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가 라플레인의 시선을 끌며 안개를 만드는 사이 5분이 지나, 시현에게 걸려 있던 디버프가 풀렸다.
그것을 눈치챈 이나는 부러 거대한 얼음 창을 날려 라플레인의 신경이 이에 쏠리게 만들었다.
빈틈을 발견한 시현이 라플레인을 해치울 수 있도록.
촤악-
오러로 라플레인의 몸을 정확히 반으로 가르며 시현은 승리를 확신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신기해.’
마치 슬로 모션처럼 시현의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그런 그의 눈에 담긴 것은 그가 베고 있는 라플레인이 아닌, 맞은편에 두둥실 떠 있는 이나였다.
‘호흡이 놀랍도록 잘 맞아.’
단순히 이나가 서포트를 잘해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도하와 아란처럼 서로를 파트너라도 칭해도 좋을 정도로 호흡이 잘 맞았다.
물론 그것은 그처럼 이나도 전생에 수많은 경험을 한 덕분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지난번 A급 던전에서 함께 싸워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함께 싸워 봤다고, 이나와 시현은 서로의 패턴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에 시현은 왠지 모를 희열을 느꼈다.
“키이이…….”
보스 몬스터 라플레인이 신음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동시에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꽃이, 그리고 주변의 식물형 몬스터들이 모두 시들해졌다.
“성공한 건가?”
누군가의 중얼거림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모두의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A급 던전 ‘공포의 꽃밭’ 공략에 성공하셨습니다!⌟
“와아!”
“드디어!”
몰려오는 식물형 몬스터들을 막아 내던 헌터들이 지쳐서 주저앉거나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성공을 자축했다.
피식 웃으며 그 모습들을 바라보던 이나는 추가로 떠오른 시스템 창을 바라보았다.
⌜‘라플레인의 독낭’을 획득하셨습니다.⌟
⌜2SP를 획득하셨습니다.⌟
“……겨우 2?”
이나의 얼굴이 짜게 식었다. 곁에 있던 시현이 이를 보고 말했다.
“최후의 일격은 제가 날렸으니 이나 씨 스탯 포인트가 적게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 말은 이시현 헌터는 꽤 받았단 소리네요?”
“별로 차이 안 납니다. 3SP입니다.”
이나가 부루퉁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 봤자 마스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눈빛이 불손했기에 시현은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듀라한 때는 이나 씨가 더 많이 얻지 않았습니까. 스탯 포인트도, 마정석도.”
“하긴. 쌤쌤이네요.”
그제야 이나가 표정을 풀었다. 그때 다른 헌터의 도움을 받아 흙벽 위에서 내려온 해진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둘 다 무사하죠? 내가 필요한 상황은 없는 거죠?”
“되게 필요 없었으면 하는 얼굴이네요.”
“당연하죠. 힐러가 필요하다는 건 부상자가 있다는 건데.”
“그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귀찮아하는 얼굴이었는데.”
“이젠 모함도 하시네.”
이나와 해진이 투닥거리자 시현은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를 힐끗 본 해진이 물었다.
“근데 둘이 아는 사이예요?”
“네. 이 사람은 제 비밀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에요.”
이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던 해진이 측은해하는 눈길로 시현을 쳐다보았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아닙니다.”
‘뭔데. 왜 그런 반응인 건데.’
이나가 황당해하며 바라보았지만 이미 그들은 말 두 마디로 조금 친해진 뒤였다.
이나가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리자 해진이 그제야 이나를 돌아보았다.
“그보다 이나 씨는 저한테 줄 게 있을 것 같은데.”
“아.”
바로 알아들은 이나가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보스 몬스터를 잡고 얻은 부산물, ‘라플레인의 독낭’이었다. 이나는 그것을 망설임 없이 그에게 건네며 물었다.
“이걸로 오빠를 치료할 수 있는 거죠?”
“해독 포션을 만드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아마도요.”
‘아마도’라고 말했지만 해진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이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켜보던 시현까지 안도하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얼씨구?”
시현의 얼굴을 본 해진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현은 괜히 찔려서 방금까지 짓고 있던 미소를 금세 얼굴에서 지웠다.
의아해진 이나가 물었다.
“왜 그래요?”
“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근데 있잖아요. 둘이 무슨 사이예요?”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대답은 시현이 했다. 언뜻 딱딱하게도 느껴지는 말투였지만 이나는 신경 쓰지 않고 동조했다.
“맞아요. 아무 사이 아니에요.”
“흐음……. 그래요?”
해진이 의심스럽다는 듯 시현을 힐끗 보았지만 곧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럼 말고요.”
그러고는 뒤로 홱 돌아 다른 헌터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나가 눈을 깜빡이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는 왜 물어보는 거죠?”
“……글쎄요.”
반면 시현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아까의 전투로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단박에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는 이나의 대답이 조금, 아주 조금 서운한 탓이었다.
물론 시작은 그가 했지만 말이다.
‘이런 일로 후회해 보긴 또 처음이군.’
시현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
던전을 나가자 해가 져 있었지만 기자들은 그대로였다. 그들은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플래시를 터뜨리며 돌아온 탐사대를 맞이했다.
이나는 해진의 뒤에 서서 남몰래 마스크를 끌어 올렸다. 최대한 얼굴을 드러내지 않기 위함이었다.
해진도 이젠 익숙하다는 듯 그녀를 가려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시현도 일부러 그녀와 떨어진 곳에 서서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해진을 향하던 몇몇 카메라가 시현에게로 돌아갔다. 그것을 당당히 마주하며 시현이 입을 열었다.
“던전 공략은 무사히 마쳤습니다. 사망자도, 부상자도 없습니다. 안에 있던 몬스터들은 대부분 식물형 몬스터들로…….”
해진은 따분하다는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옷깃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어 그가 뒤를 돌아보자 이나가 속삭였다.
“이 틈에 몰래 빠져나가죠.”
“나도 복귀 관련으로 인터뷰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먼저 가요.”
고개를 끄덕인 이나는 상황을 주시하다가 틈을 보고 몰래 그곳을 빠져나왔다. 몇몇 기자들이 그녀를 발견했지만 들러리에 가까운 존재라 그런지 다행히 그냥 보내 주었다.
[이나야, 이제 오빠한테 가는 거야?]
“그래야겠지?”
쉬는 날임에도 그녀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아 걱정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가만히 앉아 창밖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거나.
최근 들어 이한은 멍하니 앉아 있는 일이 많았다. 어쩔 때는 그녀가 왔는데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 모습을 보며 이나는 느꼈다.
이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이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걸음을 빨리했다. 그녀는 그냥 리카의 바람을 타고 갈까 고민하고 있다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이와 어깨를 부딪쳤다.
“아, 죄송합니다.”
“아닙…… 이나 씨?”
사과를 전하고 곧바로 걸음을 옮기려던 이나가 멈칫했다. 고개를 홱 돌리자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서준이 눈에 들어왔다.
“……본부장님?”
“이나 씨가 맞군요. 오늘은 출근하는 날이 아닌가 보죠?”
서준이 반가움과 놀라움을 담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반면 이나는 난처해하는 얼굴로 마스크를 내렸다.
“본부장님이 여긴 어떻게…….”
“이 근방에 새 던전이 출몰했는데, 오늘 탐사대를 보냈거든요. 확인차 왔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이나 씨는 여기 어쩐 일인가요?”
“전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어요.”
이나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내뱉었다. 서준도 딱히 의심하지 않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바쁜 사람을 붙잡은 모양이군요. 어서 가 보…….”
“이나 씨!”
이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서준은 의아해하는 얼굴로 목소리가 들린 쪽을 홱 돌아보았다.
인터뷰를 마친 시현이 그녀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먼저 가 버리면 어떡합…….”
가까이 다가오던 시현이 서준을 보고 멈칫했다.
“……헌터 협회 본부장님?”
“오랜만입니다, 천조 길드장님.”
“아, 네. 오랜만입니다. 탐사 확인차 오신 겁니까?”
“네. 맞습니다. 그나저나…….”
서준이 고개를 돌렸다. 태연한 척하고 있으나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이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천조 길드장과 아는 사이인가요? 그리고 분명 방금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다고…….”
‘젠장.’
속으로 욕설을 내뱉은 이나가 원망 어린 눈으로 시현을 힐끔 쳐다보았다.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시현이 입을 열었다.
“저희는…….”
“아는 사이 맞아요.”
이나가 답을 가로챘다. 그러자 시현과 서준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 닿았다.
이나는 시현이 적당히 맞장구쳐 주길 바라며 말을 이었다.
“이시현 헌터를 만나러 왔는데 바빠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그렇죠, 이시현 헌터?”
이나가 눈을 부릅뜨며 시현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서 무언가를 읽어 낸 시현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습니다. 제가 뒤늦게 이나 씨를 발견해서 쫓아온 거고요.”
“흐음…….”
서준이 이나와 시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대답이 미뤄질수록 이나의 속은 타들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서준이 납득했다.
“그렇군요.”
“네! 그런 거예요!”
이나가 반색하며 맞장구를 쳤다. 시현도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나는 제발 서준이 그냥 넘어가기를 바랐다. 다행히 그녀의 기도가 통했는지 서준은 의심을 푼 눈빛이 되었다.
대신 다른 폭탄 제안을 내뱉었다.
“그나저나 이 조합도 특이하군요. 이것도 인연인데, 같이 카페나 갈까요?”
“네? 저도요?”
“천조 길드장께는 보고받을 것도 있고, 이나 씨는…….”
서준이 싱긋 웃으며 이나를 바라보았다.
“함께하면 재밌고 좋을 것 같아서요.”
난 재미없는데요.
짜게 식은 이나가 얼른 거절하려고 입을 여는 찰나, 서준이 선수를 쳤다.
“어차피 천조 길드장님을 만나러 왔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죠.”
거절할 명분도 사라지자 이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릴 뻔했다. 하지만 꾹 참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적당히 놀아 주다가 튈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