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149)

탓-

앞으로 튀어 나간 도하가 망설임 없이 무기를 크게 휘둘렀다. 적은 그 짧은 틈에 인벤토리에서 팔뚝만 한 길이의 두 검을 꺼내 양손에 쥐었다.

챙-

X 자로 교차시킨 두 짧은 검이 도하의 언월도를 간신히 막아 냈다. 하지만 그 힘까지 막아 내진 못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어쭈. 막아?”

도하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며 두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너 좀 하는구나?”

그사이 도하의 언월도를 쳐 낸 적이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국의 청호 길드장은 무식하게 힘만 세다더니. 그 말이 진짜였군.”

“뭐? 무식? 어느 놈이 그래?”

발끈한 도하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하지만 적의 시선은 그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목격자는 모두 제거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내 등급이 낮으니…….”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제대로 크게 말해.”

“아쉽지만 이번엔 저 둘만 제거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군.”

“뭐?”

도하가 눈을 치켜떴다. 적은 말없이 웃으며 턱 끝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엔 이나와 서준이 탄 차가 달리고 있었다.

“너, 무슨 짓을……!”

도하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때마침 커다란 굉음이 공간을 울린 탓이었다.

쾅!

멀리 떨어져 있는 도하도 느낄 정도로 커다란 진동이었다. 도하가 고개를 돌려 보자 서준의 차가 폭발로 인해 생긴 구멍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도하가 아란의 위에 올라타며 외쳤다.

“젠장! 너 목소리 기억했다!”

그 말을 남기고 도하는 아란과 함께 다시 고속 도로를 향해 내려갔다.

적은 놓치게 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저기 있었으니까.

“아란! 더 빨리!”

“크르르!”

아란도 이미 최고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도하는 오늘따라 그 속도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산에서 내려왔을 때, 도하는 절벽 아래로 미끄러지고 있는 차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이나도.

“야! 유이나! 뒤로 물러서!”

도하가 크게 외쳤지만 이미 이나는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 뒤였다. 경악한 도하가 서둘러 그곳으로 달려갔다.

“유이나!”

번쩍-

그때 거대한 구멍 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눈을 질끈 감았던 도하는 빛이 사그라들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게이트?”

구멍 안의 게이트를 발견한 도하의 눈빛이 멍해졌다. 게이트가 있는 것은 별로 문제가 아니었다.

게이트가 닫혀있었다. 그리고 구멍 안으로 떨어진 이나와 서준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

“으윽…….”

서준의 눈꺼풀이 올라가며 흐릿한 빛의 검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멍하니 앉아 있던 그는 곧 정신을 잃기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갑자기 생긴 싱크홀, 떨어지는 곳에 있던 던전 게이트, 그리고 그를 향해 손을 뻗던 이나.

하지만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보니 던전에 들어온 것은 그 하나뿐인 모양이었다.

서준은 자신의 몸을 더듬거리며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다친 곳은…… 없는 건가.”

전혀 다행이 아니었다. 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그에게 지금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여기가 던전…….”

사실 그냥 보기엔 차와 함께 숲속에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여 여기가 던전인지 어디 숲속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커다란 새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푸드득-

한 새가 서준의 차 앞에 내려앉았다. 앞 유리를 통해 새와 눈을 마주한 서준의 얼굴이 굳었다.

새는 평범한 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딱 목 밑에까지만.

목 위에는 헝클어진 머리의 여자 얼굴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완전한 사람의 얼굴도 아닌 것이, 입이 있어야 할 곳에는 새의 부리가 위치해 있었다.

인간과 닮았지만 인간이 아니다. 그 사실이 서준에게 기묘한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어떡하지.’

지금 이곳엔 그뿐이었다.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렇지만 평범한 일반인인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도망치는 것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아마 차 밖으로 나가자마자 저 몬스터에게 당할 것 같았다.

서준은 몸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끼며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에겐 호신용 총이 하나 있었다. 혹시라도 던전에 휘말릴 때를 대비해 지니고 있던 마도구였다.

쓸 수 있는 탄알은 세 개. 이 세 발 안에 숲속으로 몸을 피해 다른 헌터가 올 때까지 숨어 있어야 했다.

몬스터의 부리가 유리, 정확히는 서준의 심장을 노리고 쪼아 왔다. 서준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올려 첫 번째 탄알을 사용했다.

탕!

“끼에엑!”

마정석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탄알이 차 유리를 뚫고 몬스터의 눈에 명중했다.

몬스터가 주춤하는 사이 서준은 얼른 차 문을 열고 숲을 향해 뛰어갔다.

그때 위쪽에서 푸드덕하는 소리가 들려 서준은 총을 든 손을 위로 향했다. 그리고 또 한 번 탕, 하는 소리가 울렸다.

‘남은 건 한 발.’

하지만 그는 뜀박질을 멈추어야 했다. 그가 뛰어가는 방향에 몬스터가 내려앉은 탓이었다.

게다가 위쪽에서도 푸드덕, 하며 몬스터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서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기서 죽는 건가.”

간혹 목숨이 위태로워졌을 때 기적적으로 각성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지만, 그에게 그런 기적은 찾아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가 중얼거리는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인지 인간을 닮은 몬스터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그리고 몬스터가 서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서준은 저도 모르게 팔을 들어 올려 눈앞을 막았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최후의 반항은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반항하는 마음이 하늘에 닿기라도 한 것인지.

푸욱-

무언가를 꿰뚫는 소리와 함께 몬스터가 저 멀리 날아갔다.

서준은 팔을 든 자세 그대로 눈만 데굴 굴려 날아간 몬스터를 쳐다보았다. 새 몬스터의 몸통에 얼음으로 된 창이 꽂혀 있었다.

상황 파악을 위해 머리를 굴리는 그의 귀에 들려선 안 될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괜찮아요?”

서준은 팔을 내렸다. 서둘러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이나가 서둘러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나 씨……?”

“다행히 무사한가 보네요.”

그렇게 말하는 이나의 모습에서 긴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짜증 난 얼굴로 경련을 일으키는 몬스터를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그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달려들 줄은 몰랐네.”

그 모습을 보자 서준은 여러 감정이 목 끝까지 가득 차올랐다.

그 혼자가 아니라는 기쁨, 그런 자신에 대한 혐오, 그래도 와 줘서 다행이라는 안도.

정말 여러 감정이 올라왔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이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밖에 없었다.

“이나 씨.”

겨우 이나의 이름을 내뱉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를 보며 이나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왜요? 감동이라도 먹으셨나?”

“……아니라곤 못 하겠군요.”

픽 웃은 그는 그제야 제 감정들을 갈무리할 수 있었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잔소리하듯이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도 무모했어요.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이렇게 함부로 들어옵니까?”

“목숨을 구해 준 사람한테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요?”

“그…….”

당황한 서준이 입을 달싹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고맙습니다.”

“알면 됐어요.”

이나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서준은 묘한 기분이 들어 이나가 건드린 어깨를 괜히 문질렀다.

그사이 이나는 몬스터가 날아다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일단 숲속으로 들어가요. 여기 있다간 차에 빛이 반사돼서 몬스터들이 더 날아올지도 몰라요.”

“네. 그러는 게 나을 것 같군요.”

다시 얼굴이 굳은 서준이 이나를 따라갔다. 그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나의 곁에 딱 붙은 채였다.

그 모습을 본 정령들이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본부장님 많이 무서웠나 봐.]

[인간은 정말 나약하군!]

[그, 그런 말은 하면 안 돼요, 볼트……!]

실체화를 한 덕에 그 소리들은 서준의 귀에 고스란히 들렸다.

서준의 입가에 민망함이 섞인 미소가 감돌았지만 이나는 신경 쓰지 않고 서준에게 현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먼저, 이 던전엔 몬스터가 꽤 많아요. 하늘엔 인간 얼굴을 한 새 모습의 몬스터들이 쫙 깔려 있고, 저희가 있는 이 숲에는 짐승형 몬스터들이 포진해 있고요.”

“진퇴양난이군요.”

“네. 물론 저희는 나아갈 수밖에 없지만요.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저 새 모습의 몬스터들이 숲에 있는 짐승형 몬스터들을 먹이로 잡아간다는 거예요.”

“그 말은, 숲에 있는 몬스터는 하늘에 있는 몬스터보다는 약하다는 말이군요.”

“그렇죠.”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서준이 입을 열었다.

“그럼 가능한 한 숲을 통해서 다녀야겠군요.”

“그럼 좋겠지만…….”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

“저거 보여요?”

이나는 대답 대신 멀리 떨어져 있는 바위산을 가리켰다. 새하얀 바위산은 하늘을 뚫을 듯이 높았다.

척 봐도 수상해 보이는 곳이었기에 서준의 눈꼬리가 치켜져 올라갔다.

“설마 저곳에 뭔가 있는 겁니까?”

“아직 예상이긴 하지만, 제 생각엔 저곳에 공략 루트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리카에게 가서 확인해 보라고 했…….”

[이나야!]

“마침 오네요.”

이나는 고개를 들어 멀리서 날아오는 리카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다가온 리카가 투명화를 풀었다.

이나는 기다릴 것 없이 바로 물었다.

“어때? 뭐가 있어?”

[응! 바위산 꼭대기에 엄청 커다란 둥지가 있어!]

“둥지?”

[응응! 우리 집보다 큰 둥지였어! 안에는 커다란 알들이 있었고! 근데 몬스터는 안 보였어.]

“자꾸 공간 비교를 우리 집으로 할래?”

울컥한 이나가 눈을 날카롭게 치뜨다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둥지가 있다는 걸 보면 저기에 보스 몬스터가 있는 모양이네요.”

“그럼 저 바위산을 올라야 한다는 말이군요.”

서준의 고운 미간이 찡그려졌다.

“큰일이네요. 바위산을 오르게 되면 새 몬스터들이 달려들 텐데.”

“별수 있나요. 이곳을 나가려면 가야죠.”

어깨를 으쓱한 이나가 걸음을 옮겼다. 서준이 그녀의 뒷모습을 묘하게 보다가 따라가며 물었다.

“이나 씨는 무섭지 않습니까?”

“음. 딱히? 이미 여러 번 겪어 봐서요.”

“던전을 꽤 많이 들락거렸나 보군요.”

서준의 눈이 가늘어지자 이나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 덕에 본부장님의 목숨을 구한 거니까 쌤쌤으로 치죠.”

“보고요.”

“……확 몬스터 먹이로 던져 버릴라.”

“그럴 거였으면 이렇게 저를 구하러 오지도 않았겠죠.”

서준이 픽 웃으며 말하자 이나의 표정이 뾰로통해졌다. 정령들이 그 모습을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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