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149)

띠리리리-

이나는 알람을 끄고 비척비척 일어났다.

“지금 몇 시지……?”

문득 시간을 본 이나는 눈을 부릅떴다.

“미친. 지각……!”

잠이 확 깨 버렸다. 이나는 서둘러 화장실로 뛰어가다가 돌연 멈칫했다.

“아.”

무언가를 떠올린 이나가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나 퇴사했지.”

이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이제 회사에 안 간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너무…….

“개좋은데?”

째졌다. 남들이 회사 갈 때 혼자 안 간다고 생각하니까 짜릿하기도 했다.

이나는 화장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침대에 다시 풀썩 누웠다. 그런 이나에게 정령들이 다가왔다.

[이나야, 회사 안 가?]

“어. 안 가.”

[왜?]

“퇴사했어.”

[퇴사가 뭐야?]

“회사 관두는 거.”

[와! 그럼 이제 집에만 있는 거야?]

“뭐…… 당분간은?”

이나의 대답에 정령들은 축제라도 시작한 것처럼 환호했다. 그럴수록 이나의 기분만 묘해졌다.

이나는 침대에 누워 밥도 안 먹고 게임을 했다. 역시 심심할 땐 핸드폰을 붙잡고 있는 게 최고였다.

한참 그러고 있자 열두 시가 넘었다. 이제 슬슬 일어나야지 하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응, 오빠.”

[오늘은 빨리 받네. 밥은 먹었어?]

“아니. 아직.”

[왜? 지금 점심시간 아니야?]

“그게…… 나 퇴사했어.”

[뭐?]

잔뜩 당황했는지 이한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나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이한이 물었다.

[왜 퇴사했는데? 무슨 일 있었어?]

“일은 무슨. 그냥 그렇게 됐어.”

[잘린 건 아니지?]

잘렸다고 했다간 당장에라도 회사로 쳐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였다.

이나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나오겠다고 한 거야.”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나가 괜히 눈치를 보게 되었을 때쯤 수화기 너머에서 한층 부드러워진 이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이나 네가 단순히 퇴사하고 싶다고 회사를 나올 사람은 아니지.]

“잘 아네.”

[그럼. 누구 오빤데.]

한차례 웃음이 나왔다. 이나에게 부담을 주기 싫은지 이한은 부러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그럼 지금 할 일 없겠네. 협회로 올래? 같이 밥이나 먹자.]

“알았어. 준비해서 나갈게.”

통화를 끊은 이나는 곧장 씻으러 들어갔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정령들과 함께 외출했다.

***

“그럼 들어가, 오빠.”

“좀 더 있다 가지. 회사도 안 가잖아.”

“오빠는 아직 직장인이거든요?”

이한이 시무룩해졌다. 어서 들어가라고 이나가 등을 떠밀자 이한이 중얼거렸다.

“나도 퇴사나 할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

이나는 겨우겨우 이한을 엘리베이터 안으로 욱여넣었다. 문이 닫히자 이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갔네.”

[오빠는 이나를 너무 아낀다니까!]

“그러게나 말이다.”

이나는 걸음을 돌려 협회를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시선을 돌린 곳에 흥미로운 것이 있었다.

이나는 그쪽으로 다가가 게시판에 붙어 있는 것을 빤히 보았다.

“흠.”

[이나야, 이게 뭐야?]

“알바 모집하는 것 같은데?”

[알바가 뭐야?]

“회사에서처럼 일하는 거야. 단기간으로.”

정령들의 물음에 대답하면서도 이나의 시선은 계속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에 향해 있었다.

겉보기엔 다른 아르바이트와 같이 평범해 보였지만 달랐다.

“모집자가 헌터라…….”

“관심 있나요?”

“관심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나는 고개를 돌려 말을 이었다.

“저는 헌터가 아니니까요.”

“그렇죠.”

어느새 다가온 서준이 싱긋 웃었다.

“그런데 그건 왜 챙기는 거죠?”

“그냥 이런 것도 있구나 하고 신기해서요. SNS에 올릴 생각이에요.”

“SNS도 하나요?”

“……그냥 조금.”

태연하게 거짓말한 이나가 시선을 피했다. 별로 관심 있는 주제가 아닌지 서준이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속초에서 보고 처음이네요.”

“그러게요. 근데 왜 여기 계시는 거예요?”

“그야 이곳의 본부장이니까요?”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본부장씩이나 되시는 분이 왜 일은 안 하고 여기 있냐고요.”

“지나가는 길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다 이나 씨를 발견한 거고요.”

“그냥 지나가셔도 되는데.”

서준은 그저 웃어넘겼다. 아무래도 그냥 지나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나가 뚱하게 바라보자 서준이 조금 난감한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래 봬도 조금 바쁜 편입니다.”

“안 그래 보이시는데.”

“정말입니다. 협회에 일이 조금 생겼거든요.”

“일?”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이나의 시선이 시야 한편에 있는 윈티, 네움, 볼트에게 향했다.

그것을 눈치 못 챈 서준은 그저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런 일이 있습니다. 대외비라 자세히는 말씀 못 드리겠군요.”

“……그렇군요.”

별로 듣고 싶지 않던 차에 잘되었다. 이나는 얼른 발끝을 돌렸다.

“바쁘시다니 저는 이만 가 볼게요.”

“그러고 보니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인가요? 회사에 있을 시간 아닙니까?”

“퇴사했거든요.”

서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나는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고 그대로 가려 했다.

그런데 그가 이나를 붙잡았다.

“그럼 할 일 없으시겠군요. 잠깐 시간 괜찮으신가요?”

“저 할 일 많거든요?”

“어떤?”

“빨래도 해야 하고, 설거지랑 청소랑…….”

물론 전부 정령들이 할 거지만.

이나가 온갖 집안일을 나열하자 서준의 입꼬리가 씰룩 움직였다.

“할 일 없으신 거 잘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뭘 들으셨대.”

“다름이 아니라 간단한 설문에 좀 응해 주셨으면 합니다.”

서준이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이나가 눈살을 찡그리며 됐다고 말하려는데 서준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응해 주신다면 지난번에 작성했던 이 경위서는 없던 일로 해 드리죠.”

“그걸 여태 갖고 있었어요?”

“혹시나 해서.”

빙긋 웃는 얼굴이 그렇게 얄미울 수 없었다.

이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것부터 찢어 버려요.”

***

경위서를 처리하고 이나는 서준을 뒤따랐다. 그대로 튈 수도 있었으나, 이나는 자신이 한 말은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함께 어딘가로 이동하며 서준이 대뜸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빠분이 협회에서 일하시더군요.”

“……어떻게 알았어요?”

“지나가다 우연히 봤습니다. 남매가 서로 똑 닮았더군요.”

이나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래서 이젠 오빠를 이용해 저를 귀찮게 하시게요?”

“절 얼마나 파렴치한으로 보는진 모르겠지만 그런 짓은 안 합니다.”

서준이 난감하다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래도 확답을 받으니 이나는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서준이 그녀를 데리고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헌터 협회의 홍보 팀이었다. 뜬금없는 곳으로 오자 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여긴 왜요?”

“와 보시면 알 겁니다.”

서준이 나타나자 홍보 팀 직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보, 본부장님! 여긴 어떻게…….”

“지난번에 그건 어디 있습니까?”

“아, 그거라면 지금 회의실 안에…….”

그게 뭐지?

이나가 홀로 궁금증에 휩싸인 사이 서준이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나를 데리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회의실 문이 열리자 이나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뭐예요, 이 조잡한 건?”

“……많이 조잡합니까?”

심각한 목소리가 들려 이나는 고개를 돌렸다. 서준이 목소리처럼 심각한 얼굴로 이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이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테이블 위의 피규어를 가리켰다.

“딱 봐도 조잡하잖아요. 꼭 예전에 지방에서 지역 홍보한다고 만든 마스코트 같아요. 올드해요.”

“…….”

“캐릭터가 올드한데 이 물건들은 다 뭐예요? 키 링에 손수건에 핸드폰 케이스까지……. 설마 굿즈는 아니죠? 이걸 누가 사요?”

“…….”

서준이 내내 말이 없자 이나가 그를 쳐다보았다. 어쩐지 아까보다 한층 더 어두운 안색의 미모가 눈에 들어왔다.

이나가 영문을 몰라 눈살을 찡그리자 서준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이나 씨 말이 맞습니다. 전부 굿즈예요. 헌터 협회를 홍보하기 위해 홍보 팀이 날밤을 새워서 만든 캐릭터 굿즈 말이죠.”

“……네?”

이나는 반사적으로 회의실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모인 사람들이 그녀의 말을 듣고 시무룩해져 있었다.

왠지 미안해져서 이나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개, 개성이 없진 않네요. 나이 드신 분들이 참 좋아할 것 같아요.”

“젊은 층을 타깃으로 잡았습니다만.”

“…….”

실패했다. 이건 돌이킬 수 없었다.

이나는 민망해져서 괜히 서준을 탓했다.

“아니, 옷은 명품으로 잘만 입는 사람이 이런 건 보는 눈이 없어요? 얼른 커트했어야죠.”

“협회 내부적으로 설문 조사를 했을 때는 반응이 괜찮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설문 조사 대상이 누구였는데요?”

“대외비라 먼저 윗사람들을 대상으로…….”

“바보예요? 젊은 층을 타깃으로 잡았으면 윗사람들이 아니라 젊은 층에게 물어봤어야죠.”

“제가 실수했군요.”

서준이 침음을 흘렸다. 이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헌터 협회의 마스코트 피규어를 괜히 툭 건드렸다.

“근데 갑자기 웬 마스코트예요?”

“최근 각성자들의 헌터 협회 지원율이 줄었거든요. 그래서 협회를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 보았습니다.”

“흐음.”

확실히 막 헌터 등록을 마친 각성자들은 길드에 가장 먼저 지원하곤 했다. 특히 뛰어날수록 더더욱 길드에 들어가려고 했다.

헌터 협회는 길드의 뒤에 서서 그들을 지원해 주는 존재. 꽤 있어 보였지만 길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전투로 따지면 힐러보다는 전방에 서는 딜러가 더 멋있어 보이는 격이었다.

이나는 힐끗 서준을 보았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마스코트와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를 빤히 보던 이나가 대뜸 말했다.

“댁이 하지 그래요?”

“네?”

“그쪽이 협회의 마스코트가 되는 건 어때요?”

서준이 눈을 끔뻑 감았다 떴다.

“……제가 말입니까?”

“제가 마도구 기획 쪽에서 일해 봐서 좀 아는데요, 물건은 성능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디자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와야 해요.”

이나가 서준의 어깨를 콕 찍으며 말을 이었다.

“협회의 가장 뛰어난 디자인이 바로 여기 있잖아요.”

“확실히, 제 외모가 뛰어난 편이긴 하죠.”

뻔뻔하게 자기 자랑을 하던 서준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일반인입니다. 헌터면 모를까, 일반인이 협회를 대표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그것도 그러네요.”

이나도 빠르게 수긍했다. 그래도 도움이 되었는지 서준이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래도 어떤 식으로 홍보해야 할지 감은 잡히는군요.”

“그거 다행이네요. 그럼 전 이만 가 봐도 되죠?”

“그 전에 이나 씨.”

집으로 돌아가려는 이나를 서준이 붙잡았다. 이나가 다시 돌아보자 그가 물었다.

“혹시 아르바이트할 생각 없나요?”

“아르바이트요?”

“아까 퇴사했다고 했잖아요. 헌터 전용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를 보고 있기도 했고. 마침 이곳 홍보 팀에서 헌터 협회 홈페이지 마케팅 글을 올릴 아르바이트생을 뽑으려고 하거든요. 물론 기타 잡일도 시킬 수 있습니다만.”

조금 솔깃했다. 요즘 바로 새로운 직장을 얻기도 어렵고, 직장을 찾을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할 순 없으니까.

그리고 정령의 알을 훔쳐 간 게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고민하는 이나를 보며 서준이 말을 덧붙였다.

“주 3회 출근입니다. 출근하는 요일은 자유롭게 하고, 월급은…….”

서준이 금액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이나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할게요.”

너무 바로 대답해 버렸다.

민망해진 이나가 헛기침을 큼큼 내뱉었다.

“새 직장 얻을 때까지만이에요.”

“그렇게 하시죠.”

서준이 픽 웃었다.

그 뒤 이나는 홍보 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집으로 돌아갔다.

이나가 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것을 바라보는 서준에게 누군가 다가와 물었다.

“본부장님, 혹시 친구분이신가요?”

“음. 이나 씨는 그렇게 생각 안 할 겁니다. 다만.”

서준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개인적으로 눈여겨보고 있기는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빛엔 흥미가 가득했다. 그것을 본 홍보 팀 직원들은 생각했다.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지.’

‘잘 대해 줘야겠다.’

이나는 모르는 복지가 홍보 팀에 하나둘씩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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