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가 시간을 확인하니 시침이 벌써 4를 향하고 있었다. 떠들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이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나에게 말했다.
“택시 태워 줄게.”
“아냐. 지하철 타면 돼.”
어차피 당산역으로 가야 하기도 하고.
뒷말은 숨기고 대답하자 이한이 입을 달싹였다. 그때 팀의 막내 사원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택시를 잡아 드리겠습니다.”
“괜찮아, 우림 씨.”
“왜 팀장님이 대답하세요? 저는 이나 씨에게 말한 건데……!”
이한의 날카로운 눈빛이 닿자 그가 몸을 움찔 떨었다. 이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다들 즐거웠습니다.”
“우리야말로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놀러 와요, 이나 씨.”
“하하……. 기회가 되면요.”
이나는 계속 뒤를 돌아보는 이한에게 얼른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한이 엘리베이터를 탄 뒤에야 이나도 협회를 빠져나왔다.
‘한국의 던전 브레이크 발생률이 늘었다라…….’
아까는 그냥 흘려 넘겼지만 생각할수록 이상하긴 했다.
왜 한국만? 여기 뭐 특별한 거라도 있나?
[이나야, 우리 이제 그 얼음 몬스터 잡으러 가는 거야?]
때마침 이즈가 묻는 말에 이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어. 가야지.”
[드디어 내 능력을 보여 줄 차례인가!]
불의 정령 파인이 꼬리를 파닥파닥 흔들며 의기양양해했다. 이나는 픽 웃었고, 이즈와 리카는 자극이라도 받은 듯 볼을 부풀렸다.
[우리도 도움이 될 거야!]
“그래, 그래.”
이나는 대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이미 상념에서 완전히 깨어난 뒤였다.
***
다시 당산역 B급 던전 게이트에 도착했을 때는 조금 이른 저녁을 먹어도 될 시간이었다.
아까보다 사람도 늘어 이나는 모자를 꾹 눌러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 사람은?”
[지금은 없어!]
“확실해? 너희 청호 길드장이 왔을 때도 눈치 못 챘잖아.”
[그, 그치만 너무 갑자기 튀어나왔는걸!]
“하긴. 아란이 빠르긴 했지.”
납득한 이나가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 푸른색으로 빛나는 게이트가 그녀를 환영하듯 일렁이고 있었다.
이나는 들어가기 전에 보온 효과를 위해 곰 가죽을 꺼내 몸에 둘러매고 불의 정령 파인을 불렀다.
“파인.”
[왜?]
“던전 안에선 나한테서 떨어지지 마.”
[응! 절대 안 떨어질게!]
파인이 이나의 얼굴에 뺨을 비볐다. 이즈와 리카가 그 모습을 질투했다.
[나도! 나도 안 떨어질래!]
[나도 이나 옆에 있을 거야!]
여기저기서 매달리는 정령들을 보며 이나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파인에게 떨어지지 말라고 한 건 그를 더 아껴서가 아니었다. 그저 계약을 안 한 상태에서 마력을 줄 방법은 접촉하는 것밖에 없어 그런 것뿐이었다.
정령들은 이를 완전히 까먹은 눈치였지만.
“됐고, 이제 들어가자.”
[응!]
[좋아!]
이나는 망설임 없이 게이트 안으로 발을 쑤욱 집어넣었다. 전처럼 몸이 이동되며 한기가 느껴졌다.
“여긴 여전히 춥네.”
이나의 입에서 입김이 후욱 나왔다. 몸이 절로 떨리자 이나는 서둘러 골렘이 나왔던 동굴로 걸어갔다.
“긴바지 입고 오길 잘했지.”
투덜거리며 동굴 안으로 들어오자 좀 나았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쿠워어어…….”
동굴 안쪽에서 거대 골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동굴 바깥에서 미니 골렘들이 한 번에 밀려들어 왔다.
하지만 이번엔 이나도, 정령들도 긴장하지 않았다.
[저거 다 녹여 버리면 돼?]
지금 이나의 곁엔 얼음과 상극인 불의 정령, 파인이 있었으니까.
“어. 다 녹여 버려.”
[알았어!]
이나에게 착 달라붙은 파인이 그녀의 마나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마나를 자신의 힘으로 바꾸어 미니 골렘들의 발밑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끼긱…….”
“끼기긱…….”
불바다에 갇힌 미니 얼음 골렘들이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몇몇이 녹은 다리로 어떻게든 이나에게 다가오려 했으나 그 전에 몸이 전부 녹아 버렸다.
그러자 바깥에 있는 다른 골렘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오기를 망설였다.
[우와! 파인 굉장해!]
순식간에 미니 골렘들을 싹 녹여 버리자 이즈와 리카가 허공에서 방방 뛰었다. 그에 파인이 으쓱했다.
반면 이나는 동굴 안쪽을 가만히 응시했다.
“방심하지 마. 온다.”
쿵, 쿵-
동굴 안쪽에서 나온 거대한 얼음 골렘이 이나를 보고 멈칫했다. 정확히는 이나 뒤편에서 녹아내리는 미니 골렘들을 본 것이었다.
“쿠워어어!”
분노한 얼음 골렘이 이나를 향해 뛰어왔다. 꽤 위협적인 상황이었지만 이나는 침착함을 유지했다.
“파인.”
[간다!]
이나의 몸에서 마나가 쑥 빠져나갔다. 파인이 가져간 것이었다.
잠시 후, 허공에서 불로 이루어진 회오리가 생겨나더니 얼음 골렘을 집어삼켰다.
“쿠어?”
멈칫한 얼음 골렘이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두꺼운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럴수록 불에 닿은 부위만 녹아내렸다.
“쿠워어어……!”
얼음 골렘의 형체가 점점 작아지더니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골렘의 울음소리가 마치 원통한 것처럼 들렸다.
이내 파인이 회오리를 없애자 그곳엔 골렘의 핵만이 남아 있었다. 이나는 그것을 보고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간단하게 끝내 버릴 줄이야.’
처음 이곳을 공략했을 때의 위험했던 상황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역시 약점을 공략하는 게 최고라니까.’
핵 앞으로 걸어간 이나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인벤토리 한 칸을 채운 얼음 골렘의 핵을 보자 만족에 찬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하지만 올라간 입꼬리는 다시 내려앉았다.
‘이렇게 해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녀에게 핵을 의뢰한 아저씨가 생각났다.
그는 아픈 딸을 위해 핵을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겉보기에 그의 가정 형편으로는 핵의 값을 감당할 수 없어 보였다.
뿐만 아니라 딸의 상태도 걱정이었다. 3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해 약해질 대로 약해진 딸이, 과연 이 이상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어.’
유일하게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아이템은 지구의 누구도 어떻게 얻는지 모르는 상태. 그것을 이나가 찾을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이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정령들이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다가왔다.
[이나야, 괜찮아?]
[내가 힘 너무 많이 쓴 거야?]
“그런 거 아냐. 그보다 다들 수고했어.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이나는 열린 게이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령들도 그런 이나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쪼르르 따라갔다.
***
다음 날도 이나는 새벽부터 일어나 당산역의 B급 던전을 공략했다.
그리고 오늘로 같은 던전을 공략한 지 세 번째 되는 날이었다.
[봤어, 이나야? 내가 작은 골렘들을 바람으로 전부 날려 버렸어!]
“어. 봤어.”
[나도 거대 골렘을 한 번에 녹여 버렸는데!]
“그래. 수고했어.”
칭찬을 바라는 정령들의 말에 대충 대꾸하며 이나는 핵을 주웠다.
이걸로 그녀가 모은 ‘얼음 골렘의 핵’은 총 세 개. 9억 상당의 마정석을 얻은 셈이었다.
그럼에도 이나는 찝찝했다. 지금도 힘들어하는 아저씨의 돈을 가져가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동시에 아저씨가 말한 ‘얼음 여왕의 눈물’이라는 아이템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이미 던전은 공략됐어.’
지금도 눈앞에 떠다니는 시스템 창이 그 증거였다.
⌜B급 던전 ‘설원 속에서 태어난 괴물’ 공략에 성공하셨습니다!⌟
⌜1SP를 획득하셨습니다.⌟
아무래도 같은 던전을 여러 번 공략하면 보상으로 주는 SP도 줄어드는 모양이었다.
시스템 창을 가만히 노려보던 이나가 골렘의 핵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만 가자. 여기서 할 일은 다 했어.”
[네에!]
정령들이 동굴을 나가는 그녀를 따라왔다.
한 정령, 리카만 빼고.
“리카? 안 가?”
[갈 거야! 근데 이나야, 저 동굴 안쪽에는 뭐가 있어?]
“음?”
리카의 말에 이나도 동굴 안쪽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얼음 골렘을 해치우면 던전이 공략돼서 저 안쪽으로 가 볼 생각은 해 보지 못했다.
“그러게. 뭐가 있으려나.”
이나도 궁금증이 일었다. 어쩌면 저곳에서 ‘얼음 여왕의 눈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 수도 있었다.
이나가 말을 꺼내자 정령들도 호기심이 일었는지 안쪽으로 날아갔다.
[나! 나 가 볼래!]
[앗! 같이 가!]
이즈와 리카가 동굴 안쪽으로 날아갔다. 별수 없이 이나도 파인과 함께 두 정령을 따라갔다.
동굴은 꽤 넓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굴의 높이도 점점 더 높아졌다.
그리고 안쪽으로 꽤 들어온 이나는 막다른 길을 마주했다.
[아무것도 없네!]
“그러게.”
이나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하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거라곤 그녀 앞을 막은 거대한 얼음의 벽뿐이었다.
‘여기가 맵의 끝인가?’
이나는 얼음으로 된 벽을 손등으로 툭툭 쳐 보았다. 그러나 벽은 미동도 없었다.
[이나야, 이것도 다 녹여 볼까?]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데. 괜히 힘 빼지 말고 그냥 돌아가자.”
[그치만 이 안에 그 눈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동굴 바깥으로 향하던 이나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건 그렇긴 한데…….”
[녹여 보자! 응? 응?]
“하아…….”
이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거대한 얼음의 벽을 보며 파인에게 말했다.
“그래. 뭐라도 해 보자.”
[와아! 그럼 간다!]
펄쩍 뛴 파인이 이나의 힘으로 불을 일으켰다.
화르륵-
거대한 불의 벽이 얼음으로 된 벽을 타고 올라갔다. 보기만 해도 엄청난 열기였지만 가까이 있는 이나는 전혀 뜨겁지 않았다.
‘파인이 내가 다치지 않게 힘 좀 썼나 보네.’
픽 웃은 이나는 벽을 응시했다. 얼음의 벽이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벽이 어느 정도 녹고 나자 파인이 불을 거두었다. 그러자 의외의 광경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