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사무실 안에서 한 남자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등으로 받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 남자는 좁은 시야 속에서 그것만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마침내 결심이 선 그가 휴대폰을 집어 들고 번호를 눌렀다.
한국의 지역 번호는 아니었다. 복잡한 숫자 나열의 번호로 전화를 건 그는 이내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Hello?]
“한국의 에덴 길드장입니다.”
통역 마도구를 착용하고 있었기에 그는 부담 없이 한국어로 말했다.
숨을 쓰읍 들이마신 그가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의뢰를 하고 싶습니다.”
스피커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상대방이 말했다.
[……Hold on, please.]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어딘가로 전화가 연결되었다.
다시 들린 목소리는 원래 받았던 이의 것이 아닌 다른 남자의 것이었다.
[그래. 의뢰를 하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의뢰를 받는 사람들인지는 알고 전화한 건가?]
심드렁하지만 날카롭게 묻는 말에 에덴 길드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알고 있습니다.”
[얘기가 빨라지겠네. 하긴. 그런 목적이 아니고서야 이 번호를 알 수 있을 리 없었겠지.]
낄낄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그저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자 상대방이 재미없다는 듯 퉁명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의뢰를 하고 싶은 거지? 정보? 습격? 그도 아니면…… 암살?]
“암살입니다.”
[암살은 값이 꽤 나가는데……. 그만한 비용을 지불할 자신은 있나?]
“의뢰 비용을 돈으로만 받지는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긴장감에 숨을 재차 들이마신 그가 이어서 말했다.
“제 동생의 몸을 내놓겠습니다.”
에덴 길드는 현재 파산 직전이었다.
그나마 헌터로서 쓸모 있던 동생은 불구가 되어 돌아와 던전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거기다 청호 길드에서 그와 동생이 함께 해 왔던 더러운 짓들을 공개하면서 돈줄도 끊어졌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복수밖에 없었다.
대가가 설령 그의 동생이라고 할지라도.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때 쿡, 하고 작게 울리던 웃음소리가 크게 퍼졌다.
[크하하하! 이거 골 때리는 놈이네!]
“…….”
[크크큭……. 사람 한 명의 목숨을 앗아 가는 대신 다른 이의 목숨을 대가로 준다라……. 좋아. 마음에 드는 거래야.]
흡족하다는 듯 웃은 상대방이 아까와는 달리 호의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자, 그럼 말해 봐. 네가 동생을 내걸면서까지 죽이고 싶은 상대가 누구지?]
그를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청호 길드장 백도하였다. 청호 길드에서 에덴 길드의 실체를 밝혀 버렸으니까.
하지만 그의 입에선 다른 이름이 흘러나왔다.
“……유이나.”
동생인 강철호가 의식이 돌아온 이후에도 쭉 증오하던, 그리고 그의 길드를 이렇게 만든 청호 길드장과 가까워 보이던 여자.
그녀의 목숨이 의뢰 대상이라면 그의 동생도 기꺼이 목숨을 바치리라.
“그 사람이 타깃입니다.”
***
“벌써 출근해도 괜찮겠어?”
“그럼. 이제 멀쩡한걸.”
이나가 걱정스러워하는 눈길로 바라보자 이한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어떻게 걱정이 안 돼? 그 난리가 났었는데. 협회에서 쉬라고 한 김에 그냥 좀 더 쉬는 건 어때?”
협회에서는 이한이 멀쩡해진 뒤에도 좀 더 쉬라고 배려해 주었다. 서준의 입김도 조금 들어간 덕이었다.
하지만 이한은 난감해하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좀 봐주라. 이젠 좀이 쑤시려고 그래.”
“어휴. 알았어. 대신 너무 무리하기 없기다?”
“당연하지.”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이나의 뺨에 가 닿았다. 무언가를 찾듯 스윽 쓸어 내는 감각에 이나가 픽 웃었다.
“상처는 없어졌으니까 오빠도 걱정하지 마.”
“응. 다행히 흉은 안 졌네.”
이한이 안도의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처음에 이한이 이나의 뺨에 난 상처를 발견했을 때는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특히 시현에게 사람 하나 똑바로 안 구하고 뭐 했냐고 일침을 놓는 장면이 아주 장관이었다.
이나가 구했다고는 할 수 없었기에 이한을 구한 건 시현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시현은 억울하다는 얼굴로 이한의 분노를 감당해야 했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분노가 올라오는지 이한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S급 헌터라는 사람이 말이야. 몬스터가 민간인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막아야지, 대체…….”
“그만해. 이시현 헌터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잖아.”
이나는 자신을 도와주러 왔던 시현에게 괜히 미안해져서 슬쩍 그의 편을 들어 주었다.
그러자 이한이 조금 충격받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사람 편을 들다니……. 이나, 너 설마…….”
“뭐라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그보다 늦겠다. 얼른 가자.”
이나가 출근하기 위해 이한의 손을 붙잡았다. 그 와중에도 이한은 ‘내 동생이 그놈 편을 들다니…….’라고 중얼거리며 이나의 손에 끌려갔다.
협회에 들어선 후 남매는 각자 자신의 부서로 향했다. 물론 이한은 올라가기 전에 이나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기억해, 이나야. 너에게 찝쩍대는 인간이 있다면 바로 나한테…….”
“됐으니까 얼른 올라가셔!”
이나가 등을 떠민 뒤에야 이한은 자신의 팀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어휴, 하고 한숨을 내쉰 이나는 지친 발걸음으로 홍보 팀 쪽으로 걸어갔다.
[거참. 오빠의 걱정이 지나치구려. 그런 인간이 있다면 우리가 먼저 해치워 줄 텐데 말이네!]
‘그러게나 말이다.’
이나가 볼트의 말에 동조하며 홍보 팀에 출근하자 모두들 인사를 건네 왔다.
“이나 씨, 왔어요?”
“안녕하세요, 이나 씨!”
“안녕하세요.”
적당히 예의 바르게 인사한 이나는 자리에 앉았다. 오늘 치 일이 이미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이나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오늘도 평화로운 하루의 시작.
……인 줄 알았다.
“저기요.”
“네, 이나 씨.”
이나는 이쪽을 힐끔거리는 시선들을 애써 무시하며 미간을 꾹 눌렀다.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건데요?”
맞은편 파티션에 기댄 채 그녀를 내려다보던 서준이 싱긋 웃었다.
“이나 씨 관찰이요?”
“와. 되게 할 짓 없으신가 보다. 본부장이라는 사람이.”
“잠깐 시간이 비었거든요.”
“시간이 비면 본부장실로 가시지, 왜 여기 있는 건데요?”
“어디에 있을지는 제 마음입니다만.”
이나가 뚱한 얼굴로 쳐다보자 서준이 웃음을 흘리며 양손을 들어 보였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마세요. 뭐 좀 물어볼 것도 있었거든요.”
“뭔데요?”
“유이한 씨 출근했다면서요? 이제 몸은 괜찮아진 거예요?”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본인한테 가서 직접 물어보면 되지.”
“유이한 씨가 절 싫어하는 것 같길래요.”
“오빠는 댁이 저한테 오는 걸 더 싫어할걸요.”
오빠가 이래서 찝쩍대는 인간이 있으면 보고하라고 한 건가.
이한의 참뜻을 이제야 이해한 이나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오빠는 괜찮아요. 근데 설마 물어보고 싶다던 게 그건 아니죠?”
“맞는데요?”
“……하아.”
이나의 한숨 소리를 들은 서준이 즐겁다는 듯 웃었다.
그러자 옆에서 뚱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볼트가 물었다.
[계약자, 해치우겠는가?]
‘가만히 있어.’
이나는 서준 몰래 손짓으로 볼트를 말렸다. 볼트는 뚱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얌전히 있었다.
조금 안도한 이나가 다시 서준을 보았다.
“제 입장을 생각해 주신다면 이만 가시죠.”
“음. 이나 씨 입장을 생각한다면 제가 여기 있는 게 더 좋은 거 아닌가요?”
“무슨 말이에요?”
싱긋 웃은 서준이 고개를 슬쩍 내렸다. 이나와 얼굴을 마주하며 그가 작게 속삭였다.
“전 헌터 협회 본부장입니다. 저와 친해진다면 이나 씨도 편할 텐데요?”
이나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서준은 여전히 미소 지은 채였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그 순간 이나가 서준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 버렸다. 그러자 주변에서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됐거든요? 전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라고요.”
“아쉽네요. 저 혼자만의 짝사랑이었군요.”
“진짜 뭐라는 거야.”
그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이나도 알고 있었다. 저건 다 연기였다.
이나가 얼른 가라는 듯 손을 훠이, 흔들자 서준이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그에게서 벨 소리가 들리더니 그가 핸드폰을 꺼냈다.
“네. 헌터 협회 본부장, 최서준입니다.”
‘얼씨구. 전화 받을 땐 멀쩡한 척하네.’
분명 자신 앞에서도 멀쩡한 척하던 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이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리카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서준을 보며 말했다.
[어? 우리 얘기 한다.]
‘뭐?’
리카의 말을 듣고 이나도 서준의 통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녀의 귀에 들어오는 내용은 없었다.
대신 서준의 목소리는 들렸다.
“그렇군요. 이렇게 찾아도 안 나오다니. 슬슬 수배령을 내리긴 해야겠군요.”
‘뭔 수배령?’
리카가 ‘우리 얘기’라고 칭할 정도면 분명 정령의 알에 관한 얘기였다.
그런데 거기다 대고 수배령에 관한 얘기를 꺼내니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이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서준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이를 눈치 못 챈 서준은 통화를 마무리했다.
“알겠습니다. 곧 갈 테니 회의 준비를 해 주십시오.”
마침내 그가 휴대폰을 집어넣자 이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수배령이라니. 무슨 일 있나 봐요?”
최대한 태연하게. 태연하게.
이나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묻자 서준도 별 이상한 낌새를 못 느끼고 대답했다.
“네. 그런 일이 좀 있었습니다. 자세히는 기밀 사항이라 말씀을 못 드리지만요.”
“그렇군요.”
태연한 목소리와 달리 이나의 속은 시끄러웠다.
‘왜 그런 게 기밀 사항인데! 나도 알려 달라고!’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순 없었기에 그저 잠자코 있었다.
그사이 서준은 일 열심히 하라는 말을 남기고 홍보 팀을 나갔다. 이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이즈와 리카에게 속삭였다.
“이즈, 리카, 쫓아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와.”
[알았어!]
[와! 염탐이다!]
두 정령은 마치 첩보원이라도 된 듯 기뻐하며 슝 날아갔다. 다른 정령들과 남은 이나는 불안한 기분에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