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에는 이나 혼자 덩그러니 있었다. 그를 등지고 있던 이나가 서서히 몸을 돌렸다.
“일은 곧 생긴다라…….”
드디어 그를 마주하게 된 이나가 서늘한 미소를 띠었다.
“그럴 것 같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보고 그림자가 멈칫했다. 동시에 그에게 강렬한 직감이 내리꽂혔다.
“……역시 함정이었나.”
“이제 알았다니 유감이야.”
촤악-
그녀의 뒤로 보이는 창밖에 푸른빛의 벽이 생겼다. 결계였다.
이나는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눈치채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 저거? 널 놓치지 않기 위해 특별히 부탁한 거야.”
“각성한 건 네 쪽인가.”
이나는 그 질문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림자는 코웃음 치며 두 개의 단검을 들어 올렸다.
“아무리 S급이라도 넌 경험 없는 반푼이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나는 몬스터는 물론 여러 헌터들까지 상대해 봤지.”
그림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궁금하군. 실력이 이길지, 경험이 이길지.”
“누가 나 혼자 싸운대?”
“뭐?”
이나의 말에 그림자가 눈을 치켜떴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급히 몸을 틀자 아까 그의 검에 베였던 남자가 목 스트레칭을 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연기는 안 해도 되는 겁니까?”
“네.”
이나의 대답에 남자는 옷의 단추 하나를 뜯어서 내던졌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바뀌었다.
그림자는 더욱 경계 태세를 취하며 중얼거렸다.
“천조 길드장…….”
“드디어 만나는군.”
시현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림자는 경계 태세를 취하며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여태 변장하고 있었던 건가?”
“그래. 널 잡기 위해.”
대답은 뒤쪽에서 들려왔다. 그림자가 고개를 홱 돌려 보자 도하와 아란이 그곳에 있었다.
길이란 길은 모조리 막혀 버렸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그림자는 그 어느 때보다 벼려진 눈빛으로 주변을 훑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의 생각을 눈치챈 이나가 비웃음을 흘렸다.
“그만둬. 넌 도망칠 수 없어.”
“도망칠 생각은 없다.”
그때 그림자가 이나가 있는 방 쪽으로 튀어 들어갔다. 지켜보고 있던 시현과 도하가 그의 등 뒤를 노렸다.
하지만 그림자의 검 끝도 동시에 이나를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넌 나와 함께 가야겠다!”
그녀가 지니고 있는 무기는 없었다. 그 말은 즉, 근접전에 특화된 헌터는 아니라는 뜻.
중거리 혹은 원거리형 스킬을 지닌 헌터라면 그의 공격을 막기 쉽지 않을 터였다.
그것도 경험 없이 등급만 높은 애송이라면 더더욱.
그림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비록 자신은 잡히겠지만 의뢰는 완료였다. 그리고 의뢰비를 받지 못한 그의 보스가 그를 찾으러 올 터였다.
빠져나가는 건 그때 하면 된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웃어?’
이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올라왔다.
그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쾅!
“컥!”
갑자기 바닥에서 흙이 올라오더니 그를 천장에 꽂아 버렸다. 그 와중에 힘을 과하게 준 탓인지 그가 천장을 뚫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나는 뻥 뚫린 천장을 올려다보며 짧게 말했다.
“벼락.”
[맡겨 두시게!]
콰광!
마른하늘에 벼락이 내리치며 그림자의 몸을 관통했다. 기절이라도 한 것인지 그림자의 몸이 추욱 늘어지더니 다시 그녀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털썩-
안 그래도 까맣던 옷이 그야말로 새까맣게 타 버렸다. 시현과 도하가 침음을 삼키고 기절한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죽은 겁니까?”
“죽진 않았을 거예요. 나름 힘 조절은 했으니까.”
이나는 그림자의 앞으로 가 발끝으로 그를 툭 건드렸다.
“실력이 이길지 경험이 이길지 궁금하다고?”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난 둘 다 있어, 멍청아.”
이나가 발밑의 그림자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시현은 그녀의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단 이자를 헌터 전용 교도소로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렇게 해요.”
그제야 이나는 그림자에게 올렸던 발을 내렸다. 시현이 포박 아이템을 써서 그림자를 데리고 나갔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도하가 이나에게 다가와 눈을 빛냈다.
“와씨. 너 엄청 강하잖아? 다음에 나랑 한번 싸워 주면 안 돼?”
“됐거든요?”
이나는 벌써부터 질린다는 눈빛으로 도하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도하가 보채기 시작했다.
이나는 애써 그를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 무언가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나가 그곳으로 가서 그것을 주워 들자 도하가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거 아까 그놈 무기 아냐?”
“네. 이것도 챙겨야겠네요.”
이나는 그것을 무심코 인벤토리에 넣으려다 단검 날에 새겨져 있는 글자를 발견했다.
“K……?”
글자는 알파벳 K였다.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생각에 잠긴 이나의 미간이 좁아지는 사이 도하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슬슬 나오라는데?”
“아, 네.”
이나는 서둘러 단검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이것에 관해서는 시현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
그림자는 무사히 헌터 전용 교도소에 들어갔다. 그에 관한 뉴스도 떠돌았지만 자세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뒷세계의 존재 그 자체였으니까. 괜히 그에 관해 떠들었다가 시민들이 불안에 떨면 곤란했다.
그렇게 사건이 마무리되고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주말을 그렇게 보내고 맞이하는 월요일이 고역이었지만 이나에게는 그보다 다른 문제가 있었다.
“정신없어서 잊고 있었네.”
이나가 끄응 신음을 흘렸다.
“본부장님이 내 정체를 숨겨 주시려나.”
S급 던전을 함께 공략했으니 등급은 어느 정도 짐작했을 테고, 정령도 있었다.
헌터 협회 본부장인 그가 이런 대박 소식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하아. 미치겠네.”
이나가 헌터 협회 앞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자 정령들이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다가왔다.
[이나야, 괜찮아?]
[머리 아파?]
“어. 머리 아파 죽겠다.”
[이나 죽으면 안 돼!]
[어서 병원 가자!]
자신을 병원으로 이끌려는 정령들을 달랜 뒤 이나는 협회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출근은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 주에 하루 출근 안 했는데, 어떻게 설명하지.’
하필 그때 던전에 휘말린 상태라 출근이 불가능했다.
이나가 홍보 팀 앞에서 들어가기를 망설이고 있자 마침 그녀를 발견한 옆자리 대리가 그녀를 불렀다.
“이나 씨, 안 들어가고 여기서 뭐 해요?”
“네? 아, 그…….”
홍보 팀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이나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저번 주에 출근 안 해서 죄송해요!”
갑자기 사위가 조용해졌다. 혹시 화났나 싶어 이나가 고개를 빼꼼 들자 대리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요. 다 알고 있으니까.”
“네? 알다니…… 뭘요?”
“본부장님 따라 어디 좀 같이 다녀왔다면서요. 이미 들었어요.”
“네?”
이건 또 뭔 소리래?
이나가 눈을 끔뻑였지만 이미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몇몇 사람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묻기도 했다.
“이나 씨, 정말 본부장님이랑 아무 사이 아니에요?”
“네. 아닌데요.”
“정말요?”
“정말요.”
이나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그들은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한이 보았다면 통탄할 일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상황 파악은 잘되지 않았다. 이나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자리로 가는데 마침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유이나 씨 있나요?”
“네?”
고개를 돌리자 어떤 여자가 그녀를 찾고 있었다. 이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말했다.
“본부장님께서 부르십니다.”
“본부장님이요?”
다시 한번 홍보 팀 직원들의 시선이 이나에게 쏠렸다. 머뭇거리던 이나가 대답했다.
“……갈게요.”
이나는 얼굴을 살짝 굳히며 그녀를 따라갔다. 이나가 자리를 비운 사이 홍보 팀 직원들이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본부장님이랑 싸우기라도 한 걸까요?”
“역시 사랑싸움?”
“하지만 이나 씨는 아무 사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 같던데?”
“그럼 설마…….”
누군가가 말끝을 흐리자 모두의 시선이 그 사람에게 향했다. 그녀는 흥분한 얼굴로 외쳤다.
“본부장님의 짝사랑?”
“마음을 고백했는데 이나 씨가 곤란해하는 거고?”
“꺄악! 어떡해!”
이나는 모르는 소문이 홍보 팀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 헛소문이 나아가 협회 전체에 퍼지게 될 것이라고는 이나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한편 이 사실을 모르는 이나는 본부장실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어찌나 망설이는지 일을 보고 있던 비서가 눈치를 줄 정도였다.
“안 들어가시나요?”
“그…… 마음의 준비를 좀 하고…….”
비서의 눈동자에 곤란해하는 기색이 스쳤지만 그녀로서도 이해는 되었다. 말단, 그것도 일개 아르바이트생이 협회의 본부장을 만나려면 당연히 떨릴 테니까.
물론 이나는 그런 걸로 떨 사람이 아니었다.
‘갑자기 기자 회견 잡아 놨으니까 나가란 소리를 하진 않겠지?’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겨우 막아 놓은 집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경위서를 쓰게 한 인간이 아니던가.
들어가자마자 정체를 까발릴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말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나가 문 앞에서 한참 동안 끙끙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서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 들어올 건가요?”
“……들어가요.”
그의 얼굴을 보자 순간 심장이 철렁했지만 이나는 태연하게 들어갔다. 서준은 그녀에게 소파를 가리킨 뒤 상석에 앉았다.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어색한 침묵만이 본부장실을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서준은 이나의 눈치를 힐끗 보았다. 그러다 불안한 눈빛과 마주하고는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오늘 제가 부른 이유는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지만 서준은 모른 척하고 말을 이었다.
“제가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