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149)

“나왔구나, 거북이!”

도하가 언월도를 빙글빙글 돌리며 흥분을 드러냈다. 언뜻 광기마저 보이는 모습에 이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이 라쿠틀라 제삿날이구나.”

어차피 그들이 나가면 리셋되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앞서 건넸던 말은 기억하는지 라쿠틀라를 잔뜩 약 올리던 도하가 숲 쪽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라쿠틀라가 육중한 몸을 움직여 뭍으로 거대한 발을 올렸다.

쾅!

“어이쿠.”

라쿠틀라의 발이 땅을 밟을 때마다 거대한 진동이 땅을 울렸다. 그 탓에 이나가 살짝 휘청거리자 양쪽에서 이나의 팔을 붙들었다.

이나는 고개를 돌려 서준과 시현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조심하십시오.”

두 사람의 부축으로 이나는 다시 똑바로 섰다.

그 와중에도 라쿠틀라는 숲으로 자신을 유인하는 도하를 밟아 버리기 위해 열심히 그를 쫓아가고 있었다.

서준이 그 광경을 보며 걱정을 내비쳤다.

“청호 길드장 혼자서 괜찮을까요?”

“혼자 안 보냈으니까 걱정 마세요.”

“네?”

이나는 대답 대신 인벤토리에서 꺼낸 짐을 뒤적거렸다.

“그보다 우린 바캉스 준비나 하고 있죠.”

“텐트는 제가 치겠습니다.”

시현도 거들었다. 도하는 전혀 걱정 안 하는 듯한 그 모습에 서준 혼자 심각해졌다.

[와아! 바캉스다!]

[드디어 시작하는구나!]

그러다 이나 곁을 맴도는 정령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이나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굳이 모습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세 정령은 어디 갔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정령은 이즈, 파인, 그리고 네움뿐이었다. 다른 정령들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서준은 도하를 혼자 보내지 않았다는 이나의 말을 이해하고 피식 웃었다.

“행동력이 정말 빠르네요, 이나 씨는.”

“본부장님은 느리고 말이죠. 자요. 가만히 있지 말고 이시현 헌터가 텐트 치는 거나 도와주세요.”

“그러죠.”

서준은 이나가 건넨 텐트 폴대를 들고 시현에게 다가갔다. 그사이 이나는 라쿠틀라가 보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 신났구만.”

계약을 한 덕에 이나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정령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나 볼트는 지금 말 그대로 물 만난 물고기였다.

콰광!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때마침 번개가 라쿠틀라를 내리찍었다. 고통스러워하는 라쿠틀라의 비명에도 시현과 서준은 자기 일에 몰두했다.

이나는 상반되는 두 광경을 번갈아 보다가 시현과 서준에게 다가갔다.

전투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

“아아, 재밌게 싸웠다. 오랜만에 스트레스가 아주 쫙 풀리네.”

도하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의 뒤로 숲에 버려진 라쿠틀라가 보였다.

라쿠틀라의 등껍질은 전처럼 산산조각이 난 채였다. 방어구 제작에 좋을 거라는 시현의 말에 도하가 부숴 놓은 것이었다.

이나는 돌아온 그에게 음료수를 내밀며 말했다.

“수고했어요.”

“땡큐. 잘 마실게.”

캔 뚜껑을 치익 딴 도하가 안에 들어 있는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는 크으, 하고 기분 좋은 듯한 소리를 내더니 반짝이는 눈으로 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보다 유이나, 네 정령들 엄청 세더라.”

“그래요?”

“어. 게다가 유용하더라고.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쉽게 처치했어.”

“다행이네요.”

“그래서 말인데.”

도하가 은근슬쩍 어깨동무를 해 왔다. 이나가 거부하지 않고 얌전히 듣는 자세를 취하자 도하가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붙이며 속삭였다.

“나중에 나랑 한 번만 싸워 주면 안 되냐?”

“됐거든요.”

이나는 단번에 거절하고 그의 팔을 밀어내려 했다. 그런데 도하가 갑자기 팔에 힘을 주더니 이나의 어깨를 당겨 목에 팔을 걸었다.

“그러지 말고! 응? 다시 한번 생각해 봐.”

“아, 싫다니까요.”

“그럼 나중에 던전 들어갈 때 정령 빌려줘.”

“그것도 제 능력 들킬 수 있으니까 싫어요.”

“거참 깐깐하네.”

“그보다 이거나 놓으시죠?”

이나가 그녀의 목에 건 도하의 팔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그런데 도하는 그녀를 빤히 보더니 히죽 웃으며 팔을 풀지 않았다.

“싫은데? 빠져나가고 싶으면 빠져나가 봐.”

“아, 진짜 뭐래! 저 마력에 전부 투자해서 마력 빼고는 스탯이 전부 일반인 수준이거든요?”

이나는 그렇게 외치며 도하의 팔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물론 그럴수록 도하가 웃으며 팔에 힘을 주어 이나가 못 빠져나가게 했다.

이나는 귀찮아했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친구처럼 친근했다. 도하도 오랜만에 편안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다.

“청호 길드장.”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도하가 멈칫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시현이 얼굴을 살짝 굳히고 서 있었다.

그는 엄한 목소리로 도하에게 말했다.

“그 손 놔.”

“와. 네가 말하니까 더 놔주기 싫은데?”

도하가 은근한 미소를 흘리며 이나를 감추듯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시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방금 한 말 못 들었나? 이나 씨의 마력을 제외한 스탯은 일반인에 가까워. 네가 조금만 힘을 주어도 다칠 수 있다.”

“그래서 다치지 않게 조절 중이잖아.”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은 최대한 멀리하는 게…….”

“그냥 내가 유이나랑 같이 있는 게 싫은 건 아니고?”

시현이 멈칫하더니 도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마주 노려보는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위압감이 일렁이는 듯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이나도 발버둥을 멈추고 눈치를 보았다. 그때 서준이 나타나 그녀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갑자기 당겨지는 힘에 도하가 무심코 이나를 잡은 팔에 힘을 주려 했다. 그러나 자칫 이나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시현의 말이 떠올라 그는 그냥 이나의 팔을 놓아 버렸다.

그것을 노렸다는 듯 이나의 손을 잡은 서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싸우실 거면 이나 씨는 두고 두 분이서 싸우시죠. 마침 여긴 아무도 보지 않는 S급 던전이니까요.”

“본부장님?”

이나는 본부장이라는 사람이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 황당하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든 말든 서준은 이나의 양어깨를 잡고 텐트 쪽으로 이끌었다.

“자, 자. 이나 씨는 저랑 간식이나 먹으면서 싸움 구경하죠.”

“아니, 저기요?”

서준에게 끌려가면서도 이나는 뒤를 힐끗 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서로를 노려보던 시현과 도하는 이제 멍한 얼굴로 서준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다시 서로를 째려보다가 반대 방향으로 흩어졌다.

“어휴. 무슨 애들도 아니고.”

이나가 중얼거리자 서준이 피식 웃었다.

“아쉽네요. 희대의 전투를 볼 수 있나 했는데.”

“헌터 협회 본부장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저 두 사람이 싸우면 여긴 초토화될 거라고요. 다치는 건 물론이고요.”

“설마 죽기 살기로 싸우겠어요?”

서준이 어깨를 으쓱하며 태평한 말을 했다. 이제 보니 저 둘이 싸울지언정 서로를 죽이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 듯했다.

이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보니 애가 셋이었다.

[이나야, 이나야. 우리 언제 놀아?]

[얼른 물에 들어가자!]

정정한다. 정령들을 포함해 애가 아홉이었다.

이나는 물에 들어가자고 보채는 정령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기다려. 물에 들어갈 복장으로 갈아입어야 들어가지.”

[물에 들어갈 복장이 따로 있어?]

[지금 옷을 입고 들어가면 안 돼?]

“이 옷 입고 들어가기엔 좀 무리가 있지.”

이나는 입고 있는 블라우스를 만지작거렸다. 이걸 입고 들어가면 수영을 하기는커녕 움직이기도 불편할 터였다.

마침 텐트도 설치했겠다, 이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며 바깥에 있는 남정네들에게 경고했다.

“혹시라도 텐트 열면 죽여 버릴 거예요.”

“그럴 일 없으니 걱정 말고 갈아입으세요.”

서준이 양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시현과 도하도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사실 세 사람 모두 그럴 사람들은 아니기에 이나는 안심하고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이나가 수영복으로 갈아입는 사이 세 사람도 옷을 갈아입기로 했다.

그들이 있는 S급 던전엔 보스 몬스터 라쿠틀라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몬스터가 없었다. 시스템의 배려로 인한 밸런스 조정인진 몰라도, 일단 라쿠틀라 하나만으로도 시간을 무지 잡아먹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나와 정령들 덕에 오늘은 쉽게 공략하긴 했지만 시현은 경계심을 놓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S급 헌터로서 활동한 덕에 생긴 본능 같은 것이었다.

그 탓에 시현은 검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기를 머뭇거렸다. 반면 도하는 웃통을 훌렁 벗어 던졌다.

단숨에 호수로 몸을 던진 도하가 크으, 하고 기분 좋다는 소리를 냈다.

“여기 물 엄청 좋네!”

도하는 발장구를 치며 단숨에 저 멀리 헤엄쳐 갔다. 그가 발장구를 칠 때마다 물이 파도처럼 높이 튀어 올랐다.

“청호 길드장께서 많이 신이 나신 모양이군요.”

서준이 호수를 헤엄치는 도하를 보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는 그야말로 수영복 위로 하와이안 셔츠까지 걸친 모습이 딱 이 순간을 즐기러 나온 사람이었다.

시현은 잠시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내가 예민한 건가?’

일반인인 서준마저 태평하게 즐기러 나왔는데 자신 혼자만 너무 경계하는 건가 싶었다.

자신을 제외한 사람들이 모두 특이한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시현이 여전히 머뭇거리는 사이 텐트 문이 활짝 열리며 이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벌써 들어갔어요?”

시현은 텐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나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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