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휴식을 마치고 탐사대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숲 안쪽으로.
숲에 깊숙이 들어설수록 몬스터는 더 많이 튀어나왔다. 간혹 식물형 몬스터가 아닌 벌레형 몬스터도 등장해 탐사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현의 뛰어난 리드로 인해 탐사대는 사망자나 부상자 없이 이동할 수 있었다.
‘확실히 능력은 괜찮단 말이지.’
이나는 시현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를 귀찮게 하지만 않았어도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아예 모르는 사이였다면 어쩌면 좋은 사람까지 갔을지도 몰랐다.
이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시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나가 고개를 홱 돌려 버려 눈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지만.
“어! 저기……!”
그때 누군가가 맞은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탐사대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숲이 끝나는 곳.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곳이 환하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맵의 끝일까요?”
“일단 가 보죠.”
시현이 신중한 얼굴로 앞장섰다. 그 뒤를 탐사대가 같은 얼굴로 따랐다.
그렇게 드러난 곳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와아.”
“아니, 세상에…….”
숲을 나오자 꽃밭이 그들을 반겼다.
그냥 작은 꽃밭도 아니었다. 넓은 초원이 가지각색의 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던전만 아니었다면 피크닉을 나와도 좋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모두가 감탄을 흘릴 때 시현은 냉철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탐사대를 향해 말했다.
“일단 잠시 쉬도록 하죠.”
“하하! 솔직히 말씀하셔도 돼요, 길드장님. 사실은 길드장님도 내심 피크닉 하고 싶으셨던 거죠?”
한 천조 길드원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시현은 장난을 받아들이지 않고 꽃밭 너머를 가리켰다.
“저거 보이십니까?”
“네? 어……. 엄청 커다란 꽃이 있네요.”
“보스 몬스터일 확률이 높습니다.”
탐사대원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굳어 버렸다. 무기를 만지작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폭탄 발언을 날린 시현은 보스 몬스터로 보이는 커다란 꽃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어째서인지 활동을 안 하는 것 같으니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체력을 비축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는 편이 좋겠네요.”
장난 어린 말을 꺼냈던 길드원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휴식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피크닉 같은 풀어진 분위기는 아니었다. 언제 보스 몬스터가 깨어날지 알 수 없었으므로.
그때 시현이 탐사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이나에게 다가왔다. 이나가 올려다보자 그가 옆에 앉으며 조용히 말했다.
“이나 씨, 부탁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부탁이요?”
“정령들을 저 꽃이 있는 곳으로 보내 조사를 하고 싶습니다.”
유일하게 밖으로 드러난 이나의 눈이 그를 보며 깜빡였다. 시현이 재차 물었다.
“안 되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이미 보냈는데요.”
“네? 아니, 언제…….”
“아까 꽃을 발견하자마자요.”
시현은 할 말을 잃어버린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방심하지 못하겠습니다.”
“제발 방심 좀 해 줬으면 좋겠네요.”
“하하…….”
“왜 웃어요?”
“네? 어……. 그냥 웃음이 나왔습니다.”
대답하는 시현도 자신이 왜 웃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이나가 시현을 뭐 이런 바보가 다 있나 하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마침 조사를 보냈던 이즈와 리카, 그리고 네움이 돌아왔다.
“어땠어?”
이나가 허공에 대고 묻자 시현도 그녀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저곳에 정령들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를 힐끗 본 이즈가 먼저 대답했다.
[엄청 커다란 꽃이었어! 우리 집보다 더 컸어!]
“비유가 왜 하필 내 집……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것 말고 다른 특이한 점은?”
[꽃잎이 모아져 있어서 속은 자세히 못 봤어…….]
리카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별다른 소득이 없어 이나가 고민하고 있는데, 네움이 끼어들었다.
[뿌리…….]
“뿌리?”
이나가 바라보자 네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긴 말을 내뱉었다.
[뿌리가 없었어.]
“뿌리가 없었다고?”
“그럼 다른 몬스터들과 달리 뿌리가 약점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시현이 다급하게 물어 왔지만 이나도 알 수 없었기에 대답하기 곤란했다.
그때 탐사대가 쉬고 있는 방향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야, 어디 가!”
“아니, 이 꽃 예쁘잖아. 하나 뽑아 가게.”
“하여간에…….”
이나는 꽃밭으로 걸어가는 탐사대원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식물형 몬스터의 약점은 보통 뿌리다. 뿌리 없이는 대개 양분을 얻을 수 없으니까. 그러니 대부분의 식물은 뿌리가 있어야 했다.
‘뿌리가 없다는 말은 다른 것을 통해서 양분을 얻고 있다는 말인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찰나 꽃밭이 이나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설마…….’
이나는 꽃밭 앞에 쭈그려 앉은 사람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그 꽃 뽑지 마요!”
“네?”
하지만 늦어 버렸다. 이미 그의 손에는 꺾인 꽃이 들려 있었다.
그 순간 땅이 미미하게 진동했다.
“뭐, 뭐야?”
“야! 너 뭘 한 거야?”
“난 아무것도…….”
꽃을 꺾은 탐사대원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시현이 튀어 나갔다.
그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그는 놀란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탐사대원의 뒤를 찔렀다.
“키에엑!”
놀란 탐사대원이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 몬스터가 있었다. 검을 뽑은 시현이 낮게 중얼거렸다.
“설마 이 꽃밭이 전부…….”
“네? 서, 설마 이 꽃밭의 꽃들이 전부 몬스터라는 무시무시한 말은 하지 않으시겠죠?”
시현은 침묵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탐사대가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무기를 꺼냈다.
그사이 이나가 시현에게 다가갔다.
“저 거대한 꽃은 아마도 기생 식물일 거예요.”
“기생 식물이요?”
“네. 봐요.”
시현이 이나가 가리킨 곳을 쳐다보았다.
그곳엔 거대한 꽃이 있었다. 하지만 이나가 가리킨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근처에 있던 식물형 몬스터들이 거대한 꽃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꽃에 찰싹 붙어 그대로 스며들었다.
몬스터들이 스며들수록 개체는 줄었지만 상황이 좋아진 건 아니었다. 그럴수록 거대한 꽃이 꿈틀거리며 개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군요. 주변에 있는 동족을 먹어 치워 개화한다라…….”
시현의 검 끝이 거대한 꽃을 가리켰다.
“완전히 피기 전에 없애야겠습니다.”
“동감하는 바예요.”
그 순간 시현의 몸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일반인은 쫓아가기 힘든 빠른 속도였다.
이나는 시현을 쫓지 않았다. 대신 뒤에서 그의 이동을 방해하는 몬스터들을 막거나 해치우는 등 서포트를 했다.
직접 움직일 수도 있었지만 보는 눈이 많은 탓이었다. 시현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직접 나섰다.
그리고 드디어 보스 몬스터로 보이는 거대한 꽃 앞에 다다랐을 때, 시현은 픽 웃었다.
“여전히 편리하네.”
이나의 서포트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로 편리하고 죽이 척척 맞았다.
저런 서포트 실력이라면 어떤 사람과 호흡을 맞추든 능숙하게 그를 도울 터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문득 아쉬워졌다.
“저런 인재를 두고 볼 수밖에 없다니.”
시현 또한 한 길드를 이끄는 사람으로서 무척이나 아까웠다. 이나라는 인재를 그냥 두어야 한다는 게. 마음 같아선 그의 길드로 스카우트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뒤를 맡겨도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탐이 나는 인재였다.
아쉬운 마음에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데 귓가에 이나의 목소리가 꽂혔다.
“뭐 하는 거예요? 빨리 해치우라고요.”
깜짝 놀라 뒤돌아봤지만 이나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정령의 힘을 이용해 소리를 전달한 듯했다.
“분부대로.”
픽 웃은 시현은 검에 오러를 씌웠다. 그리고 그것을 거대한 꽃잎 안쪽으로 그대로 쑤셔 넣었다.
“키에에엑!”
그러자 꽃잎 안쪽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동시에 근처에 있던 식물형 몬스터들이 그에게 달려들자 시현은 일단 뒤로 피했다.
그러나 이곳은 몬스터들의 꽃밭. 뒤에도 이미 몬스터들이 포진해 있었다.
“포위됐군.”
시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며 몬스터들을 훑었다.
어떻게 하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지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단시간에 이 몬스터들을 뚫고 저 거대한 꽃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보는 것이었다.
길을 포착한 시현이 씩 웃었다.
“그냥 다 쓸어 버리면 되겠군.”
***
“아주 학살을 하고 있구만.”
이나는 질린 얼굴로 멀리 떨어진 시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오러를 날려 몬스터들의 몸통을 날려 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몬스터들의 몸통이 다시 자라나는 틈을 타 보스 몬스터를 향해 나아갔다.
이나가 보기엔 그저 오러 낭비였지만 말이다.
[이나야, 저기!]
그때 이즈가 무언가를 가리켰다. 이나 또한 그곳을 보고 있었다.
“알고 있어.”
오므려져 있던 거대한 꽃잎이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몬스터와 싸우던 탐사대도, 몬스터들을 뚫고 나가던 시현도 거대한 꽃이 개화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꽃잎이 하나둘씩 펼쳐졌다. 그리고 안에 잠들어 있던 보스 몬스터의 실체가 나타났다.
“키이이…….”
꽃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름다운 여인의 형상을 한 몬스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녀가 팔을 휘젓자 노랗게 빛나는 가루가 휘날려 탐사대를 향해 쏟아졌다.
보스 몬스터, 라플레인의 화려한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