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149)

늦은 밤, 한 병실에서 불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병실 안에는 병원 침대에 누운 채 색색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여자와 그 옆에서 여자의 손을 붙잡고 있는 초췌한 몰골의 중년 남자가 있었다.

여자의 아빠로 보이는 그는 마치 기도하듯 딸의 손을 붙잡아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수아야…….”

남자의 눈이 뜨이고 어두운 눈빛이 의식을 잃은 딸에게 닿았다.

“조금만 참아라. 내가 한 헌터님에게 너를 고쳐 줄 아이템을 의뢰했으니까…….”

말을 잇던 그가 입을 다물었다.

고쳐 준다고? 거짓말이었다. ‘얼음 골렘의 핵’으로는 딸의 병을 낫게 할 수 없었다.

그저 임시 방책일 뿐.

이 와중에도 돈은 끊임없이 나가고 있었다. 병원비며, 아이템값이며, 딸이 돌아올 집의 세까지.

의뢰한 헌터에게 줄 마정석은 그가 지닌 마지막 재산이자 기회였다.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에게 의뢰를 한 이유도 그녀가 마정석을 원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 뭐 하나. 현실은 그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그는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대체 어떻게 해야…….’

그때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간호사가 그를 불러냈다.

“이수아 환자 보호자분, 잠시만…….”

“아, 예.”

그는 간호사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별거 아닌 일이었지만, 시간이 좀 소요되었다.

다시 병실로 돌아왔을 때, 그는 낯선 기운을 느끼고 흠칫했다.

“바람……?”

분명 창문을 닫아 뒀는데 지금은 활짝 열려 있었다.

“내가 깜빡한 건가……?”

그는 찝찝한 기분을 느끼고 다시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니 보조 침대 위에 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이건……?”

그것은 그가 물건을 의뢰한 헌터에게 주려고 숨겨 놓은 마정석 주머니였다.

‘난 꺼낸 적 없는데……?’

그는 불안한 마음에 얼른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혹시나 누가 가져갔을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안에는 마정석 대신 의외의 물건이 들어 있었다.

“이건…… 핵……?”

안에는 마정석 대신 ‘얼음 골렘의 핵’이 들어 있었다.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끼고 있던 그때, 그는 주머니 안에 다른 물건이 함께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을 꺼내 보니 웬 쪽지였다. 그는 얼른 곱게 접힌 쪽지를 펼쳐 보았다.

쪽지 안에는 얼음 결정과 함께 악필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쪽지 안에 들어 있는 얼음 결정을 딸에게 먹이세요. 그럼 치료할 수 있을 거예요.

ps. ‘얼음 골렘의 핵’은 예정대로 두고 갑니다. 마정석은 알아서 챙겨 갈 테니 너무 놀라지 마세요.]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손바닥 위의 얼음 결정을 바라보았다.

“설마……?”

그는 얼른 딸의 입에 그것을 넣어 보았다. 의식을 잃은 상태였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얼음 결정을 삼켜 냈다.

꿀꺽-

작은 결정이라 삼키는 데 무리는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그녀가 점점 안정을 찾아 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핵을 이용했을 때와 별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아빠……?”

“수, 수아야!”

딸이 깨어났다. 심지어 편해 보였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니? 모, 몸은 좀 어때?”

“괜찮은 것 같아.”

“괜찮다고?”

“응. 이제 머리도 안 아프고, 덥지도 춥지도 않아.”

“다행이다……. 다행이야…….”

그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에 당황한 것은 딸 쪽이었다.

“근데 아빠, 약을 찾은 거야?”

“그게 말이다…….”

그는 눈물을 닦아 내고 딸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 모습을 좀 떨어진 나무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나가 중얼거렸다.

“다행히 괜찮은가 보네.”

[그러게! 다행이다!]

정령들이 환호했다. 그 틈에 이나는 인벤토리를 열어 보았다.

“나도 대가였던 마정석은 챙겼고.”

이나는 나무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리카가 바람의 힘을 이용해 안전하게 착지시켜 주었다.

“의뢰도 끝났으니 이제 돌아가자.”

[근데 이나야, ‘얼음 여왕의 눈물’값은 안 받아도 돼?]

“서비스야, 서비스.”

비록 거래한 물건보다 값이 더 나가는 서비스긴 하지만.

그것을 눈치챈 정령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뿌듯하다는 듯 웃었다.

[이나 착하다!]

“뭐라는 거야, 쪼끄만 것들이.”

이나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부끄러운 감정은 숨기지 못했다. 붉어진 귓불이 그 증거였다.

그 탓에 이나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정령들의 칭찬을 들어야 했다.

***

이나가 다녀간 당산역 B급 던전.

얼음 여왕이 퇴치되고 동굴 안 공동은 고요했다.

인기척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 순간.

스으으-

허공에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떠올랐다.

안개 속에서 두 개의 붉은 빛이 나타났다. 그것은 마치 눈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상하군. 분명 느껴졌는데…….]

음산한 목소리가 안개 속에서 흘러나왔다.

[그래도 이곳에 있는 건 확실해.]

재차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안개는 중얼거림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꼭 찾아내고 말 테다.]

***

야밤에 착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이나는 그대로 뻗어 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이나는 출근 준비를 했다. 휴가가 끝난 것이었다.

덜 떠진 눈으로 아침밥을 먹고 있으니 정령들이 식탁 위에 앉아 재잘재잘 떠들었다.

[이나야, 오늘 회사 가는 거야?]

“어.”

[우리도 가는 거야?]

“너희가 회사를 왜 가?”

[그치만 우리가 있어야 위험한 상황에서 이나를 지켜 줄 수 있는데!]

“그래도 너희가 다 오면 시끄럽기만 하다고.”

정령들이 시무룩해했다. 그사이 다 먹은 그릇을 싱크대로 옮기던 이나가 대뜸 말했다.

“오늘은 파인만 데려갈 거야.”

[에엑?]

[나랑 리카는!]

“집 보고 있어.”

이즈와 리카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이나는 파인만 좋아해!]

[너무해!]

“틀렸어. 난 너희 모두 공평하게 좋아하지 않아.”

[흐에엥! 그러면 왜 파인만 데려가는 건데!]

“그야 공격 면에 있어선 불이 최고니까.”

반박할 말이 없는지 두 정령이 입을 다물었다. 이어 옷을 챙겨 입은 이나가 파인을 어깨에 올리고 두 정령을 쳐다보았다.

“그럼 갔다 올게. 집 잘 보고 있어.”

삐친 두 정령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든 말든 이나는 가 버렸다.

이즈와 리카는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닫힌 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나 너무해! 미워!]

[미워!]

뒤늦게 문에다 대고 소리쳐 봤지만 이나에게 닿을 리 만무했다.

시무룩해진 리카의 등을 두드리며 이즈가 비장하게 말했다.

[이나는 우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 이대로는 안 돼!]

[이대로 안 되면?]

리카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이즈는 작은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파업이야!]

[파업?]

[응! TV에서 봤어! 우리가 집안일을 하지 않으면 이나도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될 거야!]

[그치만 상대는 이나인걸? 집안일 안 했다고 우릴 쫓아내면 어떡해?]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이즈는 멈칫했지만 곧바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게 두려워서 가만히 있다간 이나가 우리 마음을 몰라준다구!]

[그건…… 그렇지만…….]

[난 할 거야, 파업! 리카 너는 어쩔래? 나랑 같이 할래?]

리카는 망설임 끝에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나, 나도 파업할 거야!]

[좋아!]

이즈가 사악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정령의 파업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보여 주겠어!]

***

이나는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 하품을 크게 했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회사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어깨 위에 앉은 파인이 물었다.

[이나야, 이즈와 리카는 정말 안 데려가도 돼?]

“어. 걔네 있음 시끄러워. 말이 많은 애들이니까.”

[그치만 서운해할 텐데.]

“그러다 말겠지.”

이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에 파인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사이 회사 건물에 도착했다. 이나는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 오랜만에 보는 직원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 이나 씨! 오랜만이에요. 속초 산불에 휘말렸다고 들었는데 괜찮아요?”

“네. 다행히도요.”

“진짜 다행이네요. 얼마 전엔 던전 브레이크에 휘말리더니, 이나 씨 혹시 저주라도 받은 건 아니죠?”

장난기가 담긴 말이었지만 이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주까진 아니지만 온갖 일에 휘말리는 느낌이 든 탓이었다.

그러자 말을 꺼낸 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설마 진짜……?’ 하고 중얼거렸다.

“아, 이나 씨, 왔어요?”

“네, 팀장님. 팀장님은 잘 쉬셨어요?”

“네. 쉰 만큼 일이 돌아오긴 했지만요.”

팀장이 한숨을 푹 쉬었다. 남 일이 아니었기에 이나의 미소도 미묘해졌다.

직원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마친 이나는 자기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신기한 듯 사무실을 두리번거리던 파인이 말했다.

[여기가 이나가 다니는 회사구나!]

“쉿. 여기선 특별한 일이 아니면 나한테 말 걸면 안 돼.”

“응? 이나 씨, 방금 뭐라고 했어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능청스럽게 대답한 이나가 어깨 위의 파인을 힐끗 보았다.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파인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도 계속 어깨 위에 있기는 심심할 테니…….’

이나는 파인을 들어 올려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파인이 의아해하며 바라보자 이나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책상 위에서 놀아. 뭐 망가뜨리진 말고.’

다행히 알아들었는지 파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나는 안심하고 일에 집중했다.

“어? 이게 뭐지?”

“왜 그래?”

시선이 쏠렸지만 말을 꺼낸 직원은 자신의 모니터 화면을 가만히 응시했다.

잠시 후, 그가 감탄사를 내뱉으며 말했다.

“와. 대박. 다들 이거 보셨어요?”

“뭐를?”

“어떤 이름 모를 헌터가 고칠 수 없다던 열병을 고쳤나 봐요.”

신경 쓰지 않고 일에 집중하던 이나도 멈칫하게 되는 말이었다.

이나는 태연함을 가장하며 그에게 물었다.

“그 기사, 어디서 볼 수 있어요?”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