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도 여파가 가시고 이나는 슬쩍 눈을 떠 보았다. 라쿠틀라에게서 풍기는 연기의 탄내가 코끝을 스쳤다.
리카의 바람으로 연기를 날려 버리자 등껍질 안에 몸을 숨긴 라쿠틀라가 보였다.
하지만.
쩍- 쩌적-
벼락의 여파로 인해 등껍질이 시현의 검이 꽂혀 있는 곳에서부터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퍽-
그리고 이내 완전히 산산조각 나 호수 위로 조각이 하나둘 떨어져 내렸다.
이나는 잊지 않고 함께 떨어져 내리는 시현의 검을 잡아챘다. 검을 든 채 고개를 돌리자 등껍질을 잃어 속살이 드러난 라쿠틀라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구어……. 구워어……!”
“슬슬 끝내자고.”
지니고 있던 유일한 방어 수단을 잃은 라쿠틀라는 더 이상 이나의 공격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이나는 다시 한번 귀를 막고 볼트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볼트가 짧은 애도의 말과 함께 능력을 썼다.
[잘 가시게.]
콰과광!
커다란 벼락이 또 한 번 라쿠틀라에게 내리쳤다. 등껍질을 잃은 라쿠틀라는 그 벼락을 맨몸으로 고스란히 받아 냈다.
파직- 파지직-
전류가 흐르는 라쿠틀라의 몸이 호수 위에 축 늘어졌다. 동시에 시스템 창이 그녀의 눈앞에 떠올랐다.
⌜S급 던전 ‘호수를 지키는 바위’ 공략에 성공하셨습니다!⌟
⌜‘라쿠틀라의 비늘’을 획득하셨습니다.⌟
⌜‘성스러운 옥(S)’을 획득하셨습니다.⌟
⌜‘호수의 장막(A)’을 획득하셨습니다.⌟
⌜5SP를 획득하셨습니다.⌟
“오. 꽤 짭짤한데.”
이나는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머금고 획득한 아이템을 대충 훑어보았다. S급 아이템에 A급 방패까지 들어 있었다.
시현이 함께 들어와 있다곤 하나 공략한 건 그녀 혼자였다. 그래서 그런지 보상이 ‘하르피아의 둥지’를 공략했을 때만큼이나 좋았다.
아이템 정보를 읽던 이나는 시스템 창을 끄고 시현이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무기를 잃을까 봐 내심 조마조마했던 시현이 그녀가 오자마자 검의 안위부터 살폈다.
“……다행히 무사하군요.”
“제 얘기예요, 검 얘기예요?”
“둘 다입니다.”
시현은 이나가 내미는 검을 얼른 챙겼다. 소중하게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자 이나는 괜히 그를 놀리고 싶어졌다.
“누가 보면 검이 와이프라도 되는 줄.”
“검사에게 검은 파트너와 같습니다.”
“만약 일이 잘못돼서 저와 검이 위험에 처해 있다면 누구부터 구할 거예요?”
거의 농담으로 건넨 질문이었다. 시현이 잠시나마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놀리고 싶어서.
그런데 예상외로 시현은 단번에 하나를 선택했다.
“당연히 이나 씨입니다.”
“왜요? 그렇게 끔찍이 아끼더니.”
“아무리 그래도 사람 목숨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애초에 제가 이 일을 하는 이유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니까요.”
이나는 왠지 가슴이 간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 감동한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이런 기분은 낯설어서 괜히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충분히 혼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상황이라면요? 그럼 검을 구할 거죠?”
시현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이나 씨를 구할 겁니다.”
“……왜요? 저 강해요.”
“강한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하고 싶습니다.”
예상외로 진지한 대답에 당황한 것은 이나였다. 그 와중에도 시현의 시선은 올곧게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누구랑 참 닮았네.’
이나는 오랜만에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런 사람이 있었는데.
이나의 눈빛이 어쩐지 애틋해지자 시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애틋한데…… 동시에 씁쓸한 기운도 감돌았다.
그가 괜찮냐고 물으려는 순간 이나가 감정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부러 밝게 말했다.
“그보다 바쁘다면서요. 슬슬 나가죠.”
“아. 그 전에.”
무언가 생각난 듯 시현이 호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나도 그의 시선이 향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호수에 떠 있는 라쿠틀라와 부서진 등껍질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시현은 호수에 둥둥 떠 있는 등껍질 조각을 가리키며 물었다.
“괜찮으시다면 등껍질 조각을 몇 개 가져가고 싶습니다.”
“저건 왜요?”
“라쿠틀라의 등껍질은 매우 단단합니다. 분명 방어구 제작에 요긴하게 쓰일 겁니다. 마침 저렇게 작게 부서졌으니 말입니다.”
“거참 알뜰하네요. 가져가요.”
“감사합니다.”
시현이 호수 연안에 쭈그리고 앉아 크기가 적당한 등껍질 조각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S급 헌터가 그러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우스워서 이나는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도와줘요?”
“아, 그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왕이면 이 정도 크기의 멀쩡한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알겠어요. 얘들아.”
[와아! 보물찾기 시간이다!]
이나의 부름에 정령들이 호수 위로 날아갔다. 그가 요구한 것을 척척 가져오는 정령들을 보며 시현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정령은 정말 편리하군요.”
“그렇죠.”
일은 정령들에게 시키고 풀밭에 앉은 이나가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하품을 하며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햇빛은 따뜻하고, 바람은 선선했다. 눈앞에는 맑은 물이 채워진 거대한 호수도 있고.
던전만 아니었다면 나들이로 나오기에 무척 좋은 장소였다.
햇빛을 머금어 반짝이는 물결을 응시하던 이나가 대뜸 시현을 불렀다.
“……이시현 헌터.”
“네.”
“우리 주말에 여기로 바캉스 올래요?”
“네?”
시현이 그게 무슨 해괴한 소리냐는 듯한 눈빛으로 이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나는 진심이었다.
“솔직히 여기 너무 예쁘잖아요. 날도 좋고 물도 깨끗해서 수영하기도 좋고.”
“하지만 여긴 던전 안입니다.”
“그래도 몬스터만 없으면 좋은 휴양지가 될 것 같지 않아요?”
이나의 물음에 시현은 입을 다물었다. 몬스터만 없다면 그도 같은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생각을 읽은 이나가 그를 살살 꼬시기 시작했다.
“저 혼자 들어오면 분명 다들 뭐라고 할 테니까 다 같이 들어오자고요. 라쿠틀라는 오늘처럼 해치우면 되잖아요?”
“하지만…….”
“라쿠틀라는 바깥으로 끌어내서 해치운 다음에 우리끼리 몇 시간 놀다 가는 거예요. 어때요?”
“…….”
이나의 꼬심에도 시현은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결국 이나는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그럼 이시현 헌터는 들어오지 마요. 저 혼자라도 들어올 테니까.”
“네? 그건 안 됩니다.”
“그럼 같이 들어오시든가.”
시현은 한참 동안 입을 달싹거렸다.
이나는 대충 감이 왔다.
시현이 그녀와 함께 들어오리라는 게.
***
“이시현 헌터가 올 것은 예상했는데…….”
이나가 가늘게 뜬 눈으로 시현의 옆에 선 도하를 바라보았다.
“도하 씨는 왜 여기 있는 거예요?”
“글쎄 이시현 이놈이 휴가를 간다는 얘기가 들리지 뭐야. 휴가라곤 평생 가지도 않던 녀석이 휴가를 간다고 하니까 수상해서 캐물었지. 그랬더니 불더라고.”
도하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그는 이미 바캉스를 즐기러 가는 차림이었다.
이나가 헛웃음을 흘리자 이번엔 시현이 그녀의 옆에 선 이를 보며 물었다.
“그러는 본부장님은 왜 여기 계신 겁니까?”
“공략한다고 알리러 갔다가 겸사겸사 바캉스도 즐기고 오겠다고 하니까 따라온다더라고요.”
이나도 떨떠름한 눈빛으로 제 옆에 선 서준을 올려다보았다. 서준은 빙긋 웃으며 이나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저도 휴가가 필요한 사람이라서요. 좋은 곳이 있다고 해서 따라왔습니다.”
“그래도 S급 던전인데요.”
“그런 곳으로 바캉스를 간다고 한 사람은 이나 씨입니다. 안전하니까 간다고 했겠죠.”
“그건 그렇지만…….”
이나가 끄응 신음을 흘렸다.
‘뭐, 사람은 많을수록 즐거우니까.’
애써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자 마음이 편해졌다.
그때 도하가 이나의 어깨 위에 올라간 서준의 손을 노려보며 외쳤다.
“야! 그 손 안 치워?”
“나름 친근감의 표시였는데요.”
서준이 아쉽다는 얼굴로 이나의 몸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알게 모르게 굳어 있던 시현의 얼굴도 풀어졌다.
이나는 오늘의 바캉스 멤버를 주욱 훑어보다가 두 사람, 시현과 도하를 보며 물었다.
“S급 헌터가 둘이나 가도 되는 거예요? 한 명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남는 게 좋지 않아요?”
“괜찮아, 괜찮아. S급 헌터가 우리뿐이야? 몇 명 더 있잖아. 여차하면 무명 쪽에서 나서겠지, 뭐.”
도하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대한민국 3대 길드인 천조, 청호, 그리고 무명. 무명의 길드장 또한 S급 헌터였다.
그가 던전 밖에 있는 한 시현과 도하가 잠시 자리를 비워도 큰 문제는 없긴 할 터였다.
조금 마음이 편해진 이나가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러자 도하가 킬킬 웃으며 앞장섰다.
“자! 그럼 가자!”
“크르릉!”
아란도 그의 옆에 서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청호 길드장이 정말 신난 모양이군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서준도 들어갔고.
“우리도 가죠.”
“……네.”
뒤이어 이나와 시현도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시야가 뒤바뀌고 전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오늘의 바캉스 장소였다.
도하는 인벤토리에서 언월도를 꺼내 호수 쪽을 가리켰다.
“자! 나와라, 거북이!”
“크르릉!”
도하와 아란은 어째 평소보다 더 흥분한 것 같았다. 모처럼의 바캉스에 신이 난 모양이었다.
어휴, 하고 한숨을 내쉬던 이나가 그에게 말했다.
“도하 씨, 잊지 마세요. 오늘의 목적은 바캉스예요. 호수를 더럽히면 안 되니까 숲 쪽으로 최대한 유인하라고요.”
“알고 있어!”
진짜로 알고 있는 건가.
이나는 물론 시현 또한 의심의 눈초리로 도하를 바라보았다. 그는 얼른 나오라는 듯 호수를 향해 언월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호수의 물이 출렁였다. 그리고 마침내 라쿠틀라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