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는 본부장님은요?”
“내일까지 끝마쳐야 할 일이 있어서 하고 있었어요.”
“바쁘시네요. 전 자다 깬 김에 파도 소리 듣고 있었어요. 스위트룸에서 구경하는 바다라니. 언제 이런 경험을 해 보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이나는 바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정확히는 해변 근처에서 놀고 있는 정령들을 보고 있는 것이었지만 서준의 눈에는 바다를 보며 미소 짓고 있는 것으로 비쳤다.
그는 발코니 문을 닫고 이나의 옆에 섰다. 이나가 의아해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같이 바다 구경이라도 하시려고요?”
“네. 머리도 좀 식힐 겸.”
일이 많았나 보다 생각하며 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바다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오가는 대화는 딱히 없었지만 어색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조금 의아한 점이 있다면.
‘오늘은 왜 이렇게 조용하지?’
이나는 서준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녀만 보면 웃으며 놀리기 바빴던 서준이 오늘은 웬일인지 조용했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때마침 서준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요?”
“그냥, 제 옆에 있는 사람도 일 때문에 지치면 말이 없어지는구나 싶어서요.”
“음. 그건 모든 사람의 공통점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서준이 본래의 미소를 되찾고 발코니 난간에 턱을 괴며 이나를 바라보았다.
“심심하신 듯하니 뭐라도 떠들어 볼까요?”
“딱히 그런 걸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요.”
이나가 질색하는 표정을 짓자 서준이 쿡쿡 웃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서두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이나 씨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뜬금없이 무슨 말이에요? 주변에 누가 거짓말하고 있어요?”
“짐작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흠.”
그게 누굴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이나는 일단 서준의 질문에 대답해 주기로 했다. 이나는 자신의 생각을 술술 내뱉었다.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함이겠죠.”
“보호라…….”
“좋은 이유가 됐든 나쁜 이유가 됐든, 상대방을 보호하기 위함이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든. 모든 거짓말은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거짓말이 선악의 경계에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어렵군요.”
진심을 중얼거린 서준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나가 그런 그를 보며 말했다.
“이런 걸 묻는 걸 보니 상대방이 꽤 높은 사람인가 봐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본부장님 성격에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판단되면 바로 내쳤을 테니까요. 안 그런 척하지만 은근 냉정하잖아요.”
그래서 이나도 경위서를 작성한 일이 있었다. 지금은 없던 일이 되어 버렸지만.
서준의 앞에서 경위서를 써야 했던 일을 떠올린 이나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마찬가지로 그때를 떠올렸는지 서준이 낮게 웃었다.
“……그러게요. 저도 제가 왜 뜸을 들이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그렇게 말하는 서준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아 있어 이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함도 있었다.
잠시 후, 그가 중얼거렸다.
“이나 씨 말대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건 저에게 안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이나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로 서준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이나 씨.”
“네? 저요?”
당황한 이나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서준이 입을 열었다.
“각성자라는 사실을 왜 숨기고 있는 겁니까?”
이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파인이 당황한 목소리를 내었다.
[어? 이 사람이 그걸 어떻게 안 거지?]
‘그러게나 말이다.’
그녀의 속마음을 그대로 내뱉어 준 파인 덕에 이나의 혼란은 한층 더 가중되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이나를 서준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르쇠였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시치미 떼는 건가요?”
“시치미고 뭐고,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이나는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했다. 서준도 그녀가 대답해 줄 마음이 없다고 여긴 것인지 다른 말을 입에 담았다.
“이나 씨가 그랬죠.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
“그럼 이나 씨의 거짓말은 누구를 보호하기 위한 거짓말인가요?”
이나의 시선이 여전히 멀리서 밝게 빛나는 정령들을 향했다.
누구를 보호하기 위함이냐고? 당연히 그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또 그녀가 헌터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이한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어쩌면.
‘정령들을 지키기 위함도 있지.’
이 세계에 정령사라곤 그녀밖에 없었다. 그 말은 다른 이들이 정령의 알을 가지고 있어 봤자 쓸모가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쓸모가 없어진 알은 모두 폐기 처분 될지도 몰랐다. 혹은 안 좋은 실험에 쓰이게 되거나.
이나는 그런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어쩌면 지금처럼 정체불명의 알로 남아 있는 편이 알 속의 정령들에게 더 좋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침묵했다. 물론 서준은 그 침묵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나 씨.”
그가 뭐라고 더 말하려는 순간 발코니 문이 열리며 도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흐아암……. 둘이 여기서 뭐 해?”
“안 자고 계셨습니까?”
“자다 깼다. 근데 둘이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길래 이렇게 심각한 분위기야?”
동물적인 감각으로 분위기를 파악한 도하가 물었다. 서준을 향한 그의 시선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너, 유이나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서준은 입을 다물었다. 거의 확신 단계였지만 아직 대답을 못 들은 상황에서 그녀가 각성자라는 걸 밝히기도 뭐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이나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데 도하가 성큼성큼 다가와 이나의 팔을 붙잡았다.
“얜 내가 데리고 간다.”
“아직 대화가 안 끝났습니다.”
“대화고 뭐고, 얘가 이 상황을 불편해하는 거 안 보여?”
아란이 옆에서 으르렁거렸다. 서준이 멈칫하는 사이 도하가 이나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
이나는 도하에게 끌려가면서도 서준의 눈치를 보았다. 고개를 돌리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도하가 끌고 가는 탓에 그녀는 곧 시선을 거두었다.
“싫으면 싫다고 말하란 말이야. 가만히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온 도하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이나는 그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답답한지 도하가 캐물었다.
“저 녀석이 이상한 얘기 하진 않았지?”
“이상한 얘기는 아니었어요.”
이나가 발코니 쪽을 보며 중얼거리듯이 답했다.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
“으음.”
아란을 타고 달리면서도 도하의 시선은 계속 저 앞쪽을 향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엔 이나와 서준이 탄 차가 달리고 있었다.
“……분위기 되게 무겁네.”
도하는 마음 같아선 이나를 자신의 뒤에 태우고 서울로 가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서준이 끼어들었다.
“이나 씨는 제 차를 타고 갈 겁니다. 아직 끝내야 할 이야기가 남았거든요.”
도하가 반발하려고 했지만 이나가 그를 말리는 통에 그럴 수가 없었다.
“본부장님 차 타고 갈게요. 그리고 도하 씨, 조금 뒤에서 따라와 줄 수 있어요?”
“왜?”
“본부장님과 둘이서 할 얘기가 있어서요.”
도하의 치켜뜬 눈이 순간 서준을 향했다. 하지만 이어진 이나의 말에 그는 결국 수긍했다.
“부탁할게요.”
“……알았어.”
대체 그 이야기가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무도 대답을 해 주지 않을 걸 알았기에 묻지 못했다. 덕분에 도하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이나가 말한 대로 차 뒤쪽에서 따라가면서도 서준의 차 쪽으로 신경이 집중되었다.
한편 이나와 서준은 그런 도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들만의 대화로 바빴으니까.
“그래서.”
서준이 뻥 뚫린 고속 도로를 보며 이나에게 물었다.
“대답은 언제 해 줄 건가요?”
이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나는 이대로 서울에 도착하면 분명 서준이 무슨 짓을 할 거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끝장을 보려 그의 차를 타겠다고 하긴 했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니 어떻게 해야 될지 알 수 없었다.
‘이시현 헌터와 달리 이 사람은 그냥 안 넘어갈 텐데.’
고민하던 이나는 일단 시치미를 떼 보기로 했다.
“대체 왜 저를 각성자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이나의 물음에 서준은 옆에 두었던 무언가를 내밀었다. 무언가를 끼워 놓은 파일철이었다.
그것을 받아 펼쳐 본 이나는 눈을 치켜떴다.
“이건…….”
“제가 이나 씨를 각성자라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펼친 파일철에는 그녀의 사진이 꽂혀 있었다. 정확히는 지난번 시현이 이끄는 탐사대와 A급 던전에 들어갔을 때 찍힌 사진이었다.
얼굴을 가리긴 했지만 안 찍힌다고 노력했는데 어쩌다 찍힌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이나를 각성자라고 생각하는 이유들이 적혀 있었다.
슬쩍 읽어 보니 해진과 연관된 이유부터 그의 사촌 동생인 이수아를 구한 일까지 전부 적혀 있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걸린 모양이었다.
“그 사진 속 인물, 이나 씨 맞죠?”
“…….”
“아니라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때 마주친 이나 씨의 옷차림을 제가 기억하니까요.”
이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운전에 집중하느라 서준은 보지 못했지만 그녀가 정곡을 찔렸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혹시 속초에 온 이유가…….”
“네. 혹시 그때의 일도 이나 씨가 연관된 건가 싶어서 복기차 와 봤습니다.”
“하아.”
이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체념했다는 것을 눈치챈 서준이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설명해 보시죠.”
서준이 이나를 힐끗 보았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