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되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보시다시피 전 각성했고, 정체를 숨기고 있을 뿐이에요.”
이미 체념한 듯 덤덤한 목소리였다. 이나가 대답해 줄 마음이 생긴 김에 서준은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대체 언제 각성한 건가요?”
“음. 본부장님을 만나기 전부터요?”
“역시. 이나 씨를 만난 그날 건물을 건너가는 사람을 본 것 같다 싶었는데 제가 잘못 본 게 아니었군요.”
“……그걸 봤을 줄은 몰랐네요.”
“각성한 사실은 왜 숨긴 겁니까?”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각성자라는 게 밝혀지면 평범한 생활과는 거리가 멀어질 테니까요.”
“평범한 생활과 거리가 멀어진다라. 그 말은 등급이 높다는 뜻이군요.”
“하여간에 눈치도 빠르셔.”
이나가 작게 투덜거리자 서준이 픽 웃었다. 하지만 다시 진지하게 물어 왔다.
“이 일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됩니까? 천조 길드장은 알고 있는 것 같던데요. 아, 그리고 천해진 헌터도요.”
“맞아요. 이시현 헌터와 천해진 씨, 그리고 천해진 씨의 식솔들뿐이에요.”
“생각보다 많이 아는군요. 평범하게 살고 싶은 것 맞습니까?”
“저라고 뭐 그러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아요?”
서준이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정작 그러고 싶은 건 그녀건만.
이나가 뚱한 얼굴로 창틀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머릿속에 이나의 정보를 기록하던 서준이 다시 물었다.
“혹시 특성이 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건 직접 보는 게 빠를 것 같은데.”
“네?”
서준이 의아해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때 그의 앞에 이즈가 실체화하여 모습을 드러냈다.
[짠!]
“……!”
부우우웅-
서준이 순간적으로 액셀을 세게 밟아 차 속도가 빨라졌다. 금방 정신을 차린 그가 다시 속도를 낮추었지만 주변에 차가 있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이나는 엄한 얼굴로 서준의 앞에서 알짱거리는 이즈에게 말했다.
“운전하는 사람 놀래면 안 돼. 사고 난다고.”
[이나 사고 나면 안 돼!]
이즈가 날아와 이나의 뺨에 찰싹 달라붙었다. 서준이 잔뜩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거렸다.
“대, 대체 그게 뭡니까? 이나 씨의 능력인가요?”
“비슷해요. 이 친구들의 능력을 제가 빌려 쓰는 거거든요. 얘네들은 정령이에요.”
“얘네들……? 정령?”
서준이 의아해하며 묻는 말에 다른 정령들도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안녕하세요……!]
[…….]
서준은 넋을 놓은 얼굴로 고속 도로와 정령들을 번갈아 보았다. 그 와중에 운전에 집중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꽤 재밌었다.
이나는 처음 보는 그의 넋 놓은 얼굴을 감상하며 정령들을 소개해 주었다.
“얘는 물의 정령 이즈예요. 이 중에서 가장 먼저 깨어난 정령이죠. 두 번째로 깨어난 애가 여기 새 모습을 한 바람의 정령 리카. 그리고 세 번째는…….”
“잠시만요, 이나 씨. 지금 저에겐 이 정령들의 정체가 중요합니다. 대체 정령이란 게 뭡니까? 보아하니 능력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인 것 같은데요.”
“맞아요. 정령들은 살아 있어요.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고, 말을 하고, 또 움직일 수 있죠.”
정령들에 파묻혀 설명하는 이나의 모습은 서준의 눈에 무척이나 신비롭게 비쳤다. 하지만 그는 일단 그녀의 말에 집중하려 애썼다.
그것을 느낀 이나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정령은 자연의 존재예요. 정확히는 자연 그 자체죠. 정령들은 자연의 능력을 쓸 수 있고, 저 같은 정령사는 정령들의 힘을 빌려 능력을 쓸 수 있어요.”
“정령사……. 그게 이나 씨의 특성이군요.”
“역시 눈치가 빠르셔.”
“물의 정령, 바람의 정령이라고 칭한 걸 보면 정령은 한 속성밖에 지니지 못하는 건가요?”
“음. 보통은 그렇죠.”
“보통은?”
“가끔 여러 속성을 지닌 정령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건 저도 자주 보진 못해서요.”
“봤다고요……?”
“아.”
무심코 말을 꺼낸 이나는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실수로 전생의 기억을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하지만 서준은 그에 대해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스킬 내용인가 보군요.”
“……그런 셈이죠.”
다행히 서준은 혼자 오해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이나는 몰래 안도했다.
그사이 정령들을 힐끗 본 서준이 다른 질문을 건넸다.
“정령은…… 어디서 나타난 존재입니까?”
[우린 알에 있었는데 이나가 깨워 줬어!]
“알?”
이즈의 말에 서준이 무언가를 눈치챈 듯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정체불명의 알이……?”
“맞아요. 그게 정령의 알이에요.”
“……연구원들이 알게 되면 난리가 나겠군요.”
서준이 쓰게 웃으며 질문을 이었다.
“그럼 알을 훔친 것도 이나 씨입니까?”
“절대 아니에요. 어쩌다 알을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제 특성으로 인해 이즈가 부화했을 뿐이에요. ……물론 그 후에 얘네들이 알을 훔쳐오긴 했지만, 부화한 알 빼곤 돌려놨잖아요?”
“이시현 헌터가 가져온 것이 그거군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서준이 입을 열었다.
“이제 알겠습니다. 이나 씨가 왜 정체를 숨기려 했는지. 이나 씨의 특성이 알려지면 전 세계적으로 소란스러워지겠죠.”
“그렇겠죠.”
이나가 짧게 동조했다. 그리고 서준이 자신의 상황을 알아준 김에 얼른 말했다.
“전 세계가 소란스러워지는 것은 물론, 저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기도 하겠죠. 세계 유일의 정령사니까요.”
“그렇겠군요.”
“난 그게 싫어요. 내 소원은 그냥 한국의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거라고요.”
이번에는 서준이 동조해 주지 않았다. 그는 그저 말없이 정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조금 초조해진 이나가 이어서 말했다.
“어제 저한테 물어보셨죠. 제 거짓말은 누구를 보호하기 위함이냐고요. 전 저를 지키고 싶고, 또 제가 위험한 일에 연루되지 않길 바라는 제 오빠를 지키고 싶어요. 정령들도, 지금의 이 평범한 생활도 지키고 싶고요.”
그에게 처음으로 전하는 진심이었다. 그녀의 간절함을 느낀 서준이 복잡한 눈빛을 띠었다.
이나가 그런 그에게 쐐기를 박았다.
“헌터 협회 본부장님이라 갈등되시겠지만, 부탁이에요. 제 정체를 숨겨 주세요.”
[부탁할게!]
[계약자를 귀찮게 하지 말아 주게!]
이나의 마음을 아는 정령들도 간절한 눈빛으로 서준을 보았다. 그는 한참 고민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는…….”
쾅!
그때 밖에서 굉음이 들렸다.
이나는 급히 정면을 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쭉 뻗어 있던 평평한 고속 도로가 지금은 중간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 있었다.
그 크기는 꽤 컸다. 서준의 차를 단숨에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로.
“이런……!”
끼이이익!
서준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차는 이미 싱크홀 속으로 빠지기 직전이었다.
이나는 급정지로 인해 몸이 앞으로 쏠리는 와중에도 서준에게 외쳤다.
“이러다 빠지겠어요! 옆으로 돌려요!”
그 말을 듣고 서준이 핸들을 옆으로 돌렸다. 아슬아슬하게 싱크홀에 빠지기 직전에 차가 옆으로 돌아섰다.
차가 완전히 멈춰 서자 서준은 힐끔 바깥을 보았다. 운전석 쪽 바로 앞 도로가 뻥 뚫려 있었다.
바퀴도 아슬아슬하게 절벽 끝에 걸쳐 있자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십년감수했군요.”
“아직 아니에요. 얼른 나가요.”
이나가 서둘러 안전벨트를 풀고 조심스럽게 차 문을 열었다. 이나가 그대로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덜컹-
“이런……!”
[이나야!]
이나가 미처 차에서 나오기도 전에 차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절벽 끝 땅이 바스러졌다.
차는 구멍을 향해 서서히 기울어졌지만 이나는 리카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문제는.
“본부장님!”
바로 옆이 싱크홀이라 운전석에서 미처 나오지 못한 서준이 떨어지는 차 안에서 놀란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리카! 어서 본부장님을……!”
[이나야! 저기!]
이즈의 손가락질에 리카에게 명령하려던 이나가 반사적으로 그곳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게이트?”
이나는 눈을 부릅떴다. 푸른빛으로 빛나는 게이트가 싱크홀 안에 있었다.
그것도 서준이 떨어져 내리는 곳 아래에.
“젠장!”
이제 보니 추락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을 느낀 이나는 서둘러 싱크홀 안으로 뛰어내렸다.
“본부장님!”
리카의 힘을 이용해 이나는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하지만 이미 서준은 푸른빛에 감싸이고 있었다.
번쩍-
제물을 삼킨 게이트는 만족스럽게 빛을 발했다.
***
“둘이서 할 얘기가 대체 뭐길래.”
저 앞에서 달려가는 고급차를 보며 도하가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말을 들은 아란이 불만스럽다는 듯 울었다.
“크릉.”
“아니, 나도 그러고 싶진 않았지. 그런데 부탁한다고까지 말하는데 어떻게 거절하냐?”
“크르릉.”
“그냥 버티지 그랬냐고? 하지만 그건…….”
“크릉!”
“뭐? 바보? 아란 너 지금 말 다 했냐?”
두 파트너는 투닥거리며 차를 뒤쫓았다. 그때 아란이 갑자기 멈추더니 어딘가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크르르…….”
“뭐야, 아란. 왜 그래?”
의아해하는 얼굴을 하던 도하의 표정이 갑자기 뒤바뀌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아란이 보고 있는 곳을 향했다.
“누가 있구나.”
도하는 몸을 살짝 숙여 아란에게 낮게 속삭였다.
“가 보자.”
“크릉!”
아란이 빠른 속도로 고속 도로 옆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 와중에 도하는 인벤토리에서 그의 무기인 언월도를 꺼냈다.
그리고 고속 도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도달했을 때.
촤악-
아란의 등에서 뛰어내린 도하가 망설임 없이 언월도를 휘둘렀다.
“어이쿠.”
하지만 그 날에 베인 것은 옷깃뿐이었다. 상대방은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다.
도하는 제게서 멀리 떨어진 ‘적’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너 뭐야? 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지?”
“이거 거물이 납시었군.”
적이 씨익 웃었다. 웬 로브를 뒤집어쓴 탓에 얼굴이 반쯤 가려졌지만 기분 나쁜 미소만은 잘 보였다.
도하는 얼굴을 구기며 그를 향해 외쳤다.
“묻는 말에 답해. 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냐니까!”
“너무 그러지 말라고. 나도 명령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니까.”
“명령? 무슨 명령?”
“답하기 곤란한데.”
“그래?”
도하의 날 끝이 적에게로 향했다.
“그럼 불게 해 주마.”
그를 보는 눈빛에 더 이상 자비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