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저 가루는?”
“독인가?”
탐사대는 불안해하는 눈빛으로 가루가 다가오는 걸 바라보았다.
그때 마침 바람이 불어와 가루를 반대편으로 날려 버렸다.
“뭐 하는 거예요? 가만히 맞고만 있을 작정이에요?”
바람으로 가루를 날리고 탐사대를 꾸짖은 것은 다름 아닌 이나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탐사대가 민망해하는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바람 속성 마법사십니까? 덕분에 살았습니다.”
“알면 됐어요. 그보다 지금부터 작전을 짜죠.”
“작전이요?”
탐사대가 의아해하는 얼굴로 이나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이나가 보스 몬스터 라플레인을 보며 말했다.
“저 보스 몬스터는 뿌리가 없어요. 주변의 몬스터들을 흡수해서 힘을 쓰고 있는 거예요.”
“그게 강점이자 약점이겠군요.”
눈치 빠른 사람이 중얼거리자 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여긴 몬스터들의 꽃밭. 흡수할 힘들이 주변에 널려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 몬스터들을 다 제거하면 힘을 쓸 수 없겠죠.”
“하지만 다 제거하기엔 너무 많습니다.”
누군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이 넓은 꽃밭을 다 뒤집어엎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런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다 제거하재요?”
“네?”
“다 제거할 필요 없이 보스 몬스터 근처에만 가지 않게 해도 충분하잖아요.”
“하지만 어떻게요?”
단순히 몸으로 막기엔 수가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 지금 그들은 꽃밭의 외곽에 있었다.
보스 몬스터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것도 문제지만, 가서 어떻게 라플레인의 공격을 피하며 몬스터들을 막느냐도 문제였다.
“다 방법이 있죠.”
그 순간 탐사대 전원의 몸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탐사대원들이 이것도 몬스터의 소행인가 싶어 발버둥 치는데 이나의 태연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있어요. 움직이면 더 힘드니까.”
“네? 이거 그쪽의 능력입니까?”
“그렇다고 해 두죠.”
이나가 대답하고 나서야 모두 얌전히 있었다. 이나는 그들을 데리고 보스 몬스터 근처로 향했다.
거대한 꽃 안에 있는 여인의 형상이 그들을 가만히 올려다보자 모두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공중이라 라플레인이 공격한다면 피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그들의 목숨 줄은 이나의 힘 컨트롤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이제 어쩔 생각입니까?”
누군가의 물음에 이나가 그를 힐끗 보았다. 아까부터 그녀를 마음에 안 들어 하던 헌터였다.
그는 지금도 눈빛이 불손했다. 시현처럼 팀 리더도 아닌 일개 헌터가 나서는 것이 꼴 보기 싫은 듯했다.
이나는 그만 떨어뜨려 버릴까 하다가 꾹 참았다. 대신 어깨 위에 앉은 네움을 바라보았다.
네움이 보일 리 없는 다른 이들은 이나가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여 초조했다. 그에 그 헌터가 다시 이나에게 질문을 던지려는 그때였다.
쿠구구구-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공중에 떠 있는 사람들 중에선 못 느끼는 이들도 있었지만, 땅에 있는 시현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시현이 반사적으로 밑을 내려다보는 순간, 갑자기 땅이 솟구쳐 올랐다.
“우왁!”
“저게 뭐야!”
공중에 있는 이들도 그 광경을 보고 경악했다. 땅이 솟구쳐 오르더니 라플레인 주변으로 흙벽을 쌓았다.
라플레인을 다른 몬스터들과 철저히 분리시킨 채로.
이나는 멍한 얼굴의 그들을 데리고 흙벽 위에 안착하여 물었다.
“이거면 됐죠?”
“어…….”
속으로는 이거면 된 것 같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정작 입은 얼빠진 소리만 내었다.
이나는 그런 그들을 무시하고 흙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보다 전투 준비하시죠.”
“네? 보스 몬스터 죽일 준비요?”
“아뇨. 저놈들이요.”
이나가 벽 밑을 가리켰다. 벽이라곤 해도 흙이라 그런지 식물형 몬스터들이 뿌리를 이용해 벽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질리는 광경에 탐사대가 미간을 좁혔다.
“젠장. 이것도 타고 넘으려 할 줄이야…….”
“그래도 우리가 위에 있으니 한 놈씩 처치하기는 좋겠는데요?”
탐사대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몬스터들을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나는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고개를 돌렸다.
“대단하군요. 이런 것도 가능했다니…….”
그는 어느새 벽을 타고 올라온 시현이었다. 시현은 흙벽을 어루만지며 놀라움을 가득 담아 이나를 올려다보았다.
쑥스러워진 이나는 괜히 딴소리를 했다.
“크흠! 그보다 지금 이럴 때예요? 다른 몬스터들이 보스 몬스터에게 향하기 전에 얼른 처치해야죠.”
“그래야죠.”
피식 웃은 시현이 라플레인을 내려다보았다. 라플레인은 갑작스럽게 홀로 떨어지자 당황스러운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흙벽 위에 있는 이나와 탐사대를 보고 분노하여 흙벽을 마구 치기 시작했다.
“키익! 키에에엑!”
“어휴. 시끄러워. 얼른 가서 처치 좀 해 주세요.”
“분부대로.”
낮게 웃음을 흘린 시현이 흙벽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그를 향해 라플레인의 공격이 날아왔지만 노련한 그는 오러를 씌운 검으로 모든 공격을 잘라 내거나 쳐 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나에게 해진이 다가왔다.
“휘유. 이제 보니 등급이 낮진 않나 봐요?”
“낮아요.”
“이런 거대한 흙벽을 쌓아 놓고 낮긴 무슨. 최소 A급은 되겠구만. 거짓말 되게 못하는 거 스스로도 알고 있죠?”
이나가 째려보자 해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 마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고마워요.”
“상부상조죠.”
이나와 해진이 동시에 피식 웃었다. 그때 마침 시현이 벽에 처박혔다.
S급 헌터답게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지만 꽤 상대하기 번거로운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미 많은 몬스터들을 먹고 힘을 축적해 개화한 보스 몬스터였다. 상대하기 까다로울 만도 했다.
혀를 쯧 찬 이나가 해진에게 말했다.
“다녀올게요.”
“네? 어, 잠깐……!”
해진이 말리려 했지만 이미 이나는 흙벽 안으로 뛰어내린 참이었다.
이나는 리카의 바람을 타고 시현에게로 가 그에게 말했다.
“꽤 까다로운 모양이네요?”
“몸집이 커서 그렇습니다.”
자존심이 상한 건지 시현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나가 피식 웃으며 라플레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도와줄게요.”
“괜찮습니다.”
“시간 끌면 다른 헌터들이 먼저 지쳐 버린다고요.”
맞는 말이었기에 시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도움을 받겠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두지 않겠다는 듯 라플레인이 팔을 휘둘렀다. 그저 가녀린 팔처럼 보이던 팔이 순식간에 채찍처럼 늘어나 두 사람을 향해 휘둘러졌다.
콰앙!
이나는 정령의 능력으로, 시현은 자신의 신체 능력으로 공격을 피했다. 두 사람이 벗어난 자리는 라플레인의 공격으로 깊게 파여 있었다.
“저놈이 벽을 뚫어 버리기 전에 얼른 해치우자고요.”
“알겠습니다.”
시현이 라플레인을 향해 달려갔다. 안 그래도 빠른 속도에 이나의 보조까지 더해지니 라플레인도 그를 공격하기가 쉽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 몬스터는 타깃을 바꾸었다.
“어쭈. 나부터 해치우려고?”
이나가 웃었다. 하지만 눈은 눈앞의 보스 몬스터를 서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라플레인이 이나를 향해 자신의 팔을 송곳처럼 찔러 왔다. 팔은 점점 늘어나 이나를 향했지만.
서걱-
이나의 눈앞에서 잘려 떨어졌다. 리카의 능력이었다.
“키에에엑!”
[감히 우리 이나를 공격하다니!]
리카가 기특한 말을 내뱉었다. 이나가 머리를 톡톡 쓰다듬어 주자 리카가 헤헤 웃었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시현이 라플레인이 고통스러워하는 틈을 타 꽃잎 위로 올라갔다.
그대로 중심을 향해 점프하려는 순간, 라플레인이 아까와 같은 노란 가루를 푸우 내뱉었다.
“윽……!”
“리카, 바람으로 가루를 위로 올려서 퍼뜨려 버려!”
[알았어!]
이나가 다급히 명령했지만 시현은 이미 가루를 조금 마셔 버린 듯했다. 공격을 피하는 그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라플레인이 그 틈을 타 시현을 공격하려 하자 이나가 외쳤다.
“윈티, 얼음 창!”
[네, 네!]
윈티가 얼음으로 된 창을 만들어 내 시현에게로 뻗는 라플레인의 손을 꿰뚫었다. 서둘러야 했던 만큼 작은 창이었지만 시현이 공격을 피하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이나는 몸을 피한 시현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단순한 마비 가루인 듯합니다.”
검을 쥐고 있는 시현의 손이 잘게 떨렸다. 그 와중에도 검은 놓치지 않는 모습을 보니 솔직히 감탄스러웠다.
“타고난 검사네요.”
“이 상황에서 갑자기 칭찬입니까?”
“칭찬해 줘도 뭐래.”
작게 툴툴거린 이나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완벽히 움직이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10분…… 아니, 5분이면 충분합니다.”
“그럼 그동안 시간을 끌 테니까 얼른 나아서 와요.”
“네? 이나 씨 혼자서 말입니까?”
“왜요? 듀라한도 처치한 나예요. 못 할 것 같나요?”
이나가 그를 보며 씩 웃었다.
시현은 그제야 눈치챘다. 이나가 마음만 먹으면 눈앞의 보스 몬스터를 해치울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눈에 띄기 싫어하는 그녀의 성정 때문이었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시현이 갑자기 하하, 웃음을 흘렸다.
“……제가 누군가에게 뒤를 맡겨 보긴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거 영광이네요.”
그 말과 동시에 이나가 날아올랐다. 그리고 이즈와 파인에게 작게 명령을 했다.
그녀의 계획을 들은 이즈와 파인이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 줘!]
[잘할 수 있어!]
“좋아. 시작해.”
그녀가 뭔갈 하려 한다는 걸 눈치챈 건지 라플레인이 공격을 퍼부었다.
이나는 라플레인이 땅을 내려쳐서 날리는 돌을 피하며 이즈와 파인이 만들어 낼 ‘그것’을 기다렸다.
“왜 저렇게 행동반경을 넓히는 거지?”
그 모습을 시현이 의아해하며 바라보았다. 이나는 지금 라플레인의 공격을 피하는 척하며 벽 안을 누비고 있었다.
그 의문은 곧 풀렸다.
“어? 저게 뭐야?”
“안개?”
이나가 움직일수록 흙벽 안엔 안개가 퍼졌다. 정확히는 이즈의 물과 파인의 불이 만들어 낸 수증기에 가까웠지만, 그것이 짙어지자 라플레인의 눈을 가리기엔 충분했다.
“키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라플레인의 행동도 위축되었다. 보스 몬스터의 눈이 이나를 찾기 위해 열심히 움직였다.
그때 라플레인의 뒤로 얼음으로 된 창이 날아왔다.
푹-
“키에엑!”
라플레인이 비명을 지르며 창을 빼냈다. 그러자 식물의 진액이 몸에서 흘러나왔다.
더욱 경계하는 라플레인을 보며 이나가 웃었다.
“소용없다는 거 알면서.”
“키이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라플레인이 공격을 했다. 하지만 이미 그곳은 비어 있었다.
쐐애액-
예민해진 라플레인의 귀에 공격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분명 큰 것이었다.
라플레인은 두 팔을 뻗어 미리 선수를 쳤다. 창을 막을 심산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무언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챙-
“키이?”
그런데 라플레인을 향해 날아오던 얼음의 창이 눈앞에서 분산되었다.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고개를 갸웃하는 라플레인을 보며 이나가 말했다.
“응. 그건 속임수.”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이 위쪽을 가리켰다.
“진짜는 이쪽.”
그제야 라플레인이 고개를 들었다. 하얀 섬광과 같은 빛이 눈앞에서 번쩍거렸다.
빛과 같은 오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