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49)

불이 꺼져 깜깜한 회의장 안. 아무도 존재하지 않던 그곳에 잠시 후 희미한 빛이 나타났다.

널찍한 테이블의 한 자리를 차지한 그 빛은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남자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등 뒤에는 거대한 대검을 멘 채였다.

가장 먼저 회의에 참석한 마르코스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중얼거렸다.

“뭐야. 아무도 안 왔나?”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개의 빛이 나타났다. 그들을 본 마르코스가 반색했다.

“오! 이제야 오기 시작하는군. 왜 이렇게 늦었어?”

“우리가 늦은 게 아니라 당신이 빨리 온 거예요, 마르코스. 난 바쁜 사람이라고요.”

소피아가 어깨 위에서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돌돌 말며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머쓱해진 마르코스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할망구 성질은 여전하군.”

“감히 누구보고 할망구라는 거죠?”

“뭐야, 뭐야. 오자마자 또 싸우는 거야?”

성인 허리께에나 올 것 같은 어린아이 두 명의 모습을 띤 빛이 새롭게 나타나더니 흥미로워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마르코스의 옆에서 얌전히 앉아 있던 카우보이 옷차림의 바타르가 슬쩍 말을 던졌다.

“애들도 보는데 그만 싸우는 게 어때?”

그제야 마르코스도 소피아도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쌍둥이만이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우리 애 아닌데!”

“좀 더 싸워 봐!”

“너희도 얌전히 있어라, 니나, 유리.”

바타르가 엄하게 말하자 쌍둥이가 동시에 쳇, 소리를 냈다.

그사이 두꺼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던 마르코스가 말했다.

“그나저나 나머지 놈들은 왜 안 와?”

그 순간 고글을 머리에 쓴 한 사람의 빛이 추가로 나타났다. 마르코스가 그를 보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오. 사무엘, 네가 먼저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그야 내가 마지막이니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나머지 둘은 오지 않을 거야.”

사무엘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가 모두 의문을 표했다.

“한 명이야 원래 단독으로 움직이는 편이니 그렇다 치고…… 앤드류는 왜 오지 않는다는 거죠?”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다들 모이라고 했어.”

사무엘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앤드류가 죽었다.”

무거운 침묵이 회의장 안을 가득 채웠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쌍둥이였다.

“뭐어? 앤디가 죽었다고오?”

“거짓말이지? 장난치는 거지? 나도 장난치는 거 좋아하지만 이런 장난은 싫어!”

혼란스러워하는 쌍둥이를 옆에 앉은 소피아가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녀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평소에 좀 멍청한 구석이 있는 편이긴 했지만 앤드류의 능력은 다들 알고 있었다. 쉽게 죽을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바타르가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확실한 건가?”

“그래. 앤드류에게 내렸던 힘이 사라졌다는 그분의 전언이 있었다.”

“이거야 원. 빼도 박도 못하겠군.”

마르코스가 끄응,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잠시간의 침묵 후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

“살해당한 거냐?”

“아마도.”

“어디서?”

“위치상 한국인 것 같아.”

“한국? 그 조그마한 땅에 앤드류를 죽일 정도의 강자가 있다고?”

마르코스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얌전히 대화를 듣고 있던 소피아가 말을 꺼냈다.

“한국이면 지금 이 자리에 없는 그자의 고향 아닌가요? 연락해서 조사해 보라고 하면…….”

“그놈이 퍽이나 그러겠군.”

마르코스가 코웃음 치며 반박했다. 소피아가 그를 째려보았지만 이어진 사무엘의 말에는 그녀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코스의 말대로 걔는 우리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을 거야. 연락이 되기나 하면 다행이겠지.”

“하여간에…….”

“그러니 마르코스, 바타르, 너희가 가는 게 좋겠어.”

“엑……. 우리가?”

마르코스가 귀찮다는 얼굴로 되묻자 사무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명이 가서 확인하는 게 좋은데, 여기서 가장 호흡이 좋은 건 너희 둘이니까.”

지금 이 자리에 사무엘의 말을 거역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는 ‘그분’의 말을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결국 마르코스는 툴툴거리면서도 그의 말을 승낙했다. 바타르야 워낙에 말을 잘 듣는 사람인지라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무엘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다시 그에게로 시선이 집중되자 사무엘은 한국으로 떠날 두 사람을 보며 말을 이었다.

“조만간 너희에게 아이템이 하나 도착할 거야.”

“아이템? 무슨 아이템?”

사무엘은 그들에게 아이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들은 이들이 얼굴을 굳혔다.

“그런 아이템을 한국에서 쓴다고? 왜?”

“아무래도 그분께선 한국에 ‘그것’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야.”

마르코스가 입을 헤 벌렸다. 사무엘은 그의 머릿속에 심어 주듯이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니 이 임무는 중요해. 앤드류의 죽음은 물론, ‘그것’에 대해서도 잘 조사하고 와.”

“나 참. 당연하지. 그분의 명령인데.”

마르코스도 바타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엘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평소의 나른한 목소리로 돌아왔다.

“그럼 난 연구할 게 있어서 이만 가 봐야겠어.”

“드디어 끝났구만. 그럼 바타르, 나중에 한국에서 보자고.”

“그래.”

사무엘, 마르코스, 바타르의 빛이 먼저 사라졌다.

회의장에 남게 된 쌍둥이가 소피아에게 물었다.

“소피아, 소피아, 만약에 한국에 진짜 ‘그것’이 있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글쎄요. 다른 건 몰라도.”

소피아의 눈이 가늘어지며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감돌았다.

“한국은 멸망하겠죠?”

***

“……죽었다고요?”

이나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그녀의 옆에 선 서준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수용소 교도관이 발견했을 땐 이미 숨이 멎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아니, 대체 수용소 관리를 어떻게 한 거래요?”

이나가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녀가 앤드류를 얼마나 힘들게 제압했는지 알기에 서준은 그저 쓴 미소를 머금었다.

앤드류가 수용소 안에서 사망했다. 그것도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범인이 누군진 몰라도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들어가 사람을 살해한 것부터가 이미 예사 수준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범인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이나가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중얼거렸다.

“앤드류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인가? 하지만 수용소 경비를 뚫을 정도면 실력이……. 대체 누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준이 그녀의 손을 살짝 붙잡아 입에서 떨어뜨렸다.

“그러다 손톱 망가져요.”

“냅둬요. 내 손톱이에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나는 더 이상 손톱을 물어뜯지 않았다.

서준이 피식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는 말했다.

“미안합니다, 이나 씨.”

“뭐가요?”

“제가 수용소 관리에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 건데…….”

앤드류는 전남에 있는 헌터 수용소에 구금되어 있었다. 서울에서 일하며 그곳까지 관리하기엔 서준은 너무 바쁜 사람이었다.

그걸 알기에 이나도 그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본부장님 잘못 아닌 거 알아요. 그냥 그 범인이 너무 셌던 거죠. 아무리 지방이라지만 범죄를 저지른 헌터들을 잡아넣는 곳인데 관리가 허술할 리 없잖아요.”

이나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팔짱을 낀 손으로 팔을 툭툭 두드리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의문이에요. 대체 어떤 강자가 앤드류를 죽인 것인지.”

“그날 수용소를 방문한 사람도 없고 CCTV에도 찍힌 게 없었다고 합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죠.”

서준도 심각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이나가 툭 말을 내뱉었다.

“혹시 K일까요.”

“설마요. 동료를 죽인다고요?”

“앤드류도 자신의 부하를 스스럼없이 죽이는 놈이에요. 그놈의 동료라고 다를 바 있겠어요?”

서준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이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무튼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모르고 지나갈 뻔했네요.”

“아닙니다. 이나 씨도 알 건 알아야죠. 물론 천조 길드장이 알면 저를 꾸짖겠지만요.”

서준이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이나도 조금 쓴 미소를 머금으며 동감했다.

며칠 전 전남에 있는 호텔에 머물렀을 때, 시현이 그녀에게 말했다.

“이나 씨는 이 일에서 빠져 주십시오.”

모두가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예민해진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왜요?”

“평범하게 살고 싶다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돌아온 말에 이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시현이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며 말을 이어 갔다.

“이 일에 연관되면 평범한 삶은 물 건너갈 겁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되겠죠. 저는…… 이나 씨가 다치지 않고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나 씨가 스스로 말했듯이.”

“…….”

“이 일은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니 이나 씨는 원하는 대로 평범한 삶을 사십시오. 오빠분을 위해서라도.”

그런 말을 들었는데 어떻게 끼어들 수가 있을까.

서준과 헤어진 뒤 이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쩐지 가슴이 씁쓸하고도 답답했다.

그 상태로 사무실로 돌아오자 팀장이 그녀를 발견하고 물었다.

“본부장님과 이야기 잘 끝났어요?”

“네.”

“근데 안색이 왜 그렇게 안 좋아요?”

이나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고 자리에 앉자 웬 파일이 도착해 있었다.

이나가 그것을 클릭하자 때마침 뒤에서 팀장이 그녀에게 물었다.

“아, 이나 씨, 파일 하나 도착했을 텐데 봤어요?”

“네. 지금 확인했습니다.”

“그거 홈페이지에 정리해서 올려 줘요. 중요한 거니까 올리기 전에 글 확인받고요.”

중요한 거?

팀장이 중요하다고 말할 정도면 정말 중요한 것인 모양이었다. 이나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파일의 내용을 확인한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랭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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