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카 너…….”
[흐, 흐흠!]
이나가 째려보자 리카가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으니까.
사실 리카가 일을 쳤다는 걸 깨닫고 협회에 알을 돌려놓으려고 새벽에 몰래 가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땐 이미 알이 사라진 걸 들켜서 경계가 삼엄해진 뒤였다. 함부로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알을 그대로 들고 와야 했다.
[뭐가 고민이야! 그냥 다 깨워 버리자!]
눈치 없는 이즈가 눈을 빛내며 의견을 표출했다.
사실 알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증거를 없애는 방법으로 부화가 있긴 했다.
하지만.
‘이런 녀석들이 더 늘어난다고?’
회사, 집 할 것 없이 하루 종일 시끄럽게 떠들 정령들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귀가 아파 왔다.
그나마 파인이 얌전하긴 하지만, 파인 같은 정령만 나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렇다고 인벤토리에 보관하자니 좀 많고.
고민하던 이나는 알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세 개의 알을 품에 안고 다시 옷장 문을 닫았다.
[왜 세 개만 꺼내?]
“나한테도 적응할 시간을 줘야지.”
시끄러움에 적응할 시간 말이다.
이나는 세 알을 들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탁자 위에 그것들을 내려놓은 이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은 이 녀석들만 부화시킬 거야.”
[와아! 새 친구다!]
세 정령이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모두의 관심을 받으며 이나가 알에 정령의 힘을 불어넣었다.
파앗-
기다렸다는 듯 알들이 번쩍 빛났다.
미리 커튼을 쳐 놔서 다행이었다. 밖에선 보이지 않을 테니까.
잠시간의 기다림 후, 시끄러운 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울렸다.
[크하하하! 드디어 깨어났다!]
이나는 본능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시끄러운 놈이 하나 있었구만.’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알을 고르는 건데.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시간은 지나간 뒤였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지고 세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긴 어디지……?]
어쩐지 조금 위축돼 보이는 인간의 모습을 한 정령.
[…….]
다른 정령들과 달리 침묵한 채 상황을 살피는 난쟁이 모습의 정령.
[이봐! 너희들이 날 깨운 건가?]
그리고 몸 주변에서 스파크가 튀는 호쾌한 성격의 원숭이 정령.
아무래도 이번 정령들은 가지각색의 성격을 지닌 듯했다.
***
새로 깨어난 정령들은 차례대로 얼음, 땅, 전기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나는 세 정령에게 각각 윈티, 네움, 볼트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윈티와 네움은 조용한 편이었다. 특히 네움은 이나가 지어 준 자신의 이름을 한 번 중얼거리고는 쭉 말이 없었다.
문제는 볼트였다.
[여기가 회사라는 곳인가!]
세 정령 중 가장 시끄러운 볼트가 사무실 안을 쏘다녔다.
볼트에게서 간헐적으로 전기가 파직, 하고 튀어서 이나는 불안해 계속 그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결국 안 되겠다 싶어 이나는 화장실에 가는 척 볼트를 붙잡고 자리를 비웠다.
“좀 얌전히 있어.”
[얌전히 있었다!]
“그게 얌전히 있는 거냐? 흥분하면 아주 벼락이 치겠네.”
[오. 어떻게 안 거지? 역시 내 계약자가 될 인간답군!]
“……환장하겠네.”
이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말을 이었다.
“얌전히 안 있으면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쫓아낼 줄 알아.”
[쫓아내다니! 거 너무한 거 아닌가!]
“너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다른 애들처럼 내 자리 옆에 가만히 앉아 있어. 알겠어?”
볼트는 툴툴거리긴 해도 반발하지는 못했다.
이나는 이 세계의 유일한 정령사. 즉, 그들을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니까.
그제야 볼트가 조용해지자 이나는 볼트를 데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다른 정령들은 그녀의 책상과 자리 옆에 옹기종기 앉아 재잘대고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일하기에 나쁜 환경은 아니었다. 이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일에 집중했다.
“자 자, 조금 있다 거래처에서 중요한 손님이 올 테니까 다들 대기하고 있어!”
‘……젠장.’
이나는 마우스를 망가뜨릴 것처럼 손에 힘을 꽉 주었다. 하나를 처치했더니 다른 게 오네.
이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아 냈다. 대신 팀장에게 물었다.
“이번엔 또 누가 온대요?”
“한 중소 길드인데, 지난번에 천조 길드에 유통하려다가 실패한 마도구 있잖아요. 그쪽에서 그 마도구에 관심이 있다고 방문한대요.”
이나는 대충 그렇구나, 하고 대답한 뒤 몰래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손님이 오면 분명 대표가 음료 심부름을 시킬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바쁘다고.’
휴가를 몇 번이나 냈더니 일이 밀린 상태였다. 야근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 일을 다 끝내 놔야 했다.
때마침 사무실 문이 열렸다. 꽤나 거친 손님인지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 탓에 이나는 하마터면 메일을 잘못 보낼 뻔했다.
‘거 얌전히 좀 들어오지.’
속으로 툴툴거리는 사이 대표가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하. 처음 뵙겠습니다.”
살갑게 인사를 나누는 그들은 겉으로 보기엔 꽤나 우호적으로 보였다. 물론 그것이 거래에 있어 유리하게 작용하리라 장담할 순 없었지만 아직까진 순조로워 보였다.
이나는 대표 쪽을 힐끔 보다가 작성하던 문서를 저장했다. 음료 심부름을 가기 위한 준비였다.
그때 누군가가 신경질적인 소리를 냈다.
“어? 너……!”
어쩐지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대표와 손님들 쪽에서 들렸다.
이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낯이 익은 인물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것도 바로 어제 그녀가 쫓아냈던 인물이.
그는 어젯밤 회식 후 그녀에게 찝쩍대다가 도망간 그놈이었다.
그런데.
‘네가 왜 손님 쪽에 서 있어?’
이나가 눈을 치켜떴다. 두 사람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자 대표가 그녀에게 물었다.
“이나 씨, 이번에도 아는 사이인가?”
“아는 사이? 하! 알다마다요!”
그가 이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씨익 웃으며 물었다.
“야. 너 나 기억하지?”
“…….”
이나는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가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내가 어제 너한테 당한 수모만 생각하면…….”
“수모? 그게 무슨 말이냐, 철호야.”
대표와 인사를 나누던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철호라 불린 남자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형, 글쎄 말이야, 이 녀석이 어제 나한테 망신을 줬다니까?”
“망신?”
“그래! 감히 에덴 길드의 헌터인 나한테 말이야!”
그러자 에덴 길드의 길드장으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도 살짝 굳었다. 이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꾸욱 눌렀다.
‘이제 보니 가족 길드였나.’
에덴 길드. 들어 본 적 있는 길드였다. 그렇게 크고 유명한 길드는 아니지만 나름 이름 있는 곳이었다.
설마 그녀가 쫓아냈던 이 남자가 길드장의 동생일 줄은 몰랐지만.
멀리 떨어져 눈치를 살살 보고 있던 대표가 다가오더니 이나에게 물었다.
“이나 씨,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제가 뭘 했다고…….”
이나는 황당해져서 대표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말을 들은 철호라는 남자가 하,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에덴 길드장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표님, 죄송하지만 거래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하지만 길드장님…….”
대표가 길드장에게 쩔쩔맸다. 반면 이나는 어이가 가출해 버렸다.
사건이 벌어졌던 것은 사적인 일이었다.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할 길드장이란 자가 동생이 망신을 당했다고 거래를 없던 일로 하려는 게 황당했다.
물론 이나는 그렇다고 해서 사과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대표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이나 씨,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나 씨가 잘못한 것 같으니 얼른 사과드려서…….”
“뭐라고요?”
이나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에덴 길드 쪽 형제도 말 잘 꺼냈다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그래! 얼른 나한테 사과하지 못해?”
“사과를 한다면 거래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지도 모르겠군요.”
이나는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특히 대표한테 배신감이 들었다.
그녀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모르면서 그녀 탓으로 몰고 사과하라고 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것도 거래에 눈이 멀어서.
물론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천조 길드와의 거래가 무산되었으니 이번만큼은 꼭 성사시키고 싶었겠지.
하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지.’
이나는 싸늘해진 눈으로 대표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의 눈빛을 본 대표가 몸을 움찔 떨었다.
한 차례 한숨을 내쉰 이나가 입을 열었다.
“사과는 안 할 겁니다.”
“뭐라고?”
“사과를 받고 싶으면 거래를 인질 삼지 말고 저한테 따로 오세요. 다 큰 어른들이 이게 무슨 갑질이에요?”
“이, 이게…….”
거래처 길드장의 동생이 이나에게 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어제 당한 게 있는 탓에 섣불리 다가오진 못했다.
이나는 그런 그를 비웃고는 에덴 길드장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사과를 받고 싶으면 저한테 따로 말하세요. 회사랑은 아무 관련 없는 일이니까. 무엇보다.”
이나는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대표를 힐끗 보았다.
“저 오늘부로 퇴사했거든요.”
“뭐? 이나 씨, 그게 무슨…….”
“말 그대로예요, 대표님. 저 오늘부로 퇴사합니다.”
이나가 싱긋 웃었다. 대표도, 주변에 있는 직원들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든 말든 이나는 다시 한번 에덴 길드장에게 물었다.
“그러면 이제 거래랑은 아무 상관 없는 거 맞죠?”
에덴 길드장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사이 이나는 자리로 가서 짐과 정령들을 챙겼다.
다시 대표 앞에 선 이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대표님. 돈 많이 버세요.”
“이, 이나 씨!”
이나는 저를 붙잡는 부름을 외면하고 회사를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