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149)

“어? 이나 씨!”

이나가 고개를 돌리자 한 술집 앞에서 바람을 쐬고 있던 남자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에 이나는 기억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떠올렸다.

“아. 오빠의…….”

“기억해 주시는군요! 오랜만이에요! 유 팀장님 밑에서 일하고 있는 김우림입니다.”

술을 마신 건지 그의 뺨이 조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나는 얼른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어색하게 웃어 보이다가 예의상 물었다.

“회식이라도 나오셨나 봐요.”

“네. 친구들이랑 술을 좀 마시다가 깨려고 잠시 나와 있었는데 마침 이나 씨가 지나가시길래…….”

그는 기쁜 듯이 주절거렸지만 이나는 귀찮았다. 애초에 오빠인 이한의 팀원을 함부로 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나가 헤어질 타이밍을 엿보고 있는데 그는 그럴 생각이 없는지 이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나 씨도 회식 나오셨나요?”

“네. 지금 들어가는 길이었어요.”

그러니 좀 놔라.

그런 의미를 담고 바라보자 눈치가 아예 없는 건 아닌지 그가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러시군요. 제가 퇴근길을 방해한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방해하다뇨. 아니에요.”

“정말요? 그럼…… 제가 지하철역까지 모셔다 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이제 보니 눈치 없는 게 맞았구만.

이나가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았지만 그는 꿋꿋했다.

“밤길은 위험하니까요. 게다가 여긴 치안 상태도 별로라 시비가 걸릴 수도 있고요.”

“아뇨. 괜찮아요.”

결국 참다못한 이나가 단호히 말했다. 그가 조금 당황한 듯하자 이나는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리고 우림 씨는 일행도 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마음은 감사하지만 혼자 갈게요. 그럼 이만.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이나는 그의 대답을 듣지 않고 몸을 홱 돌렸다. 그와 동시에 이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진짜 피곤하게 구네.’

그의 마음을 짐작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귀찮은 건 귀찮은 거였다.

[어? 저 TV에 전에 우리가 도와준 아저씨 나온다!]

리카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옆에 있는 술집 TV에서 그녀에 관한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난번 ‘얼음 여왕의 눈물’을 이용해 한 아저씨를 도운 일이었다.

화면을 빤히 보던 이나는 괜히 낯이 뜨거워져 자리를 뜨려 했다. 마침 들리는 껄렁한 말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곤경에 빠진 시민을 도운 정의로운 헌터? 그것도 정체를 모르는? 참 나.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무슨 만화 속에 나오는 괴도 캐릭터냐고.”

“그러게나 말이다. 분명 짜고 치고 내보낸 기사일 거야.”

거기까진 들어 줄 만했다. 하지만 대화가 이어질수록 수위는 점점 거세졌다.

“그래도 조금 궁금하긴 하네. ‘얼음 여왕의 눈물’은 지금 어디서도 못 구한다며?”

“애초에 그 아이템을 본 사람이 저 양반뿐이잖아. 거짓말 아니야? 게다가 헌터도 아니고 일반인이라며?”

“하긴. 이 기회에 올라타 후원이라도 받으려는 걸 수도 있지.”

“알고 보니 그런 거지. 단순한 감기인데 의사가 멍청해서 못 알아본 걸 수도.”

“크하하! 진짜 그런 거면 병원도 저 양반도 ×신이구만!”

의심에서 끝났으면 이나도 그냥 넘어갔을 터였다.

하지만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최선을 다하던 아저씨가 저런 취급을 받자 기분이 불쾌해졌다.

[나 저 사람들 싫어!]

[아저씨는 거짓말 안 했는데!]

‘그러게나 말이다.’

이나가 눈살을 찌푸리고 쳐다보자 맥주잔을 든 남자들이 그녀 쪽을 쳐다보았다.

“야. 저 여자가 우리 쳐다보는데?”

“그러게. 이봐, 아가씨! 우리랑 놀래?”

이나의 미간에 생긴 주름이 더욱 진해졌다. 이나는 한숨을 살짝 내쉬고 가던 길을 가려 했다.

“어디 가? 우리 말 못 들었어?”

이나가 멈칫했다. 방금 술집 앞 야외 테이블에 있던 남자가 순식간에 그녀 앞으로 이동한 탓이었다.

‘헌터인가?’

이런 속도는 헌터인 것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이나는 그를 째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비켜요.”

“까칠하구만.”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술 냄새에 이나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하. 진짜.”

이나는 그의 옆으로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그 또한 이나가 가려는 방향으로 슬쩍 몸을 이동했다.

황당하다는 듯 올려다보자 남자가 껄렁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우리랑 따악 한 잔만 하고 가.”

“싫다니까요?”

“거 되게 까칠하네. 인기 없지?”

“헛소리하지 말고 꺼지라고.”

이나가 누르고 있던 귀찮음과 분노를 드러냈다.

그러자 남자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험악하게 변했다.

“지금 나한테 한 소리야?”

“여기 너 말고 더 있냐?”

“이게……. 내가 누군 줄 알고!”

“네가 누구든 관심 없으니까 좀 비켜.”

이나가 그를 무시하고 그대로 지나쳤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던 남자가 그녀에게로 팔을 뻗었다.

텁.

하지만 그 팔은 이내 누군가에게 붙잡혔다.

이나가 고개를 돌리자 남자의 팔을 붙잡고 있는 김우림이 보였다.

그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입을 열었다.

“그, 그, 그만하세요!”

……비록 좀 약해 보이긴 했지만.

“이 띨띨한 놈은 또 뭐야?”

남자도 같은 생각인지 김우림을 황당해하며 쳐다보았다. 몸을 움찔 떨던 김우림이 말을 이었다.

“허, 헌터시죠? 헌터가 일반인에게 해코지하는 건 불법입니다! 여기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협회에 신고하겠습니다!”

‘오.’

이나는 솔직히 조금 감탄했다. 그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사실 김우림 본인도 몰랐다. 그저 이나에게 멋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을 뿐인데.

그는 감탄한 듯한 이나의 눈치를 보며 어깨를 폈다. 하지만 다시 쪼그라들었다.

“하! 이것들이 진짜……. 신고? 해 보든가!”

“뭐라고요?”

“하지만 그 전에 여길 무사히 벗어나야 할 거다.”

“무슨…… 악!”

김우림의 손목이 순식간에 꺾였다. 처음 느껴 보는 고통에 비명이 흘러나왔다.

금세 주변이 시끌벅적해졌다.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남자의 친구가 험악한 얼굴로 막았다.

“지금부터 사진 찍는 놈 있으면 우리랑 면담해야 할 거다.”

그 탓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순식간에 흩어졌다.

하지만.

찰칵-

늘 그렇듯 어김없이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나였다.

“야! 당장 안 지워?”

“싫은데?”

건방지게 대답한 이나가 냉큼 핸드폰을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사람들이 사진을 못 찍도록 막던 놈이 다가오려 하자 이나가 뒤를 힐끔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한 발짝이라도 다가오면 다리 잘릴 각오 해라.”

“이게 어디서 개수작을……!”

“개수작 같아 보이냐?”

핏-

그때 무언가가 그의 바지를 스쳤다. 그가 고개를 내리자 무언가에 베인 듯 길게 찢어진 바짓단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왜……?’

그가 주춤하는 사이 이나는 이번엔 김우림의 손목을 잡은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도 마찬가지야. 그 손 당장 안 놓으면 팔 날아갈 줄 알아.”

“하! 웃기는 협박이군.”

“그래도 협박인 건 알아서 다행이네.”

이나가 싱긋 웃었다.

“모르면 그냥 자르려고 했거든.”

“뭐?”

눈을 치켜뜬 남자가 김우림의 손목을 놓고 이나에게로 팔을 뻗었다.

“이게 감히……!”

하지만 그의 손끝이 이나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때마침 살랑 불어오던 바람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의 목을 스쳤기 때문이었다.

목에서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남자가 섬뜩한 기분에 그 상태로 굳어 있자 이나가 속삭였다.

“봐주는 건 이번뿐이야.”

덜덜 떨던 남자가 이나의 눈빛을 마주했다.

그를 벌레 취급 하듯 깔보는 시선이었다.

“꺼져.”

“……젠장!”

남자가 제 친구를 데리고 서둘러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며 정령들이 외쳤다.

[가라! 다신 오지 마!]

[나도 혼쭐을 내 줬어야 했는데!]

[이나야, 지금이라도 내가 태워 버릴까?]

이나는 정령들의 말을 깔끔히 무시하고 김우림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괘, 괜찮……. 근데 뭘 어떻게 하신 거예요? 혹시 헌…….”

“헌터는 무슨. 그냥 헌터인 척해 본 거죠. 저도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어요.”

이나는 일부러 손끝을 잘게 떨었다. 그를 속이기 위한 연기였다.

‘이러다 수전증 걸리겠네.’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 김우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먹혀서 다행이네요.”

‘이 사람도 보면 참 띨띨하단 말이야.’

시현이나 서준 같았으면 바로 의심부터 할 텐데 말이다.

그래도 리카가 일부러 안 보이는 쪽으로 상처를 내서 다행이었다. 그녀가 능력을 썼다는 걸 들키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이나는 허공에 떠 있는 리카를 잘했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나의 칭찬을 알아들은 리카가 부끄러운 듯 날개를 파닥거렸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우림 씨도 아까 그 사람들 마주치지 않게 얼른 들어가세요.”

“네? 아, 이나 씨……!”

김우림이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이나는 얼른 자리를 피했다.

***

곧바로 집으로 돌아온 이나는 가장 먼저 소파 위에 널브러졌다.

“아. 피곤해.”

[이나야, 안 씻어?]

“씻을 거야. 좀 있다.”

하지만 몸은 더욱더 소파와 하나가 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우스운지 정령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그녀의 배 위로 올라온 파인이 말을 꺼냈다.

[이나야, 알은 안 깨울 거야?]

“아.”

이나의 미간이 반사적으로 좁아졌다. 눈치 없는 이즈와 리카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맞아! 알 깨우러 가자!]

[고고!]

“이것들이……. 조용히 안 해? 이게 그렇게 간단한 일인 줄 알아?”

이나가 한 소리 하자 정령들이 입을 다물었다.

한숨을 내쉰 이나는 몸을 일으켜 방에 있는 옷장 앞으로 걸어갔다.

끼익-

옷장 문을 열자 각 계절별 겉옷들이 걸려 있었다. 이나는 옷들을 양쪽으로 촤악 펼쳤다.

그곳에는 어젯밤 리카가 협회에서 가져온 정령의 알들이 구석에 모여 있었다.

그냥 봐도 열 개는 충분히 넘어 보였다. 다시 보니 이 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이나는 골치가 아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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