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149)

“잠깐만요!”

이나가 서준의 입을 막았다. 그가 의아해하며 쳐다보자 이나는 조금 억울하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평범하게 살고 싶은 게 죄는 아니잖아요.”

“네?”

“전 그냥 얌전히 살고 싶을 뿐이에요. 돈? 명예? 그런 거 필요 없다고요.”

서준이 묘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이나는 괜히 초조해져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가 본부장님 목숨 구해 줬잖아요.”

“……그렇죠?”

“그 대가를 이런 식으로 갚을 생각이에요?”

서준의 눈이 느리게 깜빡거렸다. 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뭐예요, 갑자기? 왜 웃어요?”

“이나 씨가 걱정하는 바는 잘 알겠습니다.”

서준이 여전히 즐겁다는 듯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런데 그 이유로 부른 게 아니에요.”

“……아니에요?”

“네. 이나 씨의 정체는 숨기기로 결정했습니다.”

뜻밖의 말이 나오자 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시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아니, 그…… 좀만 빨리 말해 주지…….”

“제 말을 멈춘 건 이나 씨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이나가 멋쩍어하는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그러다 서준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요?”

“이번 일 때문에요.”

“이번 일?”

고개를 갸웃하던 이나가 물었다.

“제가 목숨을 구해 준 일이요?”

“그 이유도 있고, 이번에 이나 씨가 표적이 된 일을 말하는 겁니다.”

“그게 왜요?”

“이나 씨를 드러내면 온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다음에는 더 강한 자들이 이나 씨를 노리고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걸 우려해서 결정한 일입니다.”

“음. 하긴. 제가 일반인인 척하면 저를 해치려 한다고 해도 비교적 약한 놈들이 몰려올 테고, 그럼 제가 대응할 수 있겠네요.”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그렇죠.”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한 이나는 갑자기 회의감에 휩싸였다.

“근데 제가 평생 나쁜 일을 해 본 경험이 없는데, 왜 갑자기 암살 타깃이 된 걸까요.”

서준이 쓰게 웃으며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좋게 비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하아. 세상 살기 참 각박하네요.”

서준도 침묵함으로써 동의했다. 복잡한 눈빛을 띠던 이나는 고개를 저으며 상념을 털어 버렸다.

“일단 알겠어요. 암살자가 또 올지는 모르겠지만 염두에 두고 있을게요.”

“네. 그리고 참고로 말해 두는 거지만, 이번 일에 대해선 입막음을 해 뒀습니다. 뉴스로 퍼질 일은 없을 거예요.”

“이야. 어쩐지 홍보 팀 사람들이 제가 일 있어서 자리 비운 줄 알더니. 역시 일 처리가 빠르셔. 감사해요.”

이나가 웃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서준도 픽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내려가 봐도 좋아요.”

“네. 그럼 가 볼게요.”

본부장실을 나가는 이나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나는 문을 열다 말고 서준을 돌아보았다. 그가 의아해하며 쳐다보자 이나가 히죽 웃었다.

“본부장님, 제가 많이 애정하는 거 알죠?”

“네?”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요.”

그 말을 남기고 이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서준은 한숨과 함께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말이지 너무하네.”

반쯤 드러난 그의 얼굴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자기 기분 좋을 때만 저러고.”

***

이나는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도하도 그녀의 정체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이번에 서준도 같은 약조를 했다.

덕분에 눈앞에 펼쳐진 길이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이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멈춤 없이 내려가던 엘리베이터가 한 층에서 멈춰 섰다. 다른 사람들이 올라타고 다시 내려가려는데.

텁-

닫히는 문 사이로 갑자기 손 하나가 쑥 들어오더니 엘리베이터를 잡아 세웠다.

그 탓에 문이 다시 열리고 누군가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를 본 이나가 반갑게 불렀다.

“어? 오빠!”

평소라면 빙긋 웃으며 인사했을 이한이 오늘은 무슨 일인지 얼굴이 굳어 있었다.

이나가 고개를 갸웃하자 눈썹을 꿈틀 움직인 이한이 그녀의 옆에 섰다.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도, 밥은 먹고 왔냐는 다정한 물음도 없었다. 그에게서 서늘하게 풍기는 분위기에 이나는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 있어?”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자 이한은 이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얼떨결에 따라가던 이나는 망설이다 그에게 물었다.

“오빠, 왜 그래?”

그제야 이한이 움직이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깊은 한숨과 함께 뒤를 돌아보았다.

“유이나.”

이한이 그녀를 불렀다. 그것도 성까지 붙여서 딱딱하게.

그가 이러는 경우는 화가 단단히 났을 때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던 이한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요 며칠 뭐 했어?”

“응? 뭘 했냐니…….”

이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최근에 한 것이라곤 던전 공략과 그녀를 죽이려던 암살자를 잡은 것 외엔 없었다.

물론 이한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이나가 굳은 얼굴로 우물쭈물하자 이한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너한테 전화했었어. 그것도 몇 번이나.”

이나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던전 안에서는 그 어떤 통신 기기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던전에 있었으니 이한의 연락이 닿을 리 없었다. 그러니 그가 전화했다는 사실 또한 모를 수밖에 없었다.

“통화가 불가능한 지역이라고 하더라. 금요일엔 출근도 안 하고. 홍보 팀 사람들도 네가 어딜 갔는지 모르겠다고 하고.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온 거야?”

“그게…….”

이나는 머리를 굴렸다. 살아생전 이만큼 빠르게 머리를 굴려 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최악이지만 그래도 덜 최악인 방향으로 상황을 밀고 가기로 했다.

“바다에…… 있었어.”

“바다?”

“응. 실은 본부장님과 업무차 바닷가 쪽에 다녀왔거든. 거기서, 그러니까…… 크루즈를 태워 주시지 뭐야? 하필 거기가 와이파이가 안 터지는 데였나 봐. 하하…… 하…….”

도하도 함께 있었다는 말은 쏙 뺐다. 서준이야 알아서 눈치채고 맞장구쳐 줄 테지만, 도하는 그런 쪽에서는 눈치가 영 꽝이었으니까.

일부러 웃음도 흘려 보았지만 이한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입은 꾹 닫혀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욕을 참기 위해 다문 것처럼 보였다.

“그놈이랑 며칠 동안 같이 있었다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사실이었기에 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한이 계속해서 물었다.

“그놈이랑 사귀어?”

“절대 아니야. 그분은 그냥…… 그래. 따지자면 친구지.”

사귀는 건 아니라는 말에 이한의 굳은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이나는 그의 눈치를 보다가 결국 말했다.

“미안해, 오빠. 미리 말을 했어야 했는데.”

말하지 못하는 걸 용서해.

뒷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꺼내지 못했다. 그녀의 진심을 느낀 건지 이한이 움찔하더니 결국 표정을 부드럽게 만들어 보였다.

“……다음부턴 미리 말 좀 해 줘. 얼마나 걱정했다고.”

“응. 미안.”

“어휴.”

이한의 손이 이나의 머리에 닿았다. 가만히 쓰다듬는 손길에 이나의 입가에도 곧 미소가 피어올랐다.

피식 웃던 이한이 갑자기 표정을 굳히더니 물었다.

“근데 이나야, 그놈이 무슨 짓 한 건 아니지?”

“에이. 오빠, 본부장님이 무슨 짓을 한다고 내가 가만히 당할 사람이야?”

“그건 그렇지. 우리 이나는 강하니까.”

다시 돌아온 다정한 호칭에 이나가 킥킥 웃었다. 이한은 그녀의 양어깨 위에 손을 얹고선 비장하게 말했다.

“너도 성인이니까 억압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그의 눈빛에 순간 살벌한 기운이 스쳤다.

“너를 데려가려는 놈이 있다면 일단 내가 봐야겠어.”

‘그건 억압하는 게 아냐?’

이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한과 화해한 건 좋은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요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

“흐아. 피곤하다.”

일하다 잠시 휴식을 취하러 나온 이나가 벤치에 널브러졌다.

생각해 보면 피곤할 만도 했다. 지난 주말엔 암살자를 잡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바로 출근했으니.

이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귓가에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어오는 건 덤이었다.

“너 이번에 여름휴가 어디로 갈 거야?”

“나 이번에 제주도 가려고.”

“오, 제주도? 얼마나 있다 오게?”

“자리를 오래 비울 순 없으니 주말 포함해서 한 5일 정도?”

“크으. 좋겠다.”

이나는 그 대화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휴가라…….”

그러고 보니 슬슬 직장인들은 다들 여름휴가를 쓸 시기였다.

물론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기에 휴가라는 개념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도 주 3회 출근 중이고.

이한도 아마 휴가를 쓰지 못할 것이었다. 지난번 몬스터에게 당한 일 탓에 이미 차고 넘치게 쉬었으니까.

물론 이나는 그걸 휴가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한의 입장에서 보면 주변 눈치가 보여서라도 쓰기 어려울 터였다.

‘올해는 둘 다 어디 놀러 가긴 글렀네.’

이나는 씁쓸한 마음을 커피로 달랬다. 그런데 정령들이 초를 쳤다.

[이나야, 이나야. 우리는 휴가 또 안 가?]

“안 가.”

[왜? 우리도 휴가 가자!]

“그게 가고 싶다고 가지는 게 아니야. 누군 안 가고 싶어서 안 가는 줄 알아?”

[가고 싶은데 왜 못 가?]

“어른의 사정이란 게 있는 거다, 이것들아.”

정령들이 시무룩해졌다. 그 모습을 보니 이나는 괜히 에휴, 하고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나가 정령들을 빤히 보았다. 정령들이 마주 쳐다봐 오자 그녀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확인해야 할 게 있었는데 깜빡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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