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가 무척이나 넓었기에 바위산으로 향하는 데만 시간이 꽤 소요되었다. 게다가 새 몬스터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일부러 나무가 빽빽한 곳으로만 다녀서 체력은 더 심하게 소모되었다.
물론 숲속에 사는 몬스터들이 가끔 달려들긴 했지만 문제는 없었다.
촤악-
“크아아앙!”
푸욱-
“깨갱!”
이나와 정령들의 활약으로 서준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는 몬스터들의 몸에서 익숙하게 마정석을 꺼내는 이나를 기묘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대체 등급이 뭐지?’
물론 그는 던전은 이번이 처음이고 헌터들의 능력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보기에도 이나의 실력은 월등했다.
서준은 정령이 가져오는 마정석을 받아 드는 이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나 씨, 대체 등급이 뭡니까?”
“노코멘트.”
이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그냥 넘어갈 서준이 아니었다.
“그 마정석, 어림잡아 B급은 되어 보이는군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마정석은 등급이 높을수록 색이 진하지 않습니까. 저도 이쪽 일을 하는 사람이니 그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서준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실제로 마정석의 등급은 B급이었기에 이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이나를 서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숲속 짐승형 몬스터들은 B급, 하늘의 몬스터들은 그보다 강하다고 했으니 최소 A급은 되겠군요. 그럼 그 두 몬스터들을 쉽게 처리한 이나 씨도 최소 A급은 되나요?”
이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바위산 쪽을 향해 걸어갔다. 서준도 더 말을 꺼내지 않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어쩔 땐 침묵이 긍정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렇게 걷다 보니 두 사람은 숲이 조금 어둑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서준이었다.
“숲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군요. 완전히 어두워지면 몬스터에 대비하기 어려울지도 모르니 슬슬 쉴 곳을 마련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나도 동의하는 바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밤을 보낼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얕은 낭떠러지가 이나의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좋겠네요.”
“네? 여기요? 여긴 아무것도 없잖습니까.”
“없으면 만들면 되죠. 네움.”
이나의 부름에 땅의 정령 네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나는 네움에게 명령했다.
“여기에 굴 좀 만들어 줘. 두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로. 그렇게 클 필요는 없어.”
고개를 끄덕인 네움이 이나가 가리킨 벽으로 쑥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흙이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며 그곳에 굴이 생겼다. 정확히 두 사람이 딱 들어갈 정도의 크기로.
네움도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이나가 씩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
네움은 쑥스러운지 쓰고 있던 모자를 푹 눌러썼다. 다른 정령들이 그런 네움을 놀리기 시작했다.
[네움 부끄러워한다!]
[귀여워!]
정령들의 놀림이 이어질수록 네움은 땅속으로 사라질 듯했다. 결국 이나가 나서서 말린 뒤에야 조용해졌다.
한편 서준은 눈앞에 생긴 굴을 보며 감탄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령은 정말 편한 존재군요.”
“뭐, 그렇죠. 그보다 이제 들어가서 쉬죠. 피곤해 죽겠네.”
이나가 먼저 굴 안에 들어가 털썩 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준이 겉옷을 벗어 그녀의 앞에 깔아 주었다.
이나가 의아해하는 얼굴로 물었다.
“그걸 왜 바닥에 깔아요?”
“이나 씨 깔고 누우라고요.”
“본부장님은요?”
“이래 봬도 몸은 튼튼한 편이라 괜찮습니다.”
서준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나는 서준이 깔아 준 겉옷을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이거 비싼 거 아니죠?”
“던전에서 비싸고 안 비싸고가 뭐가 중요합니까. 당장 목숨이 위험한데.”
“하긴 그것도 그러네요. 그럼 잘 쓸게요.”
이나가 그 위에 몸을 웅크리며 옆으로 누웠다. 그러면서 서준을 보며 말했다.
“본부장님도 좀 자 둬요. 날이 밝으면 또 한참 이동해야 하니까.”
그녀의 말대로 바위산으로 가려면 좀 더 이동해야 했다.
하지만 서준은 쉽게 눕지 못했다.
“그래도 누군가 한 명은 불침번을 서야 하지 않을까요?”
“뭐야. 그게 걱정이었어요?”
이나가 픽 웃으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굴 한편에서 놀고 있는 정령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주변에 몬스터가 오면 해치우거나 날 깨워. 알았지?”
[알았어!]
[맡겨 두시게!]
정령들이 굴 입구에 일자로 포진한 채 바깥을 응시했다. 작고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그 누구도 굴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서준은 그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픽 웃음을 흘렸다.
“다시 생각하는 거지만 정령은 정말 편하군요.”
“그쵸? 그러니까 얼른 누워서 주무세요.”
고개를 끄덕인 서준이 머뭇거리다 땅바닥에 누웠다. 이나와 마주 보는 자세였지만 그녀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이나 씨도요.”
잠시 시간이 흐르자 새근새근 소리가 굴 안을 울렸다. 이나가 내는 숨소리였다.
두 사람 중간엔 불의 정령 파인이 있어 그렇게 서늘하진 않았다. 하지만.
“…….”
서준은 어쩐지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잠자리가 불편하긴 했지만 그런 문제는 아니었다. 목숨을 위협받는 이 상황이 긴장되기도 했지만 그런 문제도 아니었다.
그냥, 어떤 이유에선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결국 서준은 한참을 뒤척이다 몸을 일으켰다. 굴 앞에서 정령들과 노닥거리던 이즈가 그를 발견하고 날아왔다.
[본부장님, 안 자?]
“자야 되는데 잠이 안 오는군요.”
[안 자면 이나가 잔소리할 텐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즈가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었다. 마주 미소를 짓던 서준이 이즈에게 물었다.
“이즈, 라고 했던가요?”
[응! 맞아!]
“잠시 제 말동무가 되어 줄래요?”
[좋아!]
서준은 이즈를 통해 이나의 능력에 대한 정보를 캐낼까 싶었다.
하지만 고민하던 그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엉뚱한 것이었다.
“이즈와 다른 정령들은 이나 씨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 같던데, 맞나요?”
[응! 우린 이나가 엄청 좋아!]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야 이나는 유일하니까!]
“유일하다는 건,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즈와 다른 정령들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서?”
[응!]
무언가를 고심하던 서준은 이어서 질문을 꺼냈다.
“그럼 만약에…… 이나 씨가 아닌 다른 정령사가 나타난다면요? 그때도 이나 씨만 따를 겁니까?”
[어……. 어려운 질문이네.]
이즈가 일생일대의 고민이라도 만난 것처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답은 빨리 나왔다.
[하지만 그래도 이나가 좋아!]
“이유는요?”
[그야 이나는 이나인걸!]
무슨 뜻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서준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대화를 듣고 다가온 정령들이 말했다.
[맞네! 계약자는 계약자지!]
[재밌고!]
[다정하고……!]
[무엇보다 우리를 좋아해 주는걸!]
[물론 전에는 싫다고 했지만, 그래도 결국엔 우릴 찾아 줬어!]
[우린 그런 이나가 정말정말 좋아!]
정령들이 한마디씩 말을 보태며 꺄르륵 웃었다. 서준은 정령들에게 둘러싸인 채 곤히 자고 있는 이나를 힐끔 보았다.
“……그러네요. 이나 씨는 이나 씨니까요.”
서준이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런 서준에게 이즈가 물었다.
[그러는 본부장님은 이나가 왜 좋아?]
“네?”
고개를 내리니 정령들이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본부장님도 우리 계약자가 좋지 않은가!]
“아니, 그…….”
[설마 이나가 싫은 거야?]
“그건 아니지만…….”
[우리도 대답해 줬으니까 본부장님도 대답해 줘!]
서준은 진땀을 뻘뻘 흘리다 억지로 입을 열었다.
“이나 씨는 그러니까…… 그렇게 좋은 성격은 아니지만, 그것이 매력이고…….”
정령들은 그의 대답을 경청하며 공감하는 부분엔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서준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 이나를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
“다 왔네요.”
이나는 한숨을 살짝 내쉬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새하얀 바위산이 눈앞에 높이 솟아오른 채였다.
드디어 던전을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는 곳에 도착한 것이었다.
바위산 꼭대기를 향하던 이나의 눈이 이번엔 땅 위를 향했다. 그곳에선 하늘에 포진해 있던 새 몬스터들과 같은 놈들이 날개깃을 고르고 있었다.
여간 귀찮은 놈들이 아니었기에 이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골치 아프네요. 저걸 다 뚫고 몰래 올라갈 수도 없고.”
“그러네요.”
조금 힘없는 목소리에 이나가 고개를 돌렸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이나는 어쩐지 서준이 힘이 없다고 느꼈다.
결국 이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잔소리를 했다.
“그러게 내가 어제 주무시라고 그랬죠? 안 자고 깨 있더니.”
“그건 제 잘못이 아니라…….”
“그럼 누구 잘못인데요?”
“……제 잘못이 맞습니다.”
서준이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그러면서 원망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보는 모습에 이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이제 어쩔 겁니까? 이대론 둥지로 올라가기도 전에 저놈들의 습격을 받을 것 같습니다만.”
서준이 원래 주제로 돌아왔다. 다시 진지한 얼굴이 된 이나가 턱을 문질렀다.
“그래서 지금 고민하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내 벼락으로 다 떨어뜨리는 건 어떤가!]
볼트가 끼어들었다. 서준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박했다.
“그건 너무 무모합니다.”
“아니야.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요?”
“네?”
이나가 크게 뜬 눈으로 저를 응시하는 서준을 보며 씨익 웃었다.
“다 떨어뜨려 버리죠, 저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