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149)

시현은 멍하니 시스템 창을 바라보았다.

“이나 씨가 정말로 해냈군요.”

[당연하지 않은가! 계약자는 내 계약자…….]

[근데 왜 이나가 안 나오지?]

때마침 이즈가 제기한 의문에 시현도 볼트도 말하던 것을 멈추고 동시에 흙벽이 세워진 곳을 쳐다보았다.

흙벽 안쪽에서 웬 가루가 뚫린 천장을 통해 연기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설마 뭔가 잘못된 건 아니겠죠?”

[이나야…….]

세 존재 사이에 불안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굳어 있던 시현이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이즈와 제가 한번 가 보죠. 볼트는 여기서 혹시나 남아 있을 다른 몬스터가 이나 씨의 오빠에게 접근하지 않게 막아 주십시오.”

[맡겨 주시게!]

볼트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시현은 이즈와 함께 흙벽이 세워져 있는 곳, 이나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가루는 더 짙어졌다. 숨 쉬느라 어쩔 수 없이 조금 들이마셨을 뿐인데 손끝이 저릿해져 왔다.

결국 시현은 인벤토리 구석에 있던 마스크 하나를 꺼내 착용했다. 그리고 몸이 더 마비되기 전에 빠른 속도로 흙벽 위로 올라갔다.

“이나 씨는 대체 어디에…….”

[저기!]

이즈가 어딘가를 손으로 가리켰다. 시현도 그쪽을 쳐다보자 가루가 밀려나며 무언가가 위로 솟구쳐 오르는 것이 보였다.

몬스터인가 싶어 시현은 반사적으로 검 손잡이에 손을 댔다. 하지만 그의 앞에 내려서는 이를 보는 순간, 그는 안도했다.

“콜록, 콜록!”

“이나 씨, 괜찮으십니까?”

시현이 주저앉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으며 물었다. 한차례 기침을 내뱉던 이나는 리카가 바람으로 가루를 날려 버린 뒤에야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보스 몬스터 가까이 있던 탓에 몸은 마비됐지만. 젠장. 설마 자폭을 할 줄이야.”

“자폭이요? 아니, 그보다 몸이 얼마나 마비된 겁니까?”

“오른쪽 팔다리는 아예 안 움직여요. 왼쪽 팔은 그나마 괜찮고요.”

“대체…….”

그의 탓도 아니건만 시현은 제가 다 괴로운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이나는 괜히 혼나는 기분에 고개를 슬쩍 돌리며 물었다.

“그보다 우리 오빠는요? 오빠는 어쩌고 혼자 왔어요?”

“이나 씨 몸이 이런데 오빠가 걱정이 됩니까?”

“당연히 걱정되죠.”

“하아…….”

한숨을 내쉰 시현이 결국 대답해 주었다.

“무사합니다. 지금은 볼트가 붙어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얼른 오빠한테 가요.”

이나가 리카를 쳐다보았다. 바람으로 자신을 옮겨 달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그러기도 전에 시현이 그녀를 향해 등을 보였다.

“업히십시오.”

“네? 아뇨. 리카에게 부탁해도…….”

“밖에서도 바람으로 둥둥 떠다닐 건 아니잖습니까.”

그건 그랬다. 그랬다간 나 각성자요, 하고 알리는 꼴일 테니까.

망설이던 이나는 결국 시현에게 몸을 맡겼다.

“그럼 부탁할게요.”

“네.”

짧게 대답한 시현이 흙벽을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파도를 타듯 멋진 슬라이딩 실력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한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아니! 계약자, 이게 무슨 꼴인가?]

“그럴 일이 있었어.”

대충 대답한 이나는 시현에게 부탁해 이한의 옆에 착석했다. 다행히 기절한 것뿐인 이한을 보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현이 물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어쩌긴 뭘 어째요. 천해진 씨를 부르죠. 아까 들어 보니까 독 분석이 끝난 모양이더라고요. 해독 포션도 빠르게 나오겠죠. 그러니 오빠도 한번 보이고…….”

“이 와중에도 오빠 걱정만 하는 겁니까?”

시현이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이나는 황당하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사람 말은 좀 끝까지 들어요. 오빠도 한번 보이고, 제 마비를 풀 해독 포션도 만들어 달라고 할 거예요.”

“아.”

그제야 시현이 멋쩍어하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어휴, 하고 한숨을 내쉰 이나가 그를 향해 왼팔을 뻗었다.

“자, 그럼 가죠.”

한번 업혀 봤다고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픽 웃은 시현이 그녀를 한 팔로 안고 이한을 옆구리에 끼워 들어 올렸다.

“분부대로.”

***

“대체…… 이게 다 무슨 꼴이에요?”

이나의 연락을 받고 병원에 온 해진이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나는 몸의 반이 마비되었고 이한은 맨발로 움직인 탓에 발바닥을 다친 상태였다. 여기서 가장 강해 그들을 지켜줬어야 할 시현이 오히려 가장 멀쩡했다.

뻘쭘해하는 얼굴로 시선을 피하는 시현을 향해 해진이 날카롭게 물었다.

“대체 이시현 헌터는 두 사람을 두고 뭐 한 겁니까?”

“크흠!”

이나의 부탁이 있었다곤 하나 전투에 끼어들지 않은 건 사실이었기에 시현은 민망함에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나가 해진에게 물었다.

“그보다, 해독 포션은요?”

“일단 시제품은 완성됐어요.”

“천해진 씨가 만든 거니 완성품에 가깝겠죠. 바로 오빠한테 써 주세요.”

“그건 당연한 거고요. 그 전에.”

해진이 손가락 끝으로 이나의 이마를 툭 쳤다.

“마비를 풀 포션도 가지고 올 테니까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요. 알겠어요, 환자분?”

“어차피 어디 가고 싶어도 못 가거든요.”

이나가 뚱하게 대답했다. 그제야 해진이 만족스럽다는 듯 병실을 나갔다.

해진이 나가고 시현이 슬쩍 다가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천해진 헌터와 친한 모양입니다.”

“뭐, 나쁘진 않은 것 같아요.”

“그런가요.”

픽 웃은 시현이 의자를 끌어와 그녀의 앞에 앉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나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그가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게 뭐예요?”

“타박상에 좋은 약입니다.”

“그런데요?”

“뺨에 상처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대로 두면 흉 집니다.”

“아.”

그제야 이나는 라플레인에게 당했던 뺨의 상처를 상기했다. 동시에 다시 분노가 올라왔다.

“생각하니까 짜증 나네요. 다 죽이기도 전에 자폭해 버리다니.”

“그래도 다시 들어갈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자폭 능력도 있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 방심하지 않을…….”

“안 됩니다. 자꾸 그러시면 길드원들을 시켜 그 근처를 감시할 겁니다.”

“와. 권력 남용.”

시현은 무시하고 손가락에 약을 묻혀 이나의 상처에 살살 발라 주었다. 하필 뺨에 난 상처라 두 사람은 꼼짝없이 얼굴을 가까이 해야 했다.

쓰라릴 만도 하건만 이나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어쩌면 마비 독 탓에 아픈 걸 못 느끼는 걸지도 몰랐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시현은 약을 꼼꼼히 바르는 데 집중했다. 그런데 저를 빤히 보는 이나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까 하다 만 얘기가 생각나서요.”

“하다 만 얘기라면…….”

“당신을 도와준 사람들한테 고맙다고 잘 말했어요?”

“그거라면 걱정 마십시오. 사과까지 두 배로 했습니다. 다행히 모두들 갑자기 무슨 말이냐고 쑥스러워하며 웃어 주더군요.”

“그렇구나. 다행이네요. 잘했어요.”

히죽 웃은 이나가 마비에 걸리지 않은 왼팔을 들어 올려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 본인도 의식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시현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잠시 후, 그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해진이 들어왔다. 그는 저를 보는 이나와 여전히 굳은 채 푸시식, 하는 얼굴을 식히는 시현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내가 안 좋은 타이밍에 들어온 건가요?”

“무슨 말이에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해진은 시현을 흘끗 보다가 이나에게 다가와 병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이나 씨 거예요.”

“고마워요.”

“그리고 이게 바로 라플레인의 독을 치료할 포션이고요.”

포션을 마시던 이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해진도 같은 얼굴로 병의 뚜껑을 열어 이한의 입에 그것을 흘려 넣었다.

다행히 이한은 포션을 모두 삼켰다. 겉보기엔 아무런 반응도 없었기에 이나가 불안해하는 얼굴로 물었다.

“이제 괜찮은 거예요?”

“뭐, 깨어나는 걸 봐야죠.”

이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한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를 보는 눈빛에 걱정이 많았기에 시현이 위로라도 해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의 말이 나오기도 전에 병실 문이 급하게 열렸다.

“이나 씨, 유이한 씨를 찾았다고…….”

문을 연 서준이 이나의 양옆에 있는 시현과 해진을 보고 멈칫했다.

“……천조 길드장님? 천해진 헌터까지…….”

“다행히 오빠는 찾았어요. 이시현 헌터가 도와줬거든요.”

“이시현 헌터가 도와줬다고요?”

그가 의문을 표하자 이나가 대답했다.

“네. 지나가는 길에 발견하고 데려와 줬어요. 그리고 천해진 씨가 지금 막 오빠 몸에 있는 독을 치료해 준 참이에요.”

“그거 다행이네요. 그런데 두 분은 또 어떻게 알게 된 사이예요?”

“이나 씨에게 빚을 진 게 있거든요.”

이번엔 해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이나를 보는 눈빛이 ‘잘했지?’라고 묻는 듯했다.

픽 웃은 이나가 동조하자 서준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이나 씨 주위엔 능력자들이 많군요.”

“하하…….”

“이거야, 원. 이렇게 되면 제가 손쓴 게 무색해지는군요.”

“네? 무슨 말이에요, 그게?”

이나가 의아해하며 쳐다보자 서준이 빙긋 웃었다.

의문은 곧 풀렸다. 그의 뒤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갑자기 이한을 꼼꼼히 살피는 그들을 보며 이나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서준이 말했다.

“제 부하 직원이 일하다 다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잘 좀 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니, 이렇게까진…….”

아무리 봐도 잘 봐 달라고 부탁한 게 아니라 잘 보라고 명령이라도 한 것 같은 얼굴들이었다.

이나는 병원 관계자들을 안쓰러워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간호사 한 명이 다급히 외쳤다.

“유이한 환자 깨어났습니다!”

“정말요? 오빠!”

이나가 포션 덕에 마비가 조금 풀린 몸을 이한이 누워 있는 침대에 가까이 붙였다. 파르르 떨리던 이한의 눈꺼풀이 올라가며 그의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나야?”

“오빠! 몸은 어때? 괜찮아?”

“으응……. 괜찮은 것 같…….”

몸을 일으키던 이한이 멈칫했다. 이나의 뒤로 웬 남정네들이 보였다.

그것도 한 명 빼고는 다 아는 얼굴들이었다.

이한의 얼굴이 구겨지며 그가 살벌하게 물었다.

“저 인간들은 왜 여기 있어?”

“오빠, 정신이 돌아왔구나!”

이나가 감격한 얼굴로 이한을 끌어안았다. 훈훈한 광경에 병원 관계자들이 흐뭇해하는 미소를 지었지만 ‘저 인간들’이라 칭해진 세 남자는 땀을 삐질 흘렸다.

‘여전히 동생을 끔찍하게 여기네.’

‘이래서야 다가가기도 쉽지 않겠군.’

‘나는 왜…….’

각자 불만이 차올랐지만 그것이 말이 되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이나를 끌어안으면서도 그들을 노려보는 이한의 흉흉한 눈빛 때문이었다.

세 사람은 결국 이한의 눈빛을 못 이기고 먼저 병원을 나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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