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149)

“아, 이나 씨! 커피 사 왔어?”

대표가 평소보다 환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를 따라 맞은편에 서 있던 남자도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망할.’

이나는 속으로 욕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방도 그녀가 이곳에서 일하는 줄은 몰랐던 듯 놀란 눈치였다.

이나의 시선이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자 대표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이나 씨도 알지? 이쪽은 천조 길드의 길드장이신 이시현 헌터님. 오늘 마도구 유통 건으로 우리 회사에 잠깐 들르셨어.”

“아……. 네.”

시현의 복잡한 시선이 그녀에게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이나의 떨떠름한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묘한 기류를 읽은 것인지 대표가 물었다.

“혹시 아는 사이인가?”

“……네. 조금.”

대답은 시현이 했다. 그러자 대표의 얼굴이 한층 더 밝아졌다.

“이거 놀라운 인연이군요! 하하하!”

‘인연은 무슨.’

이나가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일 관련 얘기를 하려는 것인지 대표가 시현을 데리고 회의실로 향했다. 이나도 따라 들어가 손님들 자리에 커피를 내려놓은 뒤 회의실을 나왔다.

시현의 시선이 계속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얼른 끝내고 가라.’

그런 무언의 시선을 보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나가 자리로 돌아오자 회의실을 힐끔거리던 직원들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나 씨, 정말 이시현 헌터랑 아는 사이예요?”

“네. 어쩌다 보니.”

“어떻게 알게 된 사이예요? 혹시 사인 같은 거 부탁해도 되나?”

누군가의 기대 어린 물음에 이나는 난감하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 정도로 친밀한 사이는 아니에요. 전에 던전 브레이크에 휘말렸을 때 저를 구해 준 사람이 이시현 헌터였거든요.”

“아……. 그렇구나.”

궁금증이 풀린 직원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제야 해방감을 느낀 이나도 다시 일에 집중하기 위해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어?]

그때 파인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했다. 이나는 반사적으로 그쪽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창밖의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이즈?”

“네? 뭐라고요, 이나 씨?”

“아, 그게…….”

이나는 뻘뻘거리면서도 시선은 창밖에 고정했다. 하지만 이즈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멍하니 있던 이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팀장님, 죄송한데 제가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오늘은 이만 조퇴해도 괜찮을까요?”

“어……. 그러고 보니 안색이 창백하네요. 알겠어요. 들어가 봐요.”

“감사합니다!”

이나는 서둘러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아픈 사람치고 빠른 움직임에 남아 있는 직원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픈 사람 맞아?”

***

“헉, 헉…….”

이나는 숨을 헉헉 내쉬며 달렸다. 회사 근처를 다 돌아다니느라 진이 빠졌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젠장. 이즈 이 녀석은 대체 어딜 간 거야?”

이나는 뛰는 걸 잠시 멈추고 숨을 골랐다. 그녀의 입에서 짜증이 가득 쏟아져 나왔다.

“아니, 집을 지키고 있으랬더니 나오길 왜 나와! 진짜 혼나고 싶나.”

[이나야, 저기…….]

“왜?”

이나가 어깨 위의 파인을 쳐다보았다. 망설이던 파인이 그제야 진실을 알려 주었다.

[이즈와 리카, 파업한댔어.]

“뭐? 파업?”

[으응……. 이나가 이즈와 리카를 소중하게 생각할 때까지 일도 안 하고 반항할 거래.]

이나는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 더 황당한 것은 파인이었다.

“그걸 알고 있었으면서 왜 이제 말해?”

[그게…… 몇 번이나 말하려고 했는데!]

파인이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만나서 기분을 풀어 주든 화를 내든 일단 이즈를 찾아야 했다.

‘그 말썽꾸러기를 내버려 두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몇 번이나 주의를 주긴 했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청호 길드에서의 마정석 꿀꺽 사건은 아직도 이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게다가 이번엔 대놓고 반항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파인, 이즈의 기운 안 느껴져? 같은 정령이니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거 아냐.”

[으음……. 하지만 이즈와 리카가 알려 주지 말랬는데…….]

“쓰읍!”

[저, 저쪽이야!]

파인이 긴 꼬리로 이즈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이나는 서둘러 그쪽으로 달려갔다.

“……찾았다!”

한참 달린 끝에 이나는 멀리서 푸른빛으로 빛나는 이즈를 발견했다.

이나는 미간을 좁히며 외쳤다.

“야, 이즈!”

순간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지금 이나의 눈엔 이즈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외침을 들은 이즈가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이나를 발견한 이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나……?]

“얌전히 집 지키고 있으랬더니 왜 돌아다니고 있어! 어서 안 돌아가?”

이나가 엄하게 말했지만 이즈는 그럴수록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흥!]

“흐응? 이게 오냐오냐하니까 아주…….”

[이나 바보! 멍청이! 우리 마음도 몰라주고!]

“뭐?”

이나가 황당해하며 쳐다보았지만 이즈는 단단히 삐친 듯 울분을 담아 외쳤다.

[나도…… 나도 이나 곁에 있고 싶단 말이야! 이나 지켜 줄 수 있단 말이야!]

“너…….”

[이나는 우리 필요 없어 해! 그러니 나도…… 나도 이나 필요 없어!]

빼액 소리 지른 이즈가 날아갔다. 잠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이나도 한 박자 늦게 이즈를 따라갔다.

“거기 안 서!”

[이나 바보!]

“이게 누구보고 바보래?”

이나가 헉헉거리며 이즈를 따라갔다. 이러고 있으니 누군가가 간절히 떠올랐다.

‘리카가 있었다면 금방 따라잡았을 텐데.’

하지만 리카도 함께 파업 중이라고 들었다. 이 짓을 한 번 더 반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이나는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따라간 보람이 있는지 이즈가 막다른 길에 봉착했다.

정확히는 A급 던전의 게이트 앞이었다.

하지만 이즈가 거기로 들어갈 리는 없으니 이나는 마음 놓고 이즈에게 말했다.

“포기하고 이리 와.”

[이익…….]

이즈가 뒤에 있는 게이트를 힐끔 보았다. 갑자기 가슴이 싸해지자 이나가 말을 덧붙였다.

“너…… 이상한 생각 하지 마.”

[하면 어쩔 건데?]

“너 거기 들어가면 네 힘으론 다신 못 나와! 알아?”

이즈가 멈칫했다. 게이트와 이나 사이에서 갈등하던 이즈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한텐 이나가 전부였어. 하지만 이나가 날 봐 주지 않는다면…….]

“이즈!”

이나가 이즈를 붙잡기 위해 달렸지만 이즈는 게이트를 향해 날아갔다.

[여기든 던전이든 상관없어!]

“야!”

이즈가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허망히 보던 이나가 중얼거렸다.

“이런 미친…….”

[이나야, 어떡해?]

파인이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한참 게이트를 노려보던 이나가 말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이나가 결계 안으로 들어섰다.

“잡아서 따끔하게 혼을 내 줘야지.”

***

[흐어엉……. 이나 미워……. 미워!]

게이트를 통과한 이즈는 오열했다.

하지만 눈을 뜨자 바뀐 풍경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여긴 어디지……?]

아직 밝던 바깥과 달리 이즈가 건너온 던전은 깜깜한 밤이었다.

심지어 묘비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어서 공포심이 더욱 커졌다.

[흐엥……. 무서워…….]

그때 뒤쪽에서 무언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듣자마자 이즈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날아갔다.

[무서워! 무서워!]

이즈는 눈을 질끈 감고 귀를 틀어막고 그저 앞으로 직진했다. 그렇게 한참을 갔다 싶었을 때, 이즈는 이동을 멈추고 눈을 슬쩍 떠 보았다.

[……어?]

그런데 앞에 그림자가 져 있었다. 이즈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상대방과 눈이 마주치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방은 머리가 없었으니까.

[꺄아아아악!]

이즈가 높다란 목소리로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머리 없는 인간형 몬스터가 검을 꺼내 휘둘렀다.

검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검은빛을 보자 이즈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정령이라지만 저 오러에 맞으면 다칠 게 분명했다.

[이나야……!]

마지막까지 이나가 떠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이나에게 붙는 건데.

하지만 후회는 이미 늦었다. 몬스터가 검을 높이 들어 이즈를 향해 휘둘렀다.

그리고 그 순간, 익숙한 불길이 이즈와 몬스터 사이에 피어올랐다.

화르륵-

[……이건?]

몬스터는 갑자기 피어오른 불길에 당황한 듯 뒤로 물러섰다. 그것을 멍하니 보고 있던 이즈의 몸이 누군가의 손에 붙들렸다.

“이 바보야! 왜 멍하니 보고만 있어? 물로 공격하든 방어를 하든 해야 할 거 아냐!”

[……이나?]

이즈가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마냥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즈는 울먹이며 이나에게 안겼다.

[흐에에엥……. 이나야, 나 너무 무서웠어!]

“얼씨구. 나 필요 없다고 던전에 들어갈 땐 언제고.”

[그, 그건…….]

할 말을 잃은 이즈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눈치를 보는 이즈를 보며 이나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다신 이런 짓 하지 마. 너희가 사라지면 곤란하니까.”

[……곤란하다고?]

“당연하지. 너 같으면 가족이 사라졌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이나의 말에 이즈가 멍하니 물었다.

[내가 가족이야?]

“같이 사니까 가족이나 마찬가지지.”

[가족……. 가족!]

이즈의 얼굴에 미소가 천천히 피어올랐다. 그 모습을 이나가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싫다고 갈 땐 언제고 이젠 또 웃네.”

[안 싫어! 이나가 최고야!]

“참 나.”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이즈를 보며 이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입가엔 미처 숨기지 못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본 파인도 흐뭇하게 웃었다.

“그으…….”

그때 스산한 소리가 그들의 귓가에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머리 없는 몬스터가 그들을 향해 검을 세우고 있었다.

이나는 귀찮다는 얼굴로 몬스터를 쳐다보았다.

“저놈은 머리도 없는데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거야? 귀찮게. 파인.”

[응! 이나야.]

이나가 몬스터를 가리키며 간단하게 명령했다.

“저거 태워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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