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사이 시현이 제 앞에 모인 헌터들을 주욱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제 쪽으로 향할 때쯤 이나는 해진의 뒤에 숨었다.
다행히 이나를 보지 못했는지 시현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들어가죠.”
천조 길드, 협회, 그 외 던전의 정보를 얻기 위해 파견된 사람들 등 1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던전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기자들의 카메라가 담았다.
이나와 해진도 맨 뒤에 서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공간을 이동하는 느낌이 드는 찰나의 순간.
“오.”
해진의 감탄에 눈을 뜨자 새로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식물형 몬스터가 나오는 던전답게 그들이 이동한 곳은 숲이었다.
겉보기엔 다른 던전과 별다를 바가 없어 보였지만 이곳은 A급 던전.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탐사대가 긴장한 얼굴로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선두에 있던 헌터들이 무기를 꺼냈다.
“몬스터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성인 키만 한 식물형 몬스터가 전방의 헌터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몬스터는 멀리서 본다면 한 송이의 꽃처럼 보일 정도로 평범하게 생겼다. 그냥 움직이는 꽃이었다.
하지만 모아져 있던 몬스터들의 꽃잎이 열리자 그 안으로 파리지옥처럼 징그러운 입이 드러났다.
“다들 저 입에 먹히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저게 뭐야! 징그러워!”
탐사대가 눈살을 찌푸린 채 몬스터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한 헌터가 몬스터의 몸통을 베었다. 땅에 떨어진 꽃잎이 급격하게 시들기 시작했다.
“죽은 건가?”
그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베인 줄기가 꿈틀거리더니 급격하게 자라기 시작했다. 그리고 꽃봉오리를 만들어 내 다시 꽃잎을 개화했다.
그것을 본 다른 헌터가 질린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젠장. 설마 뿌리가 남아 있으면 계속 부활하는 건가?”
“맞습니다.”
옆에 있던 시현이 마찬가지로 몬스터의 몸통을 베며 대답했다. 그 후 그는 오러를 두른 검을 땅에 처박아 몬스터의 뿌리를 절단시켰다.
그러자 몬스터의 남은 몸통이 꿈틀거리더니 시들어 버렸다. 그것을 지켜보던 시현이 탐사대를 향해 말했다.
“이 몬스터는 뿌리가 약점입니다. 모두 뿌리를 중점으로 공격하세요.”
“아아. 귀찮네, 진짜!”
전방의 헌터들이 귀찮다는 얼굴로 몬스터들을 베고, 또 베었다.
물론 몬스터들도 가만히 당하고 있진 않았다. 몬스터들은 몸통이 줄기인 점을 이용해 여러 갈래의 줄기들을 다양하게 활용했다.
줄기로 헌터들을 공격하거나, 방어하거나, 혹은.
“우왁!”
헌터들의 발목을 잡아 넘어뜨린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으으…….”
갑자기 넘어져 무기를 놓친 헌터가 눈앞으로 다가오는 몬스터의 입을 공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대로 죽는구나 싶은 순간, 하얀 빛이 몬스터의 몸통을 베고, 곧바로 뿌리를 찔렀다.
“괜찮으십니까?”
“처, 천조 길드장님.”
시현은 그가 놓친 검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얼이 빠져 있는 그를 향해 부드럽지만 엄하게 말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기를 놓치면 안 됩니다. 일단 무기를 쥐고 있으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방법이 생기니까요.”
“네, 네! 명심하겠습니다.”
시현은 그 말을 남기고 다른 몬스터를 해치우러 갔다. 그의 뒷모습을 도움을 받은 헌터가 존경스러워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천조 길드장. 멋있긴 멋있다니까.”
해진도 그를 보고 감탄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반면 이나는 뚱하게 말했다.
“멋있긴 뭐가 멋있어요? 저 사람 알고 보면 꼰대예요, 꼰대.”
“꼰대? 이시현 헌터가요? 그보다 이시현 헌터와 만난 적 있어요?”
해진이 묻는 말에 이나는 뜨끔해서 고개를 돌렸다.
“아니, 뭐……. 그냥 어쩌다?”
“흐음.”
“그보다 독 추출이나 하죠. 떨어진 몸통들이 저렇게나 많은데.”
이나가 바닥 곳곳에 있는 몬스터 시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해진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인벤토리에서 빈 병을 꺼내 몬스터 시체에 다가갔다.
그가 독을 추출하는 과정을 지켜보던 이나가 병의 뚜껑이 닫히고서야 물었다.
“이제 된 거예요?”
“아뇨. 아직 추출해야 할 대상이 남아 있어요.”
“그게 뭔데요?”
“보스 몬스터요. 보통 이런 식물형 몬스터의 보스는 더 지독하고 많은 독을 몸에 품고 있거든요. 나중을 위해서라도 미리 뽑아 놓는 편이 좋겠죠.”
이나도 동의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누군가가 해진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천해진 헌터! 여기 부상자 좀 봐 주세요!”
“하아. A급 던전이라 그런지 벌써 다친 사람이 생겼네.”
해진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 부상자에게 다가갔다. 귀찮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얼른 달려가는 모습을 보니 이나는 괜히 웃음이 나왔다.
“거기!”
그때 누군가가 이나를 보며 외쳤다. 던전에 들어오기 전 이나를 막았던 헌터였다.
이나가 쳐다보자 땀범벅이 된 그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며 물었다.
“능력 계열이 뭡니까? 등급은요?”
“그건 왜요?”
“왜냐뇨. 다들 힘들게 싸우는 거 안 보이십니까? 싸울 여력이 안 된다면 보조라도 해 주셔야죠. 가만 보니 천해진 헌터 곁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던데.”
잠시 침묵하던 이나가 그에게 물었다.
“제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여요?”
“그럼 뭔가를 했단 말입니까? 가만히 서 있기만 해 놓고?”
그가 기가 차서 되물었다. 그러자 이나의 마스크 속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하세요.”
“뭐라고요?”
이나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해진의 곁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그가 외쳤다.
“저기요!”
“키에엑!”
그때 뒤에서 몬스터의 비명 소리가 들려 그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몸이 절단된 몬스터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땅에서 뽑힌 뿌리도 갈가리 찢긴 채였다.
그는 멍하니 몬스터의 시체를 보다가 중얼거렸다.
“대체 누가……?”
아니, 그보다는.
“어느새?”
***
[이나야! 내가 네움이랑 같이 몬스터를 잔뜩 해치웠어!]
[…….]
“수고했어.”
리카와 네움이 칭찬을 바라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이나가 대꾸했다. 그 한마디가 그렇게 좋은지 리카도 네움도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이나가 짜증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안 한다니. 나도 나름 열심히 도와주고 있고만.”
마음 같아선 그 자리에서 짜증이라도 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간신히 참아 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나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일 만도 하니까.
하지만 이나는 아까부터 전방의 헌터들을 열심히 돕는 중이었다. 때로는 몬스터들을 직접 해치우기도 하며.
안 그런 척해도 이나는 해진의 곁에서 모든 전투 현장을 눈으로 담고 있었다.
그래도 알아주는 사람이 있는 것인지 1차 전투를 마치고 가지는 휴식 시간에 헌터들이 떠들었다.
“생각보다 그렇게 빡세지 않은데?”
“서포트가 좋아서 그랬나 봐.”
“어, 맞아! 오늘따라 서포터들이 열일하더라. 덕분에 편했어.”
이나의 능력이 따지고 보면 마법 계열과 비슷해서 그런지 모두 정령의 힘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저 서포터들의 능력이 좋았구나, 생각할 뿐이었다.
함께 쉬고 있던 서포터 담당 헌터들이 이야기를 듣고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나는 피식 웃었다.
‘몰래 마정석도 좀 챙기고. 나쁘지 않네.’
마음 같아선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그녀의 옆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또 아까 그놈인가 싶어 고개를 든 이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다시 푹 내리고 말았다.
‘이 인간이 왜 나한테!’
이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현이 그녀를 보며 물었다.
“잠시 대화 좀 할 수 있겠습니까?”
망했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결국 이나는 체념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향해 탐사대의 시선이 꽂혔다.
개중에는 아까 그 헌터의 시선도 있었다. 혼나러 간다고 생각하기라도 한 건지 그의 시선에는 꼴좋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차라리 그런 거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이나는 시현을 따라갔다.
탐사대와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단둘이 있게 되자 시현이 다짜고짜 물었다.
“맞으시죠?”
“…….”
“대답 안 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시현이 한숨을 내쉬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재차 물었다.
“유이나 씨, 맞으시죠?”
“……하아.”
이나는 결국 체념한 얼굴로 마스크를 내렸다.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 주면 안 됐던 거예요?”
“어떻게 그냥 넘어갑니까? 평범하게 살고 싶다던 분이 A급 던전에 들어와 있는데.”
“딱히 불미스러운 일도 아니잖아요.”
“불미스러운 일은 아니어도 의심스러운 일은 맞습니다.”
“하여간에 꼰대 같으니.”
작게 중얼거린 이나가 뾰로통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대체 저라는 건 어떻게 안 거예요?”
“서포트하는 걸 보고 알았습니다. 기시감이 들었거든요.”
“눈치는 더럽게 좋아선.”
“아까부터 툴툴거리시는데, 그보다 제 질문에 대답해 주시죠. 대체 여긴 왜 들어온 겁니까? 게다가 천해진 헌터와는 어떻게 아는 거고요.”
이 상황이 불만이긴 했지만 이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그의 의심을 사는 것도, 정체가 까발려지는 것도 싫었으니까.
이나의 상황을 전해 들은 시현이 의심을 푼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된 거군요. 가족이 독에 당했다니…….”
“이제 됐어요?”
“아직입니다. 상황이 딱하긴 하지만 무모했습니다. 정체를 들키면 어쩌려고요. 차라리 천해진 헌터만 들여보내지 그랬습니까.”
“그것도 생각 안 한 건 아닌데요, 오빠를 생각하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어깨를 으쓱하는 이나를 시현이 복잡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결국 양손을 든 것은 시현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이 일은 모른 척하겠습니다.”
“꼰대라는 말 취소할게요.”
“……그거 고맙군요.”
씁쓸하게 웃는 시현과 달리 이나는 싱긋 웃었다.
물론 상큼한 미소와 달리 속으로는 앙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여리단 말이야.’
앞으로도 종종 이런 방법을 써먹어도 될 것 같았다.
상큼한 미소 뒤에서 이나가 사악한 미소를 짓는 것을, 시현은 그 후로도 쭉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