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어어…….”
비명 소리가 불기둥 안쪽에서 들려왔다.
시현은 그 광경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아마 이 열기라면 몸은 물론이고 심장까지 태워 버릴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이나가 힘을 거두었다. 동시에 불기둥이 자취를 감추었다.
“이나 씨? 왜…….”
시현이 왜 끝내 버리지 않느냐는 듯한 시선으로 이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나는 허공을 빤히 응시했다.
⌜A급 던전 ‘목 없는 자의 한’ 공략에 성공하셨습니다!⌟
⌜‘죽은 자의 갑옷(B)’을 획득하셨습니다.⌟
⌜3SP를 획득하셨습니다.⌟
함께 싸운 것치곤 많고, A급 던전치곤 적은 스탯 포인트였다. 두 이유가 합쳐져 3SP를 얻은 모양이었다.
시스템 창을 보던 이나는 더 이상 그것에 신경 쓰지 않고 듀라한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냉기가 흐르는 검’을 꺼내 팔다리를 잃은 채 새카맣게 타 버린 듀라한의 몸통을 푹 찔렀다.
[꺄아아악! 이나 또 시작이다!]
“이나 씨, 뭐 하는…….”
멍하니 서 있다가 다가온 시현이 말을 멈추었다. 이나가 듀라한의 시체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낸 탓이었다.
“이건…… 마정석?”
“A급 던전의 보스 몬스터라 그런지 확실히 마정석도 크네요.”
이나가 흡족하다는 듯 웃었다. 그러곤 시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거 내가 가져도 되죠?”
“……듀라한을 해치운 건 이나 씨니 마음대로 하십시오.”
“좋아요.”
이나는 망설임 없이 인벤토리에 A급 마정석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죽겠네. 힘을 더 썼다간 제가 먼저 쓰러졌을 거예요.”
“혹여나 이나 씨가 쓰러졌어도, 이길 순 있었을 겁니다. 그 정도의 열기라면.”
이나가 픽 웃었다. 지친 듯한 미소였지만 만족감이 짙게 묻어 나왔다.
그 미소를 가만히 보던 시현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보다 얼른 이곳을 나가죠.”
“나가기 전에 할 일이 있어요.”
“무엇입니까?”
이나가 그의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까 우리가 쓰러뜨린 잡몬스터들 있잖아요.”
“네.”
“걔네 마정석들도 좀 챙겨 갑시다.”
시현의 얼굴에 황당함이 비쳤다. 하지만 이나는 진심이었다.
이나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챙기는 거 도와줄 거죠?”
***
그녀의 부탁대로 시현은 마정석 챙기는 일을 도와주었다.
그걸 모두 어디에 쓸지까지는 묻지 않았다. 그래서 이나도 맘 편히 계산했다.
‘어디 보자. 보스 몬스터의 마정석까지 합해서 대충 350억쯤 되겠네.’
잡몬스터여도 A급은 A급이었다. 비록 보스 몬스터의 것보다 크기는 작았지만 값은 꽤 나갈 터였다.
이제 빚이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에 이나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다 그녀는 시현을 힐끗 보며 물었다.
“천조 길드장씩이나 되시니 가난한 자의 마정석을 나눠 갖진 않으시겠죠?”
“……다 가져가십시오.”
“야호.”
이나가 작게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시현은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게이트를 나오고, 이나는 시현을 홱 돌아보았다.
“미리 말하지만, 얌전히 따라갈 생각은 없어요.”
“각성자이면서 헌터 등록을 하지 않는 것은 불법입니다.”
시현이 지지 않고 말했다. 이나는 눈살을 찡그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어차피 그쪽과는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왜 그렇게 저한테 집착하는 건데요?”
“혹시 일어날지 모를 불미스러운 일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를 것처럼 보이나요?”
망설임 없이 대답을 해 나가던 시현이 그 질문에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이나가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범죄를 저지를 거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는 탓이었다. 이건 순전히 그의 감이었다.
우물쭈물하던 시현이 아까보다 힘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헌터 등록은 해 두십시오. 정 헌터로서 활동하기 귀찮으시면 등록만 하고 활동은 안 하면 되지 않습니까.”
“최근 들은 말 중에 가장 재밌는 말이네요.”
이나가 한쪽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쪽 말대로 저는 헌터로 활동하기 싫어요. 그저 평범한 삶을 살고 싶거든요. 지금처럼 회사 다니고, 퇴근해서 맥주 한잔 하며 힐링하고, 휴일에는 놀러도 가는, 그런 삶이요.”
“하면 되지 않습니까.”
“제 능력을 보고서도 그런 소리가 나와요?”
시현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이나의 능력은 그가 보았을 때 최소 A급의 재능이었다. 협회도, 그리고 길드도 탐낼 만한 상급 헌터가 바로 그녀였다.
그녀의 능력이 알려지면 분명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될 테고, 여러 길드에서 스카우트를 받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녀가 바라는 평범한 생활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곤란하군.’
불법이나 범죄를 눈감아선 안 된다는 그의 신념과 한 소시민의 바람 사이에서 시현은 갈등했다.
시현은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불의를 참지 못했고, S급 헌터로 각성하고 난 뒤부터는 자신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그리고 나아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곳을 지키겠다고 결심했다.
길드의 이름을 ‘천조(天鳥)’라고 지은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새처럼 하늘에서 모든 걸 내려다보고 곤란한 사람을 돕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각오가 이런 식으로 그의 발목을 잡게 될 줄은 몰랐다.
[우리 이나 괴롭히지 마!]
그때 허공에서 웬 요정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능력이 밝혀진 이상 더는 몸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이즈였다.
이즈를 본 시현이 잔뜩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이, 이게 뭡니까?”
“정령이에요.”
“정령?”
이나를 보니 그녀의 어깨 위에도 도마뱀 형상을 한 정령이 올라타 있었다. 이나는 파인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무심하게 설명해 주었다.
“정령은 자연의 힘을 쓰는 존재. 얘네를 다루는 것이 제 능력이에요.”
“정령이라는 것이 이 세계에 존재했다는 말입니까?”
“음. 뭐, 쭉 있기는 했죠. 그쪽도 몇 번 봤을걸요?”
“무슨…….”
“정체불명의 알 말이에요.”
시현이 멈칫했다.
“……설마 그게 정령이었단 말입니까?”
“맞아요.”
“당신은 그 알을 깨울 수 있고요?”
“네. 저밖에 못 하는 일이죠.”
시현이 입을 벙긋거렸다. 갑자기 쏟아진 새로운 정보의 위력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었다.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지면, 이나는 평범한 생활과는 한 발짝 더 멀어지게 된다.
“그래서, 어떡할 거예요? 절 헌터 협회에 넘길 건가요?”
이나가 감정 없는 눈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겉보기엔 알리나 마나 상관 안 할 것처럼 보였지만, 시현은 오히려 그래서 그녀의 바람을 엿볼 수 있었다.
한참 고민하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
[이나야, 다행이다. 그치?]
“다행은 뭐가 다행이야. 애초에 네가 가출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 없었어.”
[그, 그건 그렇지만…….]
이즈를 째려보던 이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즈의 말대로 다행이긴 했다.
“협회엔 알리지 않겠습니다.”
시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고민을 끝낸 그는 흔들림이 멈춘 눈동자로 이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만약 이나 씨가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른다면, 그땐 저도…….”
“그럴 일 없거든요? 전 연차 쓰는 것도 아까워서 쓸 때마다 심장이 철렁하는 심약한 소시민이라고요.”
시현이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던 것이 잊히지 않았다. 그게 보스 몬스터를 태워 버리고 시체를 푹푹 찌르던 사람이 할 말이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니 픽 웃음이 나왔다.
융통성 없는 꽉 막힌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집이다아!]
집으로 돌아온 이즈가 외쳤다. 이나는 문을 닫고 얼른 집 안을 둘러보았다.
“리카, 있어?”
그녀가 허공에 대고 물었지만 리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즈에게 눈짓하자 이즈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리카 저깄다!]
이즈가 가리킨 곳을 보자 커튼 뒤쪽에 꽁무니를 쏙 빼 놓은 리카가 보였다. 저걸 숨은 거라고 생각한 건지 황당했지만 이나는 리카에게 다가갔다.
“리카, 나와.”
[……나, 나 파업 중인데!]
“알아. 이즈에게 들었어.”
리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공중에 떠 있는 이즈를 본 리카가 고개를 갸웃했다.
[파업 끝난 거야……?]
[응! 끝났어!]
이즈가 해맑게 말했다. 리카는 이나의 눈치를 힐끗 보았다.
그에 이나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미안.”
정령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이나가 사과를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나야, 왜 그래? 뭐 잘못 먹었어?]
이즈가 동공을 흔들며 물었다. 이나는 황당했지만 애써 감정을 꾹 누르고 말을 이었다.
“내가 그동안 너희에게 무심했던 것 같아. 너희는 내 가족이야. 필요 없다고 느낀 적 한 번도 없으니까 그만 기분 풀어.”
[이나야…….]
리카가 울망한 눈으로 이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나는 괜히 부끄러워져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혹시 원하는 거 있음 말해. 사과의 의미로 들어줄게.”
[원하는 거? 뭐든?]
“그래. 뭐든.”
이나가 씩 웃으며 못을 박았다. 계약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정말 해 줄 것 같았다.
이나도 그걸 예상했다.
[그럼 있잖아…….]
리카가 이나의 눈앞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외쳤다.
[용서해 줘!]
“뭐?”
[시, 실은…….]
리카가 커튼 뒤쪽을 힐끔 보았다. 쎄한 기분이 느껴져 이나는 얼른 커튼을 젖혀 보았다.
커튼 뒤 베란다에 정령의 알이 가득 놓여 있었다.
[파업을 하려면 반항부터 해야 한다고 이즈가 그래서…….]
리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나의 주위를 뱅글뱅글 날았다. 이즈도 스리슬쩍 도망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 자리에 굳어 있던 이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집을 한껏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