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149)

시현은 서준과 독대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왔다. 혼자 남게 되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수고했어요.”

그때 누군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커피를 내밀었다. 고개를 돌리자 이나가 빨대로 커피를 쪼로록 마시며 그를 보고 있었다.

시현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일단 그녀가 주는 커피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뭘요. 제 부탁을 들어줬는데 이 정도쯤이야. 본부장님한테는 제대로 설명하고 왔죠?”

“네. 이나 씨가 말한 대로, 알을 돌려주면서 범인은 던전에서 죽었다고 설명하고 오는 길입니다.”

“좋아요. 잘했어요. 이걸로 수배령은 취소가 되겠네요.”

이나가 싱긋 웃었다. 걱정이 없어 보이는 팔자 좋은 미소였다.

말이 나온 김에 시현이 얼른 불만을 토로했다.

“이나 씨를 만나고부터 스스로 만든 규칙을 하나씩 어기고 있는 기분입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이시현 헌터는 그 고지식한 면을 좀 타파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제 말은 이나 씨와 함께하면서 해선 안 되는 짓을 저지르는 기분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좀 봐줘요. 선량한 시민이 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가엾지도 않아요?”

시현의 얼굴이 찝찝하다는 듯 변했다. 결국 이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오늘 도와줬으니까 대신 부탁 하나 들어줄게요.”

“부탁 말입니까?”

“네. 나중에 제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무슨 일이 됐든 달려갈게요. 그럼 됐죠?”

사실 그런 문제가 아니었지만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이나의 능력은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으니까.

시현이 풀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나가 가 보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럼 가세요. 저도 일하러 다시 들어가 봐야 되거든요.”

“그러겠습니다. 아, 그리고.”

시현이 뭔가 더 말하려는 듯하자 이나가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린 이나에게 시현이 진지하게 말했다.

“혹시 수상한 자를 보게 된다면 저나 백도하에게 즉시 연락하십시오.”

“수상한 자요?”

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시현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그런 일이 좀 있습니다. 아무튼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수상한 자를 발견한다면 연락하십시오.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음. 알겠어요.”

이나의 대답을 듣고 난 그는 안심한 얼굴로 협회를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이나는 그가 한 말을 되새겼다.

“갑자기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면 뭐가 있긴 한 모양인데…….”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도 상관없어! 우리가 다 해치우면 되는걸!]

[옳소!]

[마, 맞아요……!]

정령들까지 그렇게 말해 주니 조금 든든하기도 했다. 적어도 무슨 일이 생기면 알 수는 있다는 말이니까.

이나는 피식 웃으며 시현이 한 말을 속에 묻어 두었다.

***

“그럼 먼저 퇴근해 보겠습니다.”

“잘 가요, 이나 씨. 부러워 죽겠네요.”

“하하.”

퇴근 시간이 되자 이나는 짐을 챙겨 협회를 나왔다. 즐거운 귀갓길이었다.

곧바로 지하철에 올라탄 이나는 정령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퇴근을 즐겼다.

[지하철이란 것은 언제 봐도 신기하군! 어떻게 인간 한 명이 이렇게 긴 열차를 조종할 수 있는 건가?]

[이나가 그랬는데, 모든 게 전기 덕분이랬어!]

[전기? 내가 바로 전기네만. 그럼 나도 조종할 수 있겠군!]

“하지 마.”

이나가 반사적으로 내뱉은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나는 부끄러워져서 괜히 핸드폰 화면을 노려보았다.

그때 다른 정령들과 마찬가지로 지하철을 누비던 리카가 돌아왔다.

[이나야, 이나야.]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이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리카를 바라보았다. ‘왜?’냐고 묻는 듯한 그 눈빛에 리카가 얼른 대답했다.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이 핸드폰으로 우리를 찍어 주고 있어!]

‘뭐?’

이나가 굳은 사이 다른 정령들이 이나의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오! 정말이군! 우리를 찍고 있네!]

[윈티, 이나 옆에 서 봐!]

[여, 여기요?]

[응! 잘 나온다!]

물론 정령들이 카메라에 담길 리는 없었다. 저 액정에 나오고 있는 얼굴은 아마도 이나뿐일 것이었다.

그 말은 즉, 저 사람은 지금 불법 촬영을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하. 이거 웃기는 놈이네.”

이나가 중얼거리는 말에 다시 시선이 집중되었다. 특히 눈앞에 있는 남자는 몸을 움찔 떨었다.

핸드폰을 살짝 내리고 쳐다봐 오는 눈을 살벌하게 마주 보며 이나가 물었다.

“어때? 예쁘게 잘 나오냐?”

“……젠장!”

욕을 내뱉은 남자가 지하철 출입문으로 달려갔다. 하필이면 다음 역에 도착해 문이 열리고 있었다.

이나도 따라 내리며 그를 쫓아갔다.

“야! 거기 서! 예쁘게 나왔으면 공유 좀 하자!”

“저거 순 또라이 아냐?”

“그러게 누가 또라이 건드리래?”

이나는 그를 쫓아가면서 윈티에게 말했다.

“윈티, 저 앞 바닥에 빙판 좀 만들어 봐.”

[네……!]

윈티가 남자 쪽을 바라보며 숨을 후우 내뱉었다. 윈티의 숨결은 그대로 얼어붙어 남자가 내딛는 바닥을 빙판으로 만들었다.

“우왁!”

빙판에 미끄러진 남자가 몸을 휘청거렸다.

못 볼 만도 했다. 애초에 이 여름에 빙판길이 존재하는 게 말이 안 되니까.

이나는 리카의 도움을 받아 속도를 빠르게 했다. 남자가 넘어지는 순간 잽싸게 목뒤를 잡아챌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역할을 누군가가 빼앗아 버렸다.

“나이스 캐치.”

“백도하 씨?”

이나는 갑자기 나타난 도하를 황당해하며 쳐다보았다.

‘나타날 거면 좀 빨리 나타나지!’

이나는 왠지 허무해져서 터덜터덜 걸어갔다. 아란에게 한쪽 팔이 물려 있는 남자가 히익, 하며 소리쳤다.

“사람 살려! 호랑이가 날 먹는다!”

“아란은 더러운 거 안 먹어.”

도하와 아란이 동시에 얼굴을 찌푸렸다. 심지어 아란은 남자를 퉤 뱉어 버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남자를 놓치지 않고 앞발로 꾸욱 눌렀다. 완벽한 제압이었다.

아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마움을 표시하는 이나에게 도하가 물었다.

“그런데 이놈은 왜 쫓고 있었던 거야?”

“저를 불법 촬영 하고 있었어요.”

“뭐? 이런……!”

도하의 입에서 온갖 상스러운 욕들이 흘러나왔다. 결국 이나가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청호 길드장이라는 사람이 사람들 보는 앞에서 무슨 욕을 하는 거예요?”

“그…… 미안.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도하는 깔끔하게 사과를 전해 왔다. 시무룩해진 도하를 보며 이나가 픽 웃었다.

“됐어요. 저를 위해서라는 거 아니까.”

“너를 위해서?”

“아니에요?”

“아니. ……맞아.”

그렇게 말하는 도하의 얼굴이 어쩐지 붉었다.

‘더워서 익어 버렸나?’

물론 이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 뒤 이나는 도하와 함께 남자를 경찰서로 끌고 갔다. 아란의 입에 물려 있는 탓에 남자는 이동하는 내내 해괴한 비명을 질러 댔다.

근처 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남자는 반쯤 기절한 상태였다. 경찰들은 도하를 알아보고 사정을 듣는 내내 두 사람을 깍듯하게 대했다.

“그럼 저놈 처벌은 잘 부탁드립니다.”

“네! 맡겨 주십시오!”

어쩐지 얼어붙은 것도 같은 경찰들의 모습에 이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도하의 재촉에 서둘러 경찰서를 나왔다.

“도하 씨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풀렸네요. 감사해요.”

“뭘. 집 가는 길이었어?”

“네.”

“그럼 태워다 줄게. 타.”

아란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낮추었다. 이나는 픽 웃으며 그의 말대로 아란 위에 올라탔다.

이나는 도하의 허리를 꼭 붙잡고 거리를 빠르게 지나며 주변 가게들을 훑어보았다. 그중에서도 횟집이 눈에 띄었다.

이나는 별생각 없이 말을 툭 내뱉었다.

“날도 더운데 물회나 한 그릇 했음 좋겠네요.”

도하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빠르게 이동하느라 바람 탓에 못 들은 모양이었다.

이나도 딱히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기에 잠자코 있었다. 그때 도하가 물었다.

“그럼 먹으러 갈래?”

“네? 지금이요?”

“응.”

잠시 고민하던 이나가 그에게 물었다.

“아는 맛집 있어요?”

***

약 두 시간 후.

이나는 아란을 타고 도하와 함께 물회 맛집에 도착했다.

그것도 속초에 있는.

“……저기요, 백도하 씨.”

“왜?”

“아무리 물회가 먹고 싶다고 했다지만 이거 하나 먹으러 서울에서 속초까지 오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뭘 모르는구만. 자고로 회는 바닷가 근처에서 먹어야 제맛이라고.”

“그건 그렇지만…….”

이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하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웃었다.

“걱정 마. 집에는 확실히 데려다줄 테니까.”

“네에, 네에.”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나는 이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바깥에 자리를 잡은 도하가 안쪽을 향해 외쳤다.

“이모! 여기 물회 두 그릇이요!”

잠시 후, 두 사람의 앞에 각각 물회가 담긴 그릇이 놓여졌다.

속초까지 왔다고 투덜거리긴 했지만 막상 눈앞에 놓인 물회를 보니 불만이 사라졌다.

회를 한 숟가락 떠 입에 가득 넣은 이나가 우물거리다가 말했다.

“하아. 맛있다.”

“그치? 여기 맛집이라니까.”

흡족하게 웃은 도하가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짐승형 몬스터의 뒷다리였다.

도하는 그것을 옆에 얌전히 엎드려 있는 아란에게 건넸다. 아란은 고기의 냄새를 킁킁 맡더니 가져가서 뜯어 먹기 시작했다.

“아란, 잘 먹네.”

“크릉!”

이나의 칭찬 아닌 칭찬에 아란이 더욱 힘차게 고기를 물어뜯었다. 도하가 그 모습을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아란 너 저런 말에 넘어가는 거야?”

“왜요? 동물들은 잘 먹고 잘 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요.”

“……가끔 보면 아란의 파트너가 나인지 너인지 헷갈린다니까.”

“파트너는 도하 씨고 저는 친구죠, 친구.”

이나가 아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지?’ 하고 묻자 아란이 그르릉거렸다. 역시 아란은 귀여운 맛이 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도하의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그에게 마주 웃어 보이다가 이나는 문득 시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수상한 자를 보면 그나 도하에게 알리라던 말을.

‘혹시 도하 씨는 뭘 좀 알고 있으려나?’

궁금한 마음에 이나는 물회를 먹고 있는 그를 불렀다.

“저기요, 도하 씨.”

“왜?”

“혹시 요즘 무슨 일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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