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움직인 덕에 이나와 이한은 정오가 되기 전에 부모님이 있는 납골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납골함 옆에는 죽은 부모님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이한은 그것을 빤히 들여다보다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찾아뵙네요.”
말을 고르는 듯 잠시 머뭇거리던 이한이 띄엄띄엄 말했다.
“저흰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저는 여전히 협회에서 일하는 중이고, 이나는, 음……. 최근에 퇴사하고 제가 있는 협회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런 얘긴 뭐 하러 해. 그냥 잘 지내고 있다고만 말하면 되지.”
이나가 옆에서 작게 툴툴거렸지만 이한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사진 속 부모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무튼 저흰 잘 지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사진 속 웃는 얼굴이 마치 그와 이나에게 웃어 주는 듯했다.
이나는 이한을 힐끗 보았다. 부모님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중인지 눈가가 아련하게 젖어 있었다.
이한은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평범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녀보다 부모님과 지낸 시간이 더 길었던 만큼 떠오르는 추억도 많을 터였다.
이나는 그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켜 주기로 했다. 충분히 이야기하고 나오라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오자 숨통이 조금 트이는 듯했다.
이곳으로 들어오고부터 내내 말이 없던 정령들도 그제야 입을 열었다.
[이나 님, 여긴 슬픈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럴 수밖에. 여긴 죽은 사람을 추모하기 위한 공간이거든.”
[이나네 부모님도 여기 있는 거야?]
“그렇지.”
[히잉……. 너무 슬퍼.]
훌쩍이는 이즈의 말에 이나는 쓰게 웃었다.
정령들도 슬퍼해 주는 부모님의 죽음에, 정작 자식인 그녀는 덤덤할 수밖에 없다는 게 조금 씁쓸했다.
“오늘은 왠지 술이 땡기는걸.”
아무래도 회포도 풀 겸 집으로 돌아가서 이한과 함께 맥주라도 까야 할 것 같았다.
이나는 이한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참으로 근처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늘은 날씨가 맑았다.
손부채질이 절로 나올 정도로 덥기도 하고.
“윈티, 에어컨 좀 부탁해.”
[네……!]
이나는 이 더운 여름을 나기 위해 밖에선 윈티의 능력을 사용했다.
통칭 에어컨이라 부르며.
윈티가 능력으로 주변을 시원하게 만들자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이나가 땀을 훔치고 벤치에 기대 있는데 마침 어떤 남자가 그녀의 앞을 지나갔다. 교회에서 볼 법한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였다.
“……음?”
그런데 그 사람이 갑자기 멈칫하더니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 공기를 사악 쓸어 보았다.
이나는 아차 싶어 리카에게 더운 공기를 이쪽으로 끌어오라고 명령했다. 그 탓에 다시 더워져 땀이 삐질삐질 나왔지만 남자의 의심 어린 표정은 조금 풀어졌다.
“……이상하군.”
“무슨 일 있나요?”
이나는 모르는 척 그에게 물었다. 의심도 풀어 줄 겸 얼른 보내 버리기 위함이었다.
남자는 그녀를 지그시 보더니 대답했다.
“순간 여기만 시원했던 것 같아서요.”
“그래요? 전 더운데.”
일부러 옆에 앉아 있는 파인을 만지작거리니 땀이 절로 새어 나왔다.
이나의 모습을 본 그가 멋쩍은 듯 웃었다.
“그러게요. 착각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이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나는 깜짝 놀라 몸을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뭔데? 왜 나한테 오는 건데!’
불안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다행히 그가 그녀의 정체를 눈치챈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술사처럼 허공을 휘젓더니 아무것도 없던 손안에 무언가를 쥐고 그녀에게 내밀었다.
“더워 보이시는데 이거라도 드셔 보시죠.”
“이게 뭔데요?”
이미 알고 있는 물건이었지만 이나는 모른 척했다. 그녀는 지금 일반인이었으니까.
던전산 아이템 냉기환을 내민 그가 웃으며 말했다.
“냉기환이라는 아이템입니다. 먹으면 더위가 좀 가실 겁니다.”
이나는 머뭇거리다 그것을 집어 들었다.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건 함부로 받지 말라고 배운 그녀는 몰래 아이템 정보 창을 띄워 보았다.
‘아이템 정보.’
띠링-
⌜냉기환(C)
내용: 몸의 열을 낮춰 주는 환입니다. 일시적으로 더위를 느끼지 않게 됩니다.
효과: 1시간 동안 불 속성 기운 50% 감소⌟
‘평범하네.’
그냥 평범한 냉기환이었다. 다른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이나는 그것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와그작, 소리와 함께 냉기환이 입 안에서 부서졌다. 그러자 시원한 기운이 입 안에서 감돌다 목 너머로 사라졌다.
냉기환을 꿀꺽 삼킨 이나는 시원함을 느끼고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진짜 몸이 시원해졌네요.”
“그렇죠?”
남자가 싱긋 웃었다. 그 얼굴을 정면으로 보고 있자니 이나는 왠지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하긴 생각해 보면 헌터니 TV에 몇 번 얼굴을 비추었을 수도 있었다. 그녀가 기억을 못 할 뿐.
이나는 별생각 없이 넘어가며 말을 흘렸다.
“헌터신가 봐요.”
“네. 맞습니다.”
“혹시 TV에 나온 적 있으세요? 어디서 본 것 같아서.”
“음. 자주는 아니지만 몇 번 나온 적 있습니다. 보통은 제 길드의 부길드장이 대신 출연해 주거든요.”
제 길드? 부길드장?
왠지 누군지 알 것 같은 기분에 이나는 미간을 좁혔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는 이내 눈을 치켜뜨며 외쳤다.
“설마…… 무명?”
“어. 아시나요?”
“모르는 게 더 이상하죠!”
천조, 청호에 이어 대한민국 3대 길드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는 길드.
무명. 그곳의 길드장이 지금 그녀의 앞에 있었다.
천조, 청호와 달리 무명은 조금 특이했다. 던전 공략을 주로 나서는 천조와 청호와 달리, 무명은 현실의 사건 사고를 주로 처리했다.
가령 헌터가 끼어 있는 살인, 마약, 인신매매 같은 사건들이라든가.
그래서 사람들은 무명 길드를 존경하는 한편, 음습하다고 칭하곤 했다. 길드장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으니 더 그랬다.
그런데 설마 그런 곳의 길드장이 이렇게 대놓고 길가를 걸어 다니고 있을 줄이야.
게다가 엄청 무서울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얼굴도 성격도 젠틀했다.
이나는 뒤통수가 얼얼했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그녀가 입을 벙긋거리고만 있자 무명의 길드장, 한주원이 난처한 듯 웃음을 머금었다.
“제가 놀라게 해 드린 모양이군요.”
“조금이요. 무명의 길드장을 대낮에 보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길드 이름도 ‘없을 무(無)’에 ‘밝을 명(明)’자를 써서 무명이니 말이다.
이나의 말을 들은 한주원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였다.
“음. 저도 사람입니다. 무명 길드의 길드장이라고 대낮에 움직이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요.”
“그건 그런데…… 뭔가 제가 느끼고 있던 틀을 깨부순 느낌이랄까.”
사람이 멀쩡하게 생겨서 더 그런 느낌이 드는 듯했다. 되게 무뚝뚝하고 음침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나는 그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혹시 이 근처에서 안 좋은 사건이라도 일어났어요?”
“저를 사건과 떼 놓지 못하시는군요.”
“그야…….”
무명이니까요.
이나가 뒷말을 삼키며 그를 바라보자 그가 난감하다는 듯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감이 좋으시다고 해야 할지. 사실 이 근처에서 사건이 일어나긴 했습니다.”
“뭐야. 진짜였어요?”
이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영 느낌이 구린 게 얼른 이한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이나의 마음을 느낀 한주원이 양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심각한 사건은 아닙니다.”
“무명이 나설 정도면 헌터가 끼어 있을 텐데 심각하지 않다고요?”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지만, 정말로 심각한 사건은 아닙니다. 도난 사건이거든요.”
“그런데 무명이 나섰다고요?”
“그게…… 도난당한 게 조금 특이해서…….”
“뭐길래요?”
“자세한 건 민간인에게 말씀드리기 조금 그렇습니다.”
이나가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선 당연한 행동이었기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해결됐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한주원이 입을 열었다.
“그럼.”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빙긋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다만 눈빛은 조금 전과 달리 차가웠다.
“부디 좋은 시간 보내고 가시길.”
이나는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이미 한주원은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 뒤였다.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나가 중얼거렸다.
“착각인가. 눈빛이 서늘했는데.”
[나 저 사람 싫어!]
가만히 있던 이즈가 뜬금없이 외쳤다. 정령들이 누군가를 싫어하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이나가 물었다.
“싫다고? 왜?”
[으음. 그냥 싫어. 안 좋은 기분이 들어.]
[나도 그랬어.]
[저도요……!]
전생에서도 그랬지만 정령들의 감은 대체로 들어맞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나는 정령들의 말을 흘려들을 수 없었다.
“흐음.”
이나는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한주원을 가만히 응시했다. 어쩐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
이한이 밖으로 나오자 이나는 그와 함께 택시를 타고 서울로 이동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은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었다.
“얘기는 잘 나눴어?”
“응. 이나 너처럼 의연해질 때도 됐는데 매번 올 때마다 감정이 올라오네.”
“나야 뭐 두 분과 지낸 기간이 짧으니까. 그보다 배고프다. 뭐 먹을까?”
“이나 네가 먹고 싶은 걸로 먹자.”
“그럼 오랜만에 같이 치맥?”
“대낮부터?”
“치맥에 낮이고 밤이고가 어딨어.”
웃음을 흘리던 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는 의미였다.
원하던 대로 술을 마시게 된 이나가 아싸, 하고 주먹을 쥐었다.
“음? 무슨 일 생겼나?”
택시 기사의 말에 이나와 이한이 고개를 돌렸다. 택시 맞은편에 경찰차가 서 있었다.
이나는 문득 이 근방에서 사건이 일어났다는 한주원의 말이 떠올랐다. 혹시 관련된 일인가 싶어 긴장감이 조금씩 올라왔다.
택시가 경찰차를 피해 옆으로 돌아가는데 이한이 누군가를 발견하고 말했다.
“어? 김지훈 팀장님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