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퇴사 기념으로 뒹굴거리는 것밖에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월요일이 되자 이나는 아르바이트생의 본분을 다하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나 씨!”
어쩐지 그녀를 반갑게 맞아 주는 홍보 팀 직원들을 보며 이나는 의아함을 삼켰다. 아무래도 이곳 사람들은 정이 많은 듯했다.
이나는 간단하게 직원들을 소개받고, 일에 대한 안내 사항을 들었다. 아르바이트답게 어렵지 않은 일들뿐이었다.
대충 시키는 것만 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여기 좋네. 구내식당도 있고.”
이나는 적당히 먹고 싶은 것을 담아 앉을 곳을 찾았다. 그러다 반가운 사람을 발견했다.
“어? 오빠!”
“이나야?”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본 이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나는 식판을 들고 얼른 그에게 다가갔다.
“놀랐어?”
“당연히 놀랐지! 네가 왜 여기 있어?”
“나 여기 홍보 팀에서 알바 중.”
“뭐?”
이한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이나는 어느새 다가온 이한의 팀원들과 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어? 이나 씨 아니에요?”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여긴 어쩐 일이에요?”
“저 여기 홍보 팀에서 알바 중이에요.”
그때 누군가와 이나의 눈이 마주쳤다. 저쪽에서 우물쭈물하자 이나가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우림 씨.”
“아, 안녕하세요, 이나 씨!”
지난번 회식 때 만나고 처음이었다.
밝던 김우림의 얼굴에 돌연 그늘이 졌다.
“저어, 이나 씨, 그땐 혹시…….”
“우림 씨.”
이나는 그에게 바싹 붙어서 속삭였다.
“그 일은 비밀로 해 주세요.”
“네? 아…….”
순간 김우림의 시선이 이나 어깨 너머의 이한에게 닿았다. 이한은 눈을 부릅뜬 채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김우림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이나가 싱긋 웃자 김우림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때 이한이 헛기침을 크게 내뱉었다.
“크흠! 그보다 이나야, 잠깐 얘기 좀 할까?”
“응? 알았어.”
이한은 이나를 데리고 따로 자리를 잡았다.
이한은 감자조림을 한 알 입에 집어넣은 이나가 그것을 삼킬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었다.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여기서 알바라니.”
“음. 그게…….”
이나는 며칠 전 이한을 만난 뒤 있었던 일을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이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본부장님이 소개해 줬다고?”
“응.”
“그분과는 무슨 사이…… 아니,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함께 경위서를 작성하고 산불에서 빠져나온 사이라고 하면 분명 난리 칠 테니까.
그래서 이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어쩌다 보니.”
이한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이나는 그의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반찬을 집어 먹었다.
“여기 밥 맛있다. 오빠는 좋겠네. 매일 이런 식사를 하고.”
“……많이 먹어.”
이한도 더 캐묻지 않고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식사를 이어 가려나 싶었는데 이한이 대뜸 말했다.
“이나야, 혹시라도 말이야.”
“응?”
“그 새…… 아니, 본부장님이 너한테 찝쩍거리면서 귀찮게 하면 얼른 나한테 말해. 알았지?”
“뭔 소리래. 그 사람이 왜 나한테 찝쩍거려.”
하지만 이한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에 이나도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식사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니 웬 서류 봉투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이나가 그것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 옆자리 대리가 말했다.
“이나 씨, 오늘은 일찍 퇴근하면서 그 서류 좀 이 주소로 전달해 줄래요?”
이나는 주소가 적힌 쪽지를 받아 들었다. 조금 귀찮은 느낌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일찍 퇴근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쾌재를 불렀다.
“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잘 가요, 이나 씨!”
홍보 팀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이나는 협회를 나왔다. 얼른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가자는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심부름 장소에 도착한 순간 이나는 오늘 빨리 가기는 글렀다는 걸 깨달았다.
“……음.”
이나는 난감하다는 얼굴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낯설지 않은 곳이었다.
“심부름 장소가 청호 길드란 건 알려 주지 않았잖아요.”
이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서류만 빨리 전해 주고 나오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나가 청호 길드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를 알아본 사람이 말을 걸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아란 보러 오셨어요?”
“아뇨. 협회에서 심부름 나왔는데요.”
이나는 잘됐다 싶어 얼른 그 사람에게 서류 봉투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붙잡히기 전에 서둘러 청호 길드를 나오려 했다.
“크엉!”
때마침 아란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나가 흠칫하며 뒤돌아보자 역시나 아란이 그녀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조금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다행히 아란은 그녀를 덮치기 전에 알아서 멈추었다.
자신을 보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아란을 보니 착잡하던 마음이 쏙 들어갔다.
이나는 결국 반쯤 포기한 얼굴로 웃으며 아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랜만이야.”
“그릉…….”
아란은 얌전히 이나의 쓰다듬음을 받았다. 그러고 있자 이번엔 도하의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왔냐?”
이나가 맞은편으로 시선을 돌리자 도하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아란 옆에 서서 제 파트너를 힐끗 쳐다보았다.
“어쩐지 이 녀석이 신나서 뛰쳐나가더라니.”
“그랬어?”
“크릉!”
아란이 대답하듯 울었다. 처음엔 조금 부담스러웠는데 계속 보다 보니 귀여운 것 같기도 했다.
이나가 둘만의 세상에 갇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란을 쓰다듬고 있자 도하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여긴 웬일이야? 언제는 시간 맡겨 놨냐더니.”
“올 일이 있었거든요.”
“무슨 일?”
그때 우물쭈물하고 있던 직원이 도하에게 다가왔다.
“길드장님, 여기요.”
“이게 뭐야?”
“헌터 협회에서 청호 길드로 보낸 거예요.”
대답은 이나가 대신 했다. 그러자 도하가 물었다.
“너 헌터 협회에서 일해?”
“그냥 잠깐 알바 중이에요.”
“그렇구만.”
도하가 이나가 보는 앞에서 곧바로 서류 봉투를 뜯었다. 이나는 안 보는 척했지만 신경은 그곳으로 향해 있었다.
서류 내용을 찬찬히 읽던 도하가 그것을 대뜸 아란에게 내밀었다.
“아란.”
“크릉?”
“태워 버려.”
깜짝 놀란 이나가 서류를 가로채려고 했지만 늦어 버렸다. 아란의 푸른 불꽃이 서류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뭐 하는 거예요!”
“협회로 가서 전해. 자꾸 이런 식으로 귀찮게 하면 협회고 뭐고 무너뜨리러 간다고.”
도하가 귀찮다는 얼굴로 뒷머리를 문질렀다. 황당해진 이나가 물었다.
“귀찮은 일이 뭔데요?”
“나보고 캠페인 영상 주인공이 되어 달라잖아.”
“캠페인?”
이나의 표정이 묘해졌다. 저 다혈질에게 그런 모범적인 역할을 맡긴다고?
그녀의 생각을 눈치챈 것인지 도하가 미간을 좁혔다.
“뭐야, 그 표정은?”
“아니, 뭐……. 무슨 캠페인인데요?”
“폭력 근절 캠페인.”
음. 역시 안 어울린다.
서준의 멱살을 틀어쥐었던 첫인상이 강렬하게 남아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다.
이나가 납득하는 표정을 짓자 도하가 어쩐지 찝찝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암튼 난 할 생각 없어.”
“본인이 그러시다면야.”
이나도 그에 대해서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서류는 제대로 전달했고, 남은 일은 그와 협회가 알아서 할 일이니까.
‘그러고 보니…….’
무언가를 떠올린 이나가 그것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었다.
“이시현 헌터는 캠페인 활동 많이 하던데.”
방으로 돌아가던 도하가 멈칫했다. 그것을 보지 못한 이나가 아란의 목덜미를 긁어 주며 이어서 중얼거렸다.
“그래서 한국 대표 헌터인가?”
“뭔 소리야?”
“네?”
이나가 의아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도하가 씩씩거리며 제 가슴에 손을 올렸다.
“한국 랭킹 1위는 나라고!”
뜬금없이 외치는 말에 이나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녀는 불현듯 지난번에 청호 길드에 방문했던 날을 떠올렸다.
‘분명 이시현 헌터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었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사나운 기에 눌려 도하의 편을 들어 주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나는 남의 비위에 맞춰 주는 걸 잘 못했다.
그래서 그만 사실대로 말해 버렸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걸요?”
“뭐?”
“솔직히 이시현 헌터와 그쪽의 실력은 비등비등하잖아요. 그런데 이시현 헌터 쪽이 매스컴에 얼굴을 좀 더 잘 비치고. 그런 상황에선 사람들이 이시현 헌터를 한국 랭킹 1위, 그리고 한국 대표 헌터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죠.”
도하가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벙긋거렸다.
잠시 후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도하는 곧바로 길드를 나가려고 했다.
“내 이놈을 오늘 꺾어 버리고 말겠어.”
뭐? 지금?
당황한 이나가 얼른 도하의 앞을 막아섰다. 지금 그를 보냈다가는 분명 서울 어딘가가 박살 날 게 분명했다.
“비켜.”
도하가 으르렁거렸다. 이나는 타이르는 어조로 부드럽게 물었다.
“그러지 말고 캠페인 영상 촬영하는 게 어때요?”
“뭐 하러? 그냥 오늘 1위를 가리는 게 더 편해.”
“편하긴 무슨. 그런 건 나중에 사람 없는 곳에서 둘이 하라고요! 전처럼 어디 부숴 먹어서 협회에서 청구서라도 받으려고요?”
도하의 몸이 움찔 떨렸다. 아무래도 그때 배상금이 만만치 않게 든 모양이었다.
이때다 싶어 이나가 얼른 말했다.
“캠페인에 참가하면 좋은 이미지도 심어질 테고, 분명 이시현 헌터 못지않게 인기가 많아질걸요? 그럼 이시현 헌터가 한국 대표 헌터라는 사람들의 인식도 바뀌지 않겠어요?”
“그건…… 그렇지만…….”
“분명 엄청 멋있을 거예요.”
마지막 말은 솔직히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었다.
그런데 꽤 효과가 있는지 도하의 구겨진 미간이 평평하게 펴졌다.
“뭐, 멋있긴 하겠지.”
“네? 아, 네. 그렇죠.”
난데없이 튀어나온 뻔뻔함에 이나의 표정이 썩어 가려 했다. 하지만 자신을 간절하게 쳐다보는 청호 길드 직원들의 눈빛을 본 이나는 애써 웃어넘겼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도하가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캠페인 영상 촬영은 언제야?”
“저야 모르죠. 백도하 씨가 서류를 태워 버렸잖아요.”
“쯧. 귀찮네.”
혀를 찬 도하가 뒤를 홱 돌아보았다. 그곳엔 김 비서가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도하는 그에게 짧게 명령했다.
“김 비서, 협회에 연락해서 캠페인에 참여하겠다고 해.”
“……진심이십니까?”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
“아, 아뇨! 못 봤죠. 네. 오늘 바로 그쪽에 연락하겠습니다.”
그의 대답을 들은 도하는 그만 길드장실로 가려 했다. 그러다 아, 하고 탄성을 흘리며 이나에게 말했다.
“내 방으로 올라와. 아란이랑 놀아 줄 거지?”
“그러죠, 뭐.”
이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어차피 아란에게 들킨 이상 퇴근은 늦춰진 셈이었다.
도하가 픽 웃으며 위로 올라갔다. 그가 사라지자 김 비서와 다른 직원들이 이나에게 다가왔다.
“이나 씨, 정말 감사합니다. 이걸로 청호 길드의 위상은 더욱 높아질 겁니다!”
“길드장님을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신걸요? 대단하세요!”
이나는 쏟아지는 감탄의 눈빛을 느끼며 멋쩍게 웃었다.
‘대체 이 인간은 평소에 어떻게 산 거야?’
이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밀어 넣었다.
그래도 이걸로 서울이 무너질 일은 사라졌으니 귀찮은 일 하나는 줄어든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