흘긋 이나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마 안 될 겁니다.”
“무슨 방법이길래요?”
“혹시 ‘얼음 여왕의 눈물’이라고 알고 계십니까?”
“처음 들어 봐요.”
“예전에 어떤 헌터가 당산에 있는 B급 던전에서 얻은 아이템이라고 하더군요. 놀랍게도 그 아이템을 열병이 있는 환자에게 쓰는 순간 열이 싹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당산에 있는 B급 던전?
이나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나도 알고 있는 곳이었다.
그녀가 얼마 전에 공략했던 얼음 골렘이 나오는 그 던전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이템은 얻지 못했는데?’
그녀가 받은 것이라곤 ‘얼음 골렘의 핵’과 무기, 그리고 ‘냉기환’뿐이었다.
이나의 표정을 본 아저씨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안다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 얻었는지는 그 헌터도 모른다고 답했다더군요.”
“그래도 그 헌터한테 뭔가 단서라도 있지 않을까요?”
“저도 묻고 싶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그 헌터는 5년 전에…….”
“아…….”
무거운 분위기가 두 사람을 짓눌렀다. 화제를 바꿔 볼 겸 이나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저한테 의뢰한다는 게 그 뭐시기 눈물을 가져와 달라는 건 아닐 테고, 무슨 의뢰인가요?”
“‘얼음 골렘의 핵’을 더 모아 와 주셨으면 합니다.”
“네?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방편일 뿐이라고…….”
“지금으로선 제 딸을 잃지 않으려면 그 방법밖엔 없으니 말입니다.”
아저씨가 쓰게 웃었다. 이나는 차마 거기다 대고 다른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알겠어요. 최대한 모아 볼게요.”
“감사합니다. 값은 마정석으로 준비해 놓겠습니다.”
연신 감사 인사를 하던 아저씨는 뒤로 돌아 가 버렸다. 이나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사정이 딱하네.”
[아저씨 불쌍해…….]
이나도 이즈의 말에 동감했다.
차림새를 보아도 그렇고, 그렇게 잘사는 집은 아닌 것 같았다.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 3억이란 돈을 준비하기란 쉽지 않았을 터였다.
아저씨의 모습이 멀어지자 이나도 자리를 옮겼다.
‘그나저나 내가 헌터도 아닌데 이래도 되는 건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이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상관없겠지.’
***
그날 이나는 도끼를 추가로 거래했다. 아이템들을 한 번에 처리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그 후에는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이나는 어제처럼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밖으로 나갔다.
“가자.”
[응!]
[가즈아!]
집을 나와 이나가 향한 곳은 당산역이었다.
금요일이기도 하고 일부러 한산한 시간을 노려 오는 길에도, 그리고 던전 주변에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 덕분에 이나는 눈치 볼 것 없이 게이트 앞을 서성였다.
[이나야, 얼른 들어가자!]
“왜 이렇게 신났어?”
[그야 우리 능력을 마음껏 쓸 수 있는걸!]
“이번에 능력을 마음껏 쓸 정령은 너희가 아니야.”
이나가 신난 이즈와 리카 대신 제 어깨 위의 파인을 보며 말을 덧붙였다.
“파인이지.”
[에엑!]
[왜? 왜?]
“당연한 거 아냐? 얼음으로 만들어진 골렘을 해치우는 데 불만큼 탁월한 속성이 어딨어?”
이즈와 리카는 만일을 대비해 데려온 것뿐이었다.
이나가 단호히 말하자 이즈와 리카가 시무룩해졌다.
[그치만 우리도 그때 골렘을 해치웠는데…….]
“너희가 쓸모없다는 게 아냐. 좀 더 쉽게 가자는 거지.”
이나가 다독여 주자 기분이 좀 풀렸는지 두 정령의 축 처진 표정이 펴졌다.
[알았어. 그럼 이번엔 파인에게 양보할게.]
“좋아.”
이나가 모자를 꾹 눌러쓰고 말했다.
“그럼 들어가자.”
그녀는 정령들과 함께 결계를 향해 발을 뻗었다.
그대로 통과하려는 순간.
“거긴 들어가면 안 되는데.”
뒤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이런……!’
이나는 발끝을 다른 방향으로 트느라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야야…….”
“괜찮아?”
그런 그녀의 앞으로 손이 내밀어졌다. 이나는 샐쭉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놀라고 말았다.
“청호 길드장?”
“뭐야. 너였냐?”
그제야 그녀를 알아본 것인지 도하가 눈을 치켜떴다.
그사이 백호 아란이 그녀의 곁으로 와 얼굴을 비비며 그릉거렸다. 이나는 아란의 목을 긁어 주며 픽 웃었다.
“그래, 그래. 오랜만이야.”
“그르릉…….”
기분이 좋은지 아란은 눈을 감고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도하가 내민 손을 까딱였다.
“내 손은 안 잡아? 조금 민망해지려 하는데.”
아주 양쪽에서 난리구만.
이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도하가 손을 당겨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근데 너 지금 여기 들어가려고 한 거야?”
도하가 결계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물었다. 뜨끔했지만 이나는 멋쩍어하는 표정을 연기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들어갈 생각은 없었어요.”
“그럼?”
“백도하 씨도 알다시피 저 게이트 안은 설원이잖아요. 그래서 그런가 이 근처가 시원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좀 서성였죠.”
“흠. 그렇구만.”
“네. 어차피 저는 일반인이라 들어가지도 못하는데요.”
다행히 도하는 별 의심 없이 넘어갔다. 지금이 여름이라서 다행이었다.
그와 대화하는 동안에도 아란이 계속 얼굴을 문대 왔다. 이나가 아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도하가 갑자기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그렇고, 요즘 왜 안 왔어?”
“네?”
“그동안 아란이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했다고. 나와 있는 동안에도 툭하면 문을 쳐다볼 정도로.”
잠시 당황한 이나가 아란을 보며 물었다.
“그랬어?”
“크릉!”
마치 대답하듯 아란이 나지막하게 울었다. 그 소리가 마치 불평하는 것처럼 들렸다.
[아란이 그동안 왜 안 왔냐고 묻는데?]
[보고 싶었대!]
아니, 불평이 맞았다.
정령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이번엔 이나가 황당하다는 투로 말했다.
“아란도 그렇고 백도하 씨도 그렇고, 둘 다 저한테 시간 맡겨 놨어요? 되게 당당하시네.”
“그건…….”
“아무리 아란이 예뻐도 저한테도 제 일이 있다고요. 저한테 청호 길드를 찾아갈 의무는 없어요.”
“크릉…….”
아란이 시무룩해졌다. 마찬가지로 도하도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사과를 전했다.
“그건…… 그렇네. 미안.”
“알면 됐어요.”
전에도 느꼈지만 사과는 빠른 사람이었다. 적어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래서 이나도 쿨하게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백도하 씨는 왜 여기 있어요?”
“나?”
도하가 갑자기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허공에 손을 집어넣었다. 인벤토리를 연 것이었다.
“신기한 거 보여 줄게.”
“신기한 거?”
“짠!”
잠시 후 도하의 손 위에 올라온 것을 보고 이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너도 TV를 통해 많이 봐서 알 거야.”
알다마다. 지금도 내 곁에 있는데.
정령들을 힐끗 본 이나가 다시 알로 시선을 돌렸다.
도하의 손 위엔 황토색을 띠는 정령의 알이 들려 있었다.
[와아아! 친구다!]
[이나야, 얼른 부화시키자!]
정령들의 말을 깔끔히 무시한 이나가 모르는 척 도하에게 물었다.
“정체불명의 알이네요?”
“맞아. 실제론 처음 보지?”
“아뇨. 만져 본 적도 있는데요.”
“뭐? 어디서?”
“협회에서요. 체험 학습 온 아이들에게 만지게 해 주길래 저도 만져 봤는데요.”
“미친놈들 아냐? 이게 뭔 줄 알고 함부로 만지게 해 줘?”
“그러게나 말이에요.”
덕분에 지금 내 곁에 정령이 셋이나 있네요.
이나는 뒷말과 함께 허탈한 감정을 애써 삼켰다. 그사이 알을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도하가 뚱하게 말했다.
“아무튼, 이 알을 협회에 넘기려고 가던 중이었어.”
“아란과 함께요?”
“당연하지. 아란은 내 파트너니까.”
“크릉!”
아란이 맞장구치듯 짧게 울었다.
이나가 두 콤비를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아란을 데리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수 있어요?”
“못 타지. 그런 거 굳이 안 타도 갈 수 있어. 우리 아란이 얼마나 빠른데.”
“아.”
즉, 아란의 등에 타고 간다는 말이었다.
납득한 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하가 아란의 등에 올라타더니 짧게 인사했다.
“그럼 이만 갈게. 가끔 놀러 와.”
“그럴게요. 둘 다 잘 가요.”
티는 내지 않았지만 이나는 안도했다. 이제야 혼자 있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도하를 등에 태운 아란이 가지 않고 입으로 그녀의 옷자락을 물어서 당겼다. 딱 봐도 같이 가자는 뜻이었다.
“아란이 같이 가자는데?”
도하가 눈치 없이 말했다. 반면 이나는 곤란해하는 얼굴로 아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한데 오늘은 나도 할 일이 있어서.”
“무슨 할 일?”
도하가 대신 물었다. 할 말을 잃은 이나가 잠깐의 침묵 후에 대답했다.
“……여러 가지?”
“거짓말이구만.”
“아니, 진짜인데…….”
“바쁜 거 아니면 올라타. 정 뭣하면 다시 이 자리로 데려다줄 테니까.”
이미 도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이나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도하와 아란 콤비에게는 소용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