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은 일이 사라지긴 개뿔.’
이나는 청호 길드에서도 안 쉬었던 한숨을 지금 내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눈앞에 있는 인물 때문이었다.
“왔어?”
“……대체 저는 왜 부른 건데요?”
이나가 뚱한 얼굴로 물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서울 대공원이었다. 오늘 이곳에서 도하의 캠페인 영상 촬영이 있을 예정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나는 협회로 출근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은, 도하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뭐야. 유이나 걔는 안 왔어?”
그 한마디로 인해, 혹시나 어렵게 얻은 촬영 기회가 무산될까 봐 촬영 팀에서 그녀를 호출한 것이었다.
‘햇빛이 뜨거워서 나오기 싫었는데.’
속으로 툴툴거렸지만 도하가 이를 알아챌 리는 만무했다. 그는 오히려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 일의 주동자인데, 직접 봐야 하지 않겠어?”
“주동자는 누가 주동자라는 건지……. 주동자는 저기 PD님이겠죠.”
이나는 불만 어린 눈으로 촬영 팀 PD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쪼르르 달려와 이나에게 속삭였다.
“미안해요. 나중에 홍보 팀에 특근 수당 얘기해 놓을 테니까 좀 봐줘요.”
솔깃한 제안이었다. 이나는 서둘러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이야. 오늘 입은 정장 멋있는데요?”
옆에서 PD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나도 도하도 이미 그는 뒷전이었다.
도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제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멋있으면 뭐 해. 움직이는 데 방해나 되는데. 이러다 던전이라도 터지면 즉각 대응하기 어렵다고.”
“설마 진짜 터지겠어요.”
그래도 길드장은 길드장이었다. 던전 터질 때를 다 대비하고.
게다가 정장까지 입어서 그런가, 왠지 오늘따라 그가 달라 보였다. 좀 더 믿음직해진 느낌이랄까.
이나가 묘한 눈길로 도하를 바라보는 사이 촬영 준비를 마친 스태프 한 명이 도하에게 외쳤다.
“백도하 씨! 잠깐만…….”
“이제야 시작하려나 보네. 아란 좀 잘 돌봐 줘.”
도하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아란과 단둘이 남은 이나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가 뭐 아란 보모인가?”
[아닌데! 이나는 우리 보모인데!]
리카가 반박하는 말에 이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리카에게 대꾸하는 대신 머리를 치대 오는 아란을 데리고 그늘로 걸어갔다.
그 후로는 평화로웠다. 정확히는 이나와 아란만 평화로웠다.
도하와 촬영 팀은 애를 먹고 있었다.
“누군가의 장난이 다른 누군가에겐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 그딴 짓 하면 나한테 죽을 줄 알아!”
“컷! 백도하 씨! 대사가 그게 아니잖아요!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면 무슨 소용입니까!”
대사를 까먹은 도하가 몇 번이고 NG를 내거나.
“꺄아악! 도와주세요!”
“이, 나쁜, 놈! 폭력은, 아주, 나쁜 것이다!”
간단한 연기라도 하는 장면에선 도하가 발 연기로 촬영을 중단시켰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도하도 도하지만 촬영 팀이 무척이나 답답해했다.
“음. 가관이네.”
“크릉.”
아란이 이나의 말에 동감하듯 낮게 울었다. 이나는 픽 웃으며 쐬고 있던 휴대용 선풍기를 아란에게 넘겨주었다.
“헥, 헥…….”
“더워?”
“크릉.”
확실히 털로 뒤덮여서 그런지 그늘에 앉아 있는데도 아란은 더워 보였다.
안쓰럽다는 듯 그 모습을 보던 이나가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지.”
인벤토리를 연 이나가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지난번 당산역 B급 던전에서 얻은 냉기환이라는 아이템이었다.
‘분명 몸의 열기를 낮춰 준다고 했었지.’
이나는 그것을 아란에게 주기 전에 슬쩍 도하 쪽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도하는 대본을 노려보느라 이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 틈을 타 이나는 아란에게 얼른 냉기환을 내밀었다.
“아란, 먹어. 더운 게 좀 가실 거야.”
아란은 냉기환의 냄새를 킁킁 맡더니 덥석 물어 삼켰다. 다행히 효과가 있는지 헥헥거리는 소리가 줄어들었다.
이나도 마지막 남은 냉기환 한 알을 입에 물고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이런 거 줬다는 건 네 파트너에겐 비밀이다.”
“크릉!”
아란이 대답했다. 긍정인지 부정인진 알 수 없었지만 대충 느낌이 긍정인 것 같았다.
픽 웃은 이나는 냉기환 덕에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촬영 팀 쪽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쪽도 만만치 않게 더울 텐데.”
이나야 그늘에 있다지만 도하와 촬영 팀은 땡볕 아래에 있었다. 특히 도하는 촬영 탓에 정장까지 입은 상태였다.
아니나 다를까. 셔츠 목깃을 풀어 헤치는 도하가 보였다.
고민하던 이나는 허공에서 놀던 리카와 윈티를 불렀다.
“리카, 윈티.”
[응?]
[네?]
이나는 손가락으로 촬영 팀 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시원한 바람 좀 보내 줘. 들키지 않게 은은한 정도로만.”
[알았어!]
[맡겨 주세요……!]
두 정령은 촬영 팀을 바라보며 힘을 발휘했다.
얼음의 정령 윈티가 아주 작은 얼음 결정들을 허공에 만들면 리카가 바람으로 그것들을 촬영 팀 쪽으로 보내는 방식이었다.
덕분에 시원한 바람이 촬영 팀 사람들의 땀을 훔쳤다.
“어? 조금 시원해진 것 같지 않아?”
“그러게요. 이 틈에 얼른 촬영 재개하죠!”
다시 기운 내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며 이나가 뿌듯하게 웃었다. 그러다 이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이나야, 어디 가?]
“다들 고생하는데 아이스크림이라도 사러 가게.”
이나의 말에 아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앞에 몸을 숙였다. 이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너를 타고 가라고?”
“크릉!”
이나는 반사적으로 도하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촬영에 임하고 있는 상태였다.
‘조금 멀리 나가긴 해야 하니까.’
조금 무섭긴 했지만 아란이 자신을 떨어뜨릴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이나는 아란의 위에 올라탔다.
“얼른 다녀오자.”
“크릉!”
아란이 그녀를 태운 채 달렸다. 도하를 태울 때처럼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이나가 무서워한다는 걸 알고 배려해 준 듯싶었다.
“똑똑한 녀석.”
이나는 피식 웃으며 아란의 등 위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아란이 낮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나는 아란 덕에 순식간에 공원 외곽에 있는 편의점에 도착했다.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고 나오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아란을 구경하고 있었다.
“백호 아란이다! 진짜인가?”
“근처에 청호 길드장이 있나 본데?”
“깜짝 이벤트라도 하는 건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길드의 마스코트답게 많은 사람들이 아란을 알아보았다. 그 탓에 이나만 뻘쭘해졌다.
‘사람들 더 모이기 전에 돌아가야겠다.’
이나는 얼른 아란의 등 위에 올라탔다. 시선이 순간 그녀에게 쏠렸지만 다시 분산되었다.
띠링! 띠링! 띠링!
때마침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핸드폰이 울렸기 때문이었다.
이나는 핸드폰을 꺼내 도착한 메시지를 열어 보았다. 내용을 확인한 그녀의 눈이 커졌다.
“던전 브레이크라고?”
장소를 보니 이 근방이었다. 마찬가지로 긴급 재난 문자를 확인한 시민들이 패닉에 빠졌다.
“뭐야! 이 근처잖아!”
“갑자기 무슨 던전 브레이크야!”
그때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모두 내용을 확인하고 조금 안심한 표정이 되었다.
“던전 브레이크를 해결하러 길드에서 온대.”
“다행이다.”
“청호 길드에서 오는 건가?”
“아니? 에덴 길드에서 온다는데?”
이나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에덴 길드?’
그녀를 귀찮게 하고 퇴사하게 만든 곳도 에덴 길드였다.
던전 브레이크를 해결하러 온다니 안심이긴 했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찝찝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미간을 찌푸린 이나는 던전 브레이크는 그들에게 맡기고 촬영 팀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 했다. 지금쯤 그들도 같은 문자를 받고 철수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란, 네 파트너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
“크릉.”
이나를 태운 아란이 움직였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것인지 아까보다는 빨라진 속도였다.
그때 옆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단검……?’
짧은 날붙이가 그녀와 아란을 향해 날아왔다. 이나가 미처 대응하지 못하는 와중에 갑자기 눈앞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단검이 날아오는 속도가 느려졌다. 그 틈에 그것을 피한 아란이 급하게 몸을 틀어 단검이 날아온 방향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크르릉…….”
[이나야, 괜찮아?]
정령들이 날아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아무래도 아까 그 바람은 리카가 만들어 낸 바람인 듯싶었다.
고개를 살짝 끄덕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한 이나 역시 아란처럼 한곳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 순간에도 심장은 벌렁거리고 있었다.
‘진짜 죽는 줄 알았잖아.’
단검이 날아올 때는 정말 아찔했다. 리카가 아니었다면 그것은 분명 이나의 몸을 관통했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싹하기도 하고 동시에 분노가 일었다.
“거기 누구야? 나와!”
이나가 외치자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공원 수풀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뭐야? 사람이었어?”
말투는 그가 노린 것이 사람인 줄 몰라 뻘쭘해하는 이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입이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몬스터처럼 보이는 것을 타고 있기에 몬스터인 줄 알았…… 어?”
그녀를 본 상대방이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누구야?”
그가 씨익 웃었다.
“너 나 알지?”
알다마다.
이나는 이를 으득 갈았다.
그는 그녀의 평범한 삶을 방해한 에덴 길드의 강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