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그럼.”
도하가 히죽 웃으며 무언가를 앞에 탁 내려놓았다.
“시작해 볼까?”
“진짜 하려고요?”
“당연하지! 마침 해도 졌겠다, 이거 하기 딱 좋은 시간대 아니겠어?”
반기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도하가 꺼낸 것은 다름 아닌 거짓말 탐지기였다.
어디서 본 건 있는지 물놀이를 한 후에 진실 게임을 하기 위해 챙겨 온 것이라 했다.
도하는 흥분한 얼굴로 콧김을 내뿜었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차마 거기다 대고 꼭 해야겠냐는 질문은 할 수가 없어서 이나는 그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시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서준이 웃고 있었지만 저 사람이야 원래 웃는 상이니.
이나가 한숨을 삼키며 도하를 회유해 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우리가 던전에 들어온 지도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나가서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모르는 소리! 원래 이런 건 물올랐을 때 해야 한다고.”
혼자만 물오른 것 같은데.
이나가 미간을 꾹 눌렀다. 그러든 말든 도하는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또 꺼냈다.
“원래 이런 건 술병으로 해야 제맛이지만.”
탁!
그가 이번에 꺼낸 것은 단검이었다.
도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깜빡하고 안 챙겨 왔으니까 대충 이걸로 해!”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할 모양인 듯했다.
이쯤 되니 이나도 더 이상 말릴 수 없었다. 그냥 빨리 끝내고 나갈 수밖에.
모두 순응하자 도하가 가운데에 놓인 단검 위에 손을 올렸다.
“자, 그럼 나부터 돌린다. 가라!”
단검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도하 혼자 흥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가 공격할 상대는 누구냐!”
이내 단검의 속도가 느려졌다. 움직임을 멈춘 단검의 끝이 가리킨 것은 시현이었다.
도하는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좋았어! 이시현 당첨!”
“하아.”
시현이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든 말든 도하는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시현 너는 스스로를 나보다 아래로 생각한다. 자, 거짓말 탐지기 위에 손 올리고! 맞으면 Yes, 아니면 No로 대답해!”
“아니다.”
시현이 빠르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도하가 버튼을 누르자 거짓말 탐지기에 빛이 들어왔다. 한참 반짝거리던 탐지기가 최종적으로 드러낸 빛은 녹색이었다.
진실이란 뜻이었다.
“아니, 왜! 이시현 이 자식! 나보다 위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냐?”
잔뜩 흥분한 도하가 당장에라도 시현의 멱살을 잡을 듯이 으르렁거렸다. 그 와중에도 시현은 묵묵부답이었다.
그 꼴을 한심해하며 바라보던 이나가 결국 끼어들었다.
“진실 게임 그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럼?”
“질문이 잘못되었다고요. 보통 이럴 땐 흑역사나 연애 위주로 묻지 않나?”
심드렁하던 시현과 서준이 ‘연애’라는 말에 귀를 쫑긋 움직였다. 도하도 꽤 흥미로운지 눈을 반짝거렸다.
“흑역사나 연애라……. 오케이. 접수.”
‘괜히 알려 줬나.’
이나는 왠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나가 말을 꺼낸 순간부터 단검이 적극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번엔 시현이 공격할 차례였다.
“저군요.”
시현이 공격할 사람은 서준이었다. 서준은 어서 물어보라는 듯이 시현을 응시했다.
질문을 고민하던 시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최근에 본부장님을 만나기 위해 협회에 방문한 천조 길드원을 이유 없이 안 만난 적이 있습니까?”
같이 질문을 듣던 이나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에이. 설마 본부장님이 그랬겠…….”
“있습니다.”
“엑.”
이나가 고개를 홱 돌려 서준을 쳐다보았다. 그는 찔리는 기색 없이 당당한 얼굴이었다.
시현이 싸늘해진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 와중에 서준은 거짓말 탐지기 위에 손을 올려 진실 판정을 받았다.
사위가 고요하다 못해 서늘해졌지만 서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마침 이나 씨에게 가던 중이었거든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니, 왜 나를 끌어들여요!”
이나는 괜히 시현의 눈치를 보며 서준을 타박했다. 하하 웃던 서준은 조심스럽게 단검을 손에 쥐었다.
“그럼 제 차례군요.”
휙-
서준이 단검을 빙글 돌렸다. 도하와 시현만큼 섬세한 컨트롤은 없어 단검이 다소 투박하게 돌아갔지만 누군가 다치는 일은 없었다.
이번에 단검의 끝이 향한 사람은 도하였다.
“뭐야. 나야?”
“그런가 보군요.”
“좋아. 말해 봐.”
서준은 그를 보며 질문을 고민하다가 툭 내뱉었다.
“협회에서 들어온 던전 공략 요청이 귀찮아서 천조 길드에 대신 맡긴 적이 있나요?”
“그, 그건……!”
도하가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시현이 눈을 치켜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서준도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대답은?”
“……있다.”
도하가 거짓말 탐지기 위에 손을 올렸고, 역시나 진실 판정을 받았다.
서준이 설명해 보라는 듯 웃으며 바라보자 도하가 억울해하는 얼굴로 외쳤다.
“아니, 그렇지만 거기 놈들 너무 약하다고!”
“그래도 A급 던전이었습니다. 그만한 공략을 남한테 미뤄도 되나요?”
“그건…… 아니지만…….”
도하의 어깨가 추욱 늘어졌다. 어쩌다 두 사람에게서 피해를 입은 사실이 밝혀진 시현의 기세가 흉흉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날 선 분위기 속에서 이나는 세 사람을 보며 생각했다.
‘진실 게임이 원래 이런 게임이었나?’
이러다 칼부림이라도 날까 봐 걱정되었다.
이나는 어떻게든 흥분한 분위기를 가라앉혀 보기 위해 도하에게 말했다.
“그보다 얼른 단검 돌려요. 도하 씨 차례잖아요.”
“아. 그렇지.”
맥이 빠졌는지 도하가 힘없이 단검을 돌렸다. 빙글빙글 두 바퀴 정도 돌던 날 끝이 향한 곳은.
“나?”
이나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방금까지 눈빛이 죽어 있던 도하가 다시 살아났다.
“오. 드디어 걸렸구만.”
“뭘 물으려고…….”
이나는 어쩐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최근에 세 사람에게 잘못한 게 있는지 머릿속으로 열심히 기억을 뒤졌다.
그러는 사이 도하가 질문을 던졌다.
“현재 좋아하는 사람 있어?”
“……왜 저는 연애 질문이에요?”
“됐고, 얼른 묻는 말에나 답해.”
도하는 물론 시현과 서준도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없어요. 됐죠?”
“좋아. 그럼 거짓말 탐지기 위에 손 올려.”
이나는 순순히 거짓말 탐지기 위에 손을 올렸다. 도하가 버튼을 누르고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내가 무슨…….’
한때 좋아했던 사람이면 몰라도.
곰곰이 생각하던 이나의 머릿속에 한 인물이 떠올랐다. 동시에.
삐이-
“악!”
처음으로 거짓말 탐지기가 붉은 빛을 발하며 전기를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화들짝 놀란 이나가 탐지기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고요한 침묵이 네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거짓말이라고?”
도하가 멍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현과 서준도 꽤나 놀란 얼굴로 굳어 있었다.
그 묘한 분위기 속에서 이나는 괜히 탐지기를 툭 쳤다.
“이거 불량품이네. 아니에요. 저 진짜 좋아하는 사람 없어요.”
“…….”
“그보다 이번엔 제가 공격할 차례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나는 단검을 돌렸다. 그녀가 공격할 사람으로 도하가 걸렸다.
이나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질문했다.
“도하 씨, 아란 몰래 혼자서 간식 먹은 적 있어요?”
“어, 어?”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옆에서 자고 있던 아란이 고개를 들었다. 도하는 아란의 눈치를 보다가 슬쩍 대답했다.
“이, 있긴 한데……. 근데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크르르…….”
“야, 아란! 나 못 믿어?”
“크왕!”
“우왁!”
아란이 도하에게 달려들며 두 파트너가 투닥거렸다. 도저히 게임할 분위기가 아니어서 이나는 몸을 일으켰다.
“슬슬 일어나죠. 이러다 바깥 시간이랑 꽤 차이 나겠어요.”
“그러죠.”
그녀의 말에 서준도 자리에서 일어나 텐트를 정리하러 갔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이나와 시현뿐이었다.
이나도 슬쩍 짐 정리를 위해 자리를 옮기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손목이 잡히자 고개를 돌렸다.
시현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나 씨, 아까 그거, 진짜 거짓말입니까?”
“아뇨. 아까도 말했다시피 진실이었어요.”
“하지만…….”
“진짜예요. ‘현재’ 좋아하는 사람은 없거든요.”
이나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누군가 떠오른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먼 과거의 일이죠.”
“먼 과거?”
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말하는 ‘먼 과거’가 왠지 아득한 과거를 뜻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물음에도 이나는 더 대답해 주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건 여기까지. 이시현 헌터도 얼른 짐 챙기세요.”
“……알겠습니다.”
그녀를 지나치는 시현의 얼굴은 왠지 뭔가가 탐탁지 못한 듯했다.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것도 같았다.
이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깜깜한 밤하늘 위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도시에선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래서일까. 잠시 전생이 떠올랐다.
전생의 그녀일 적의 일을 떠올리던 이나는 고개를 내리고 걸음을 옮겼다.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인천 공항엔 사람이 가득했다. 휴가철로 인해 외국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진 탓이었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한 남자가 공항 출구로 향했다. 겨우 밖으로 나와 하늘을 볼 수 있게 된 그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진짜. 귀찮게시리.”
옆에서 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그를 곁눈질했다.
외국인처럼 보이는데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게 신기한 탓도 있지만, 그의 옷차림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더운 여름에 발목까지 오는 긴 옷을 입고 있었다. 코트인지 망토인지 모를 그 옷은 심지어 검기까지 했다.
언뜻 비치는 안쪽 셔츠도, 신발도 모두 검은색이었다. 검은색에 미친 사람인진 몰라도 보는 사람을 더 덥게 만들었다.
정작 그는 덥지도 않은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사람들이 신기해하며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홱 돌려 얼굴을 구겼다.
“뭘 봐?”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자고로 미친놈하고는 상종하지 않는 것이 정답이었다.
그는 여전히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이놈은 왜 연락이 끊겨서는 날 귀찮게 만들어?”
그가 말하는 ‘이놈’이란 그의 부하를 뜻했다.
암살 의뢰를 위해 한국으로 보낸 그의 그림자.
그는 그림자의 주인이자 보스, 앤드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